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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엘 Apr 03. 2024

고난을 이기는 방법

특히 10대 아이들에게

생선에 고구마만 먹고 사는 가난한 섬 생활이 싫어 내 아버지는, 중학교만 졸업하고 바다를 건너 부산으로 ‘탈출’했다. 


발에 차이는 돌부리 하나 만큼도 비빌 언덕 없었지만, 아버지는 성공했다. 


열심과 운을 적당히 조합하면 쉽사리 집 한 채 장만할 수 있었던 1970년대, 아버지 열심은 한여름 폭우같은 행운을 만나, 실패한 10대 소년 가출기로 끝날 수도 있었을 인생을 서민갑부 비슷하게 만들었다. 


아버지는 어느 날, 낙동강뷰가 일품인 산 중턱 평지로 엄마와 우리 남매를 태우고 갔다. 


“이게 우리 땅이다.”


이젠 사진으로만 남아있는 그 날, 행운의 꼬리에 제 몸 엮어 따라오는 덩치 큰 불운을 알지 못한 채, 사진 속 나는 참 환하게 웃고 있었다.  


운수업으로 성공한 아버지는 제조업에 손댔다. 맥기라는 도금 공장이었다. 어른 돼서 알았다. 


그 공장이 병역특례업체였다는 사실도 어른 돼서 알았다. 아깝다.


공장 사택에 살았다. 마당 한켠에 채송화와 코스모스를 심고, 유기견도 키우고, 엄마가 수제 아이스크림과 도넛도 만들어주는,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오래가지 못했다. 


아버지는 공장을 운영할 지식이 없었고 그릇도 아니셨다. 


때마침 닥쳐온 1차인지 2차인지 오일쇼크를 넘지 못했다. 


우리집은 쫄딱 망했다.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할 때 그 부자는 준재벌급 이상이거나 미리 재산을 빼돌린 경우가 아닐까. 


정직하고 선했던 부모님은, 받을 돈은 떼먹히고 부도처리하면 될 돈은 사채 빚내서 갚으면서, 나락으로 빠졌다. 


내가 밟고 섰던, 지금은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그 야산은 다른 사람 차지가 되었다. 


그렇게 초등 고학년 내 인생에 스멀스멀 마가 끼기 시작했고, 중학교 땐 극한 가난에 빠졌다. 


도시락은 늘 김치 반찬이었고, 저녁은 김치국밥이나 수제비였다. 


마음씨 좋은 안경집에서 공짜로 준 안경을 쓰고 다녔고, 맥락은 잊었지만 동년배로부터 거지라는 소리도 몇 번 들었던 것 같다. 


빚쟁이가 학교로 찾아왔을 때 나는 겨우 중학교 1학년이었다. 


행복은 추상화였지만 불행은 극사실주의였다. 


돌아보니 신기한 건, 지옥이던 시간은 그래도 흘렀고, 불행의 끝을 다시 행운이 부여잡고 있었는지 서울대에 진학하게 되었고, 이후 내 앞가림 정도는 하게 되었고, 30대가 되자 부모님도 부양할 수 있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는 논밭을 많이 가진 지주라고 들었다. 


지금 부산 사상이란 곳에, 김해공항에서 출발한 경전철이 드나드는 그곳에 쇼핑몰이 있고 호텔이 있다. 


몇 십 년 전 그곳엔 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고 공단이 있었다. 


그 이전엔 논밭이었는데, 할아버지 땅이었단다. 


물론 논밭 단계에서 팔아 외할아버지는 그냥 평범한 농부로 살다 가셨다.


30대가 되자 삶을 복기할 수 있는 여유가, 나를 낯설게 볼 수 있는 사고 실험이 가능하게 되었다. 내 질문은 두 개였다.


“지금까지 유지했으면 수백 억이 되었을 부모님 자산을 물려받았으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외할아버지 땅이 남아있었더라면 나는 또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물려받은 기업을 아버지보다 더 훌륭하게 키운 2,3세들 많다. 규모를 줄여도 마찬가지. 


나는 다르다. 


100% 확률로 확신한다. 사방에서 출몰해 전국민 혈압수치를 10포인트는 너끈히 올리는 악당들, 그 중 하나가 바로 나였을 것라는 것. 


그 정도 사이즈가 아니라면 동네 구석에서라도 빌런 노릇 단단히 하고 있었을 인물이 나라는 것을.  


중세 가톨릭 교부들은 우리 내면에 천사와 악마가 있고, 잘 먹인 쪽이 이긴다고 했다. 


격하게 동의한다. 


디테일을 보강하면, 천사는 성냥 대갈통 크기인데 악마는 히말라야 사이즈로 시작할 수도 있다. 


그게 나인 것 같다. 


내 속 천사가 그 알량한 동정심과 긍휼함을 실천하게 할 때조차 악마는 불평과 후회를 속삭인다. 


그렇게 비루한 본성이 바로 나다. 


오늘 내가 그나마 인류애, 시민 의식, 연대, 존중, 인간에 대한 예의를 중요시하고 나름 실천하려고 분투하는 인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 파산 덕분이었다고 단언한다. 


지옥의 삶이 나를 신으로 인도했고, 공부밖엔 할 수 없게 유도했고, 인문학을 통해 새 인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나 된 것은 10대에 겪은 지옥 같은 고난, 고난 덕분이었다. 


나하나 멀쩡한 인간 만들고자 부모님과 누나가 그 고생을 했다고 볼 수 있으니 가족들에겐 참으로 미안하다. 


지금 깨달음으로 다시 10대로 돌아가라면? 


죽어도 안 간다.  


‘나라는 존재를 온전하게 하기 위해 고통이 있다’는 말은 고상하고 아름답다. 


하지만 결과론이다. 고통 속에 있을 때는 알 수 없다. 


고통 속에선 가족 얼굴 보는 것조차 위로는커녕 고통이다. 


비 온 뒤에 땅에 굳어질까? 


폭설이 올 수도 있다.  


고난을 견디는 법? 


없다. 


포기하지 않는 게 유일한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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