어느 비건 베이커의 소망
처음 베이킹을 시작한 계기는 다름 아닌 케이크였다. 강남역 사거리의 지친 퇴근길, 내 손의 천근 같은 서류 가방과 달리 하얀 상자를 든 채 제과제빵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던 사람들. 그들의 얼굴에 스며 있던 복숭아처럼 발그레한 기쁨을 보며 나도 케이크를 만들고 싶어졌다.
사람들은 케이크를 좋아한다. 특별한 날에는 케이크가 그 순간을 강조해 주고, 특별하지 않은 날도 케이크로 분위기가 달라진다. 예약 케이크 주문을 받는 날엔 평소보다 몇 배 정성 들여 케이크를 만든다. 소중한 날의 의미만큼 맛있기를 바라며 과일도 자꾸 더 넣고 아이싱(케이크에 크림을 발라 다듬는 일)도 한 번씩 더더... 그러다 보면 피식, 하며 '나도 누가 이렇게 만들어준 예약 케이크 먹어보고 싶네'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사실 다른 사람이 만든 빵과 케이크를 쉽게 먹지 못한다. 갈 수 있는 빵집이 거의 없다. 어쩌면 비건 베이커리를 운영하는 가장 큰 목적은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먹고 싶은 빵과 케이크를 만들어서 다 먹어버리겠다는. 시중의 빵집 대부분은 비건이 아니기도 하지만 비건이라 해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들어간 재료를 모두 알 수 없거나 원치 않는 재료가 들어가기 때문. 감명 깊게 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우영우는 김밥은 믿음직스럽다고 했는데, 김밥과 달리 케이크는 겉으로 봐서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기 어렵다. 결국은 직접 만들어야 안심이다.
그런 내게도 10년 전, 매일 케이크를 사먹던 날들이 있었다. 몸을 조여 오는 거미줄에 꼼짝없이 걸린 듯한 관계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던 시기였다. 단골 가게에서 먹는 케이크 한 조각은 하루 중 유일한 기쁨이자 첫 끼니였다. 케이크에 담긴 정성과 시간만으로도 사랑받고 대접받는 기분이 들어서였을까? 종류가 많지 않은 그 가게의 케이크는 단순하면서도 손맛이 살아있는 세련된 형태였다. 마치 '나는 다른 케이크들과 달라요. 기존의 틀에 넣을 수 없으니 이런 생김새로 충분하죠.'라고 말하는 듯한 모습은 먹는 이의 자존감을 높이고 슬픔을 잊게 했다.
이제는 마음먹으면 언제든지 케이크를 만들어 먹을 수 있지만, 가끔 누군가 만들어주는 케이크가 먹고 싶은 날이 있다. 글을 읽지 않고 계속 쓰기만 하는 것이 불가능하듯 케이크도 만들기만 하면 만드는 힘이 고갈되기 때문이다. 케이크 대신 부드럽고 상냥한, 케이크 같은 사람을 만나도 큰 에너지를 얻을 수 있다.
다행히 이런 존재가 주위에 많다는 걸 요즈음 깨달았다. 내 맘대로 그들을 ‘수호천사들’로 부르는 건 이 글을 읽는 당신과 나의 비밀... 재료 원가가 높고 채식에 대한 오해도 많아 운영이 쉽지 않은 비건베이커리를 꾸려가는 우리를 지켜보며 응원해 주시는 분들이다. 이들과 존중 넘치는 대화를 나누는 일은 케이크보다 단연 좋은데, 아무리 반복해도 이가 썩거나 살이 찌는 등의 뒤탈은커녕 마음이 풍요로워지고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기 때문이다.
"저는 여기 팬심으로 오는 거니까 용기 할인(개인용기 지참 시 10% 할인을 적용하고 있다) 해주지 마세요. 그냥 여기에 정말 오래 계시면 좋겠어요."
"(수줍게) 저희 동네에 비건베이커리가 생겨서 맛보시라고 좀 가져왔어요. (비건빵을 주심)"
"오, 뭔가 새로 나왔네요? 일단 이거 하나 주시고요."
"제가 비세권(비숍+역세권)에 산다고 친구가 정말 부러워해요."
하루 2시간의 명상을 통해 겨우 평온을 유지하는 나와 달리 볼 때마다 차분하고 친절한 이 분들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라... 천사.
숨 막히던 대도시 서울에서 탁 트인 평택으로 이사와 비건베이커리를 연 지 이제 곧 2년이 된다. 우리보다 먼저였던 매장을 포함, 그동안 생겨났던 평택의 비건베이커리들은 아쉽게도 모두 영업을 종료했거나 현재 휴업 중이다(그 짧은 기간 동안). 그럴만한 것이 비건에 대한 이곳의 인식은 서울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남은 우리 가게의 이름은 게임 후반부로 갈수록 힘이 세지는 체스의 말 비숍(Bishop)과 같은 발음인데, 아무래도 미래의 내가 보낸(?) 예언적 직감이 작용한 것 같다.
다수의 비건 베이커들이 떠난 자리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살뜰히 격려한다. 매일 더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의 근육을 키웠다면 오늘의 운동 완료! 새로운 레시피를 하나라도 적용해 보았다면 오늘의 연구 완료. 닮은 길을 걷는 사람들과 함께 평화를 확장하고, 생명을 위협받는 존재들에게 힘이 되는 진동이고 싶다. 매일 먹어도 무해하고 부드러운 한 조각의 케이크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