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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꿀 Feb 25. 2020

(13) 둘째는 아들이라 했더니

딸 꿀순이가 길을 잘 닦은 덕이라니요?


임신테스트기에서 두 줄을 확인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임신 32주 4일 차가 됐다. 출산까지 딱 59일 남았다.


심지어 석이 주수보다 큰 바람에, 수술을 한 주 당기기로 했으니 두 달도 남지 않은 셈.(꿀순이는 어느 정도 산통을 겪다 낳았지만 꿀꿀이는 바로 날 잡고 가서 낳게 생겼다. 자판기도 아니고 그냥 쑥 꺼낸다니 이상하다.)


이번 주 들어 배를 보니 배꼽이 '톡' 튀어나오는 중이었다. 그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어 남편에게 자랑(?)도 했다.


#

첫째를 임신했을 땐 몸의 변화에 무척 예민하고 기록도 꼼꼼히 했지만 둘째 임신은 확실히 무던해진다.


그러나 이미 경험한 루틴에 따라 변화의 핵심을 알기에 조금 예민하게 알아차리게 되는 포인트가 있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임신선이 생겼네.'

'그렇지. 지금쯤이면 배에 털이 나올 때지.'

'배 크기가 커져가는군. 아직은 발톱을 깎을 수 있겠어.'


또, 변하는 몸에 너그러워진 덕에 톡 튀어나온 배꼽도 귀엽게 보인다. 배꼽아, 더 많이 귀여워해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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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 17주 차 검진에서 둘째가 아들이란 걸 알게 됐다.


솔직히 딸인 줄 알았다. 임신 증상이 꿀순이 때와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다른 점이 있다면 꿀순이 때는 소양증으로 고생했는데 꿀꿀이는 괜찮단 거?)


그런데 그런 증상은 성별과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인지(아니면 내가 둔한 건지 뭔지) 둘째는 아들이었다.


초음파 검진을 하는데 선생님이 마우스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고추'라고 이야기했다.


#

주변에 둘째가 아들이라 했더니 아들을 키워본 엄마들의 반응 극과 극이다.


"아이고, 행복 끝. 고생 시작이네. 아들이 얼마나 별난데... 에너지가 장난 아니야 각오해."


"아들 키우는 게 수월했어. 딸보다 덜 예민하거든. 또 한 번씩 얼마나 심쿵한지 몰라."


아니, 어쩜 이렇게 반응이 다르단 말인가? 나는 이렇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성별보다는 그저 아이들의 기질이 저마다 다른 걸로.


실제로 최근 육아서를 읽으며 이 생각은 확고해졌다. 니콜라 슈미트의 <형제자매는 한 팀>이라는 책인데, 각자 성별에 따른 호르몬이 분출되는 건 10 대부터며, 그전에 주어지는 성역할과 행동 패턴은 교육되고 기대된 학습효과라는 것이다.(삼천포로 빠질 것 같아 이쯤 하겠습니다. 흠흠.)

이 책입니다. 추천!


#

어른들께 둘째가 아들이라 말했때 반응은... 괴했다.


열이면 열! 모두 잘 됐다고 칭찬을 하는데도 곱씹어 보니 남아선호 사상이 짙은 너무나 이상하고 기괴한 말들이었다.


그중 몇 가지를 소개해볼까 한다.


(1) "첫째가 복덩이네"


애매모호한 말이지만, 숨어 있는 의미는 분명하다. 아들을 임신 이제야 비로소 첫째가 복덩이가 되었다는 .(예민하다굽쇼?)


처음에 꿀순이가 태어났을 때 온 가족이 다 꿀순이더러 "복덩이~복덩이~"했다. 존재만으로도 축복이었으니까.


그래서 "첫째가 복덩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처음엔 별 생각이 없었다. 꿀순이는 진짜 복덩이였으므로.


러나 처음 만나는 어른들이 하는 말의 의미는 다르게 읽힌다. 첫째가 복덩이가 아녔으면 둘째는 딸이었을 것이며, 첫째가 복덩이라서 둘째가 아들이 뜻처럼 들린다.


"우리 꿀순이는 그냥 고유의 존재 자체로 복덩이입니다. 아셨지요?"


마음속으로 외쳐본다.


(2) "고렇지! 시집갔으면 아들 하나는 낳아줘야지!"


헉, 무슨 70~80년대인 줄.

심지어 이 말을 한 사람이 친정 엄마다.


남동생의 탄생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로 살았다며 본인은 아들 딸 차별하지 않겠노라 당당히 외쳤던 모친의 말이다.(실제로 엄마는 성별로 차별하지 않았다)


아들을 왜 꼭 낳아야만 할까? 그리고, 아들을 낳으면 낳는 거지 '낳아주는' 건 뭐란 말인가. 내가 꼭 아낳으러 시집간 사람처럼. 반대로 아들을 낳지 않으면 마땅한 도리를 안 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꿀순이가 여자라는 걸 알았을 때 친정엄마는 무척 좋아하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래, 딸이 좋아. 엄마 챙기는 것도 딸밖에 없다."


딸이라고 무조건 부모에게 잘하라는 법은 없는데... 곱씹을수록 이상했지만 축하 말을 곡해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게 들린다. 그리고 당연히 다르게 들어야 할 말이다.


이건 엄마의 축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다. 그저 좀 복잡스러운 마음이 었을 뿐.


우선, 엄마의 지난 세월을 생각해본다. 딸 아홉, 아들 하나인 집에서 '아들인 줄 알고 낳았더니 딸'이었던 사람. 하필 바로 밑에 남동생이 태어나는 바람에 천덕꾸러기가 됐고 학교에 가는 대신 동생을 업고 키워야 했던 소녀.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면 눈물만 다.


그런 엄마는 살기 위해 가부장적인 삶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춰 살았다. 60~80년대를 그린 드라마나 영화만 봐도 알 것이다. 여성들의 존재는 오빠나 남동생을 '뒷바라지하고', 시집가서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줘야 하고', 어르신들을 '수발해야 하는' 존재였다는 걸.


그 세월을 살아온 엄마의 언어란 그런 것이다.(그렇지만 싫은 티는 팍팍 냈다.)


(3) "이제 또 아들 낳지 않아도 되니 잘 됐네."


이건 시어머니의 말씀.


솔직히 듣는 순간 깜짝 놀랐다. 꿀순이를 정말 예뻐하시던 분이었고, 딸인걸 알았을 때도 무척 기뻐하던 분이셨으니까.


"좋겠다 개굴아. 엄마는 아들만 둘이라서 딸을 낳고 싶었어" 하던 어머니의 말씀은... 실은 아들 부심이었던 겐가. 흠흠.


어머니의 말을 계속 곱씹었다. 그러니까 둘째가 딸이었다면 아들을 낳기 위해 셋째도 낳아야 한다는 뜻? 아 이상하다. 어머니는 분명 "딸이어도 좋아. 얼마나 이쁘겠어" 하셨는데... 아아, 혼란스러운 맘이여!


"둘째가 딸이었어도 셋째는 안 낳았어요."


작게 대답해주었다.


(4) "첫째가 길을 잘 닦아놨네."


개인적으로 가장 경악스러웠던 반응이다.


네? 꿀순이는 아직 청소할 줄 모릅니다만...


솔직히 듣자마자 '헉'했다. 꿀순이가 길을 잘 닦아놔서 아들이 들어선 거라니. 그럼 그 전의 길은 굴곡진 길이었나? 아니면 은행잎과 열매들이 구르는 × 냄새나는 길이었나?


나에게도 남동생이 있다. 만약 나의 탄생이 남동생의 길을 터준 존재로만 인식되었다면 몹시 서러웠을 것 같다.


꿀순이는 아들이 나올 길을 깨끗이 청소하는 사람이 아니다. 딸은 아들의 탄생을 통해 존재를 인정받는 이들이 아니란 말이다. 부르르.


(거꾸로, 첫째가 아들이고 둘째가 딸이었을 때 아들더러 '길을 잘 닦아놨네' 하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

언어는 그 사회의 문화나 인식을 보여주는 척도다. 여성의 인권이 많이 나아졌고, 또 여성을 응원하고 인정하는 말들도 많아졌지만 관습화 된 표현들은 여전히 남아있다.(최근에는 혐오를 부추기는 성적 차별 표현이 난무한다.)


임신을 축하해준 수많은 말들의 온기를 기억한다. 그 말들에는 따뜻함과 진심이 묻어 있었다. 관습화 된 언어만으로 진심을 왜곡할 생각은 없다. 중요한 건 이들이 축하하기 위해 한 말이란 것이니까.


그러나 무심코 던진 이 말들의 의미를 우리는 진지하게 곱씹을 필요가 있다. 언어는 그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증명한다. 나 역시 가부장적 사회와 가정을 겪었고, 그 속에서 습관화된 성차별적인 언어들을 품고 살아왔다. 인정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나니 관습화 된 말들이 다르게 읽힌다. 딸과 아들을 둔 부모로서 자녀들에게 어떤 가치를 물려줘야 할까 고민하다 보니 성역할에 대해 제대로 가르쳐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아이들이 성 고정관념에 갇히지 말고 한 명의 인간으로서, 고유한 존재로서 인정받으며 씩씩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나부터가 문제의식을 갖고 변화해야 한다.


나는 꿀순이가 시집을 잘 가거나, 남자를 출세시켜 인정받는 삶을 사는 것에 반대한다. 꿀꿀이가 돈을 많이 벌어 훌륭한 가장이 되고,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는, 힘세고 운동 잘하는 남자로만 사는 걸 원치 않는다.



#

깨어 있어야겠다. 공부해야겠다. 좀 피곤하더라도 사소한 것들을 붙들고 싸워야겠다.


당신은 어떤 언어를 쓰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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