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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Feb 10. 2021

일본'인' 위안부도 있었다

만몽개척단 1


일본은 1936년부터 자국 하층민들을 만주와 몽골로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하는 '만몽개척단'을 만든다. (시험적인 이민은 1932년쯤 시작했다.)


_ 만주를 식량생산 기지로 만들기 위해. 


_ 1929년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실업자가 된 하층민들이 반정부 세력으로 뭉치기 전에 본토에서 제거하기 위해. 


일본 정부의 목표는 20년간 100만 가구, 500만 명 이주였으나 실제론 22~25만 명으로 목표치의 5%. 그중 9만 명은 청소년이었다.  



2018년 8월 15일, '아사히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되었다. 


_ 일본 기후현 구로가와(현 시로가와 마치) 마을에 살다 만주로 떠난 만몽개척단. 


_ 구로가와 마을 출신이라 ‘구로가와 개척단’이라 불린 6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_ 1945년 8월 15일 후, 즉 패전 후, 중국인의 보복 폭력에 떨던 이들이 집단 자살을 결심할 즈음 소련 군대가 들어온다. 


_ 개척단이 보호를 요청하자 15명가량의 여성을 위안부로 바치면 해주겠단다. 


_ 개척단 간부는 17~21세의 여성 15명을 소련군 부대에 위안부로 보낸다.      


만몽개척단 정착지


왜 어린 혹은 젊은 여성들이었을까?      


당시 20세였던 피해 여성이 증언한 개척단 간부의 말이다.     


“남편이 관동군에 징집된 부인들에게 위안부를 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잖아. 어린 너희들이 희생해야겠다.”     



나중에 발견된 간부들의 메모엔 ‘여자들을 바치고 수백 명의 목숨을 살린다’는 내용도 있었다.     


일본‘인’ 위안부는 1945년 9월부터 11월까지 소련군을 상대해야 했고 일부는 중국군 위안부도 겸했다고 한다.      


구로가와 개척단은 1946년 9월 귀국했다. 


모두 귀환에 성공했다는 자료도 있지만 사실은 여러 명이 성병과 발진 티푸스로 중국에서 사망했다.      


일본은 이들을 품어주지 않았다. 


어떤 이는 더럽다고 욕했고, 어떤 사람들은 거짓말하지 말라고 비난했다. 


많이 배운 이들은 ‘일본인 위안부’는 없다고 주장했다. 


조국으로부터 두 번이나 버림받은 ‘일본인 위안부’들은 사람 없는 곳으로 숨어들어 평생을 연명해야 했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도 이들에게 사과하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일본인' 위안부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한국인' 위안부의 존재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인 위안부를 인정하게 되면 '중국인' 위안부, '대만인' 위안부, '동남아인' 위안부도 줄줄이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지막엔, 네덜란드인 위안부 ‘얀 루프 오헤른’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 보수잡지 ‘문예춘추’ 2014년 10월호에 기고한 내용의 일부다.      


"네덜란드 여자들까지 위안부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퍼지면 큰일이다. 그전에(세계적으로 알려지기 전에) 급히 손을 쓸 필요가 있다."  



( * 서울대 서양사학과 주경철 교수는 '로마인 이야기'를 '일본 우익 작가가, 일본 우익들에게 이야기하는, 우익 에세이'라고 평가한다. 시오노 나나미는 전체주의 옹호, 제국주의 옹호, 역사 짜집기로 유명하다.)                  


( '1센티 인문학' 95-97장에서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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