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주거 독립 이야기 1
반백수 암사자 씨, 즉 나는 내가 스무 살에 했던 부모 집 떠남을 반독립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내가 스스로를 반백수라고 칭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겸손이다. 일하는 시간이 짧아서 그렇지 풀타임 직장인만큼의 돈을 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스스로의 스무 살을 반독립 시기라고 칭하는 것은 오만에 속한다. 광주 부모님 집에서 부천 이모 집으로 보살핌을 받는 장소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나의 모친은 스무 살이 되어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된 나를 부천 사촌언니 집에 맡기며 울었다. 나중에 그 얘기를 들은 나는 깜짝 놀라게 된다. 첫째는 엄마가 울던 시간에 내가 엄마 품을 떠나게 되어 매우 신나 했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모성과 대치되는 나의 뒤돌아보지 않는 독립심이 무안해졌다. 둘째는 항상 냉정하던 우리 엄마가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했었나 하는 점이었다. 엄마는 감성보다 이성인 인간으로, 슬프면 문제를 해결하기 시작하는 사람이지 우는 사람이 아니다. 나를 떼어놓고 갈 생각에 슬퍼서 울다니, 우리 엄마 맞나 싶었다. 셋째는 완전히 혼자 살게 해 주는 것도 아니고 이모한테 맡기는 데 뭐가 걱정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이모 집에서 부천 역까지 15분, 부천 역에서 홍대입구 역까지 약 30분. 9시에 시작하는 1교시에 1학년 수업이 몰려있었으므로, 나는 매일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학교로 출발했다. 평생을 엄마가 해주는 아침밥을 먹고 등교를 했으므로, 이모가 아침 7시에 아침밥을 차려주시는 게 대단한 일인지 그 당시엔 몰랐다. 얹혀사는 주제에, 사촌 언니에게 치약을 중간부터 짜지 말라고 경고를 하고는 집을 나섰다. 이른 아침의 부천역은 간밤의 북적임과 혼란의 후유증을 털어내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해 있었다. 나는 그런 부천역이 뒤숭숭하고 무서워서 좋았다.
학교 생활은 당연히 열심히 했다. 신입생들을 위한 술자리가 거의 매일 있었다. 반은 과 행사였고 반은 동아리에서였다. 나는 양 쪽 모두의 핵인싸로 바쁘게 돌아다녔다. 술을 마셔야 대학생인 것 같았다. 날이 좋으면 맥주를, 비가 오면 동동주를, 눈이 오면 칵테일을 마셨다. 그렇게 놀다가 전철이 끊기면 이모에게 전화한 뒤 택시를 타고 이모 집으로 출발했다. 그러면 새벽에 이모가 택시비 2만 원을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연한 것처럼 이모가 택시비를 내고 나를 데리고 집에 들어가면 오늘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자랑하고 씻고 잤다. 아침에 일어나면 이모가 꿀물을 타 주었고 해장국을 끓여주었다.
이모와 이모부는 스무 살의 어리고 위험한 내게 부모 노릇을 해 주었다. 그들이 내게 너무 잘해주었기 때문에 나는 그 집에서 한 학기 이상 머무를 수가 없었다. 나는 철이 없어서 그게 엄청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나와의 통화에서 그들의 노고를 다 들은 내 부모님은 알았다. 이모가 화장품 사주고 미용실에서 클리닉 시켜주고 저녁에 보쌈시켜줬어. 이런 얘기를 한 학기 동안 전해 들은 부모님은 나를 광주전남 출신 학생들의 기숙사인 남도학숙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학원 선생으로서 애들과 지지고 볶고 살다 보면 가장 섭섭한 부분이, 애들은 부모뻘의 사람이 쓰는 돈과 정성과 시간을 당연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부모에게 당연하게 받으며 살고 있기 때문에, 부모가 아닌 어른들의 호의도 어린 사람으로서 당연하게 누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이모 가족이 좋은 사람들이고 나에게 잘해주는 것은 알았지만, 내가 남도학숙으로 가고 싶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너무 미안해서가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학교와 가깝게 살고 싶었다. 남도학숙은 대방역 근처에 있으므로 홍대까지 금방이었다. 게다가 나는 기왕 부모 집을 나왔으니 좀 더 배고프고 엉망이고 혼란스럽게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나는 한 학기를 마치고 이모집을 떠나 광주 전남 출신의 대학생들의 기숙사인 남도학숙에 들어갔다.
그런데 남도학숙은 내가 경험한 그 어떤 울타리보다 더 가부장적인 곳이었다. 그곳은 가격 대비 좋은 시설과 안전성 때문에 입주 경쟁이 치열했다. 매년 신입생들은 몰려오는데, 기존의 학생들은 나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학생들을 탈락시키기 위한 엄격한 룰이 있었고, 모든 학생들은 사감들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빌빌 기었다. 사감들은 완장을 차고, 대학생들을 초등학생 다루듯 함부로 대했다. 소리 지르고 문을 따고 방에 들어오고 간섭하고 명령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들의 갑질은 부유한 집 출신이라면 감수하지 않아도 되었을 억압이었다. 그러니 학숙 측에서 단체 생활을 위한 질서 유지라는 명목 하에 이루어진 자신들의 행동의 정당성을 좀 더 신중하게 고민했어야 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나는 그게 이상한 것인지도 몰랐다.
나의 진짜 독립은 남도학숙에서 쫓겨남으로써 시작되었다. 방출의 이유는 규율 불복종에 의한 벌점 초과였다. 벌점의 기준은 생활 평가였다. 거기에는 전 입주생이 아침 6시 반에 일어나서 체조를 하고 아침을 먹는 것과 한 달에 한 번 대청소를 하는 것, 외부 강연에 참석하는 것, 통금을 지키는 것이 포함되었다. 어린 학생들은 부모님의 부담을 덜어드리려는 마음으로 이를 악 물고 그 규율을 지켰다. 효녀인 나도 부모님의 당부에 따라 남도학숙의 규율을 잘 지키면서 오래오래 붙어있으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규율을 어길 만큼 용감하고 주체적인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내가 좋아하던 엄청 잘생긴 서울 선배가 말했다.
“대학생이면 성인인데 내가 언제 집에 들어가고 언제 일어나는 가는 내 맘이지. 그걸 이래라저래라 하는 게 말이 되냐?”
나는 이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근사한 서울 선배의 서울스러운 발언에 넘어가 버렸다. 나는 그때부터 대놓고 규율을 어겼다. 마치 그게 이제 내가 억압에 저항할 줄 아는 성인이 되었다는 선언이라도 되는 듯이. 그리고 그 학기가 끝나고, 나는 남도학숙에서 쫓겨났다.
이런 이유로 나는 대학교 3학년 때부터 자취를 하게 되었다. 나에게 이모집과 남도학숙에서 살던 2년은 완전한 독립이 아니었다. 나를 관리해주는 부모가 바뀌었던 것뿐이었다. 그저 멀리 떨어진 응석받이인 채로 용돈을 받으며 생활했다. 그러면서도 완전한 독립을 꿈꾸었다. 혼자 살지 못할 만큼 어리면서도 성인이라고 술을 퍼마시던 시기가 그렇게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