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쉬지 못할까?
"혹시 정말 조심스럽지만... 마약 하세요? 필로폰 같은.."
우울증 치료를 시작하고 두 달째 되었을 때, 의사 선생님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약물과 상담 치료를 꾸준히 병행하고 있음에도 차도가 없어 보이니 도대체 무엇이 자꾸 나를 죽고 싶게 만드는지 생각하다 겨우 꺼낸 질문이었을 것이다. 너무 황당해서 막 웃으며 그런 일은 없다고 했다.
단짝 E에게도 우스갯소리로 "의사 선생님이 나한테 마약 하냐고 묻더라?" 하고 웃자 E는 "그렇게 의심이 들 만큼 상태가 좋지 않다는 뜻 아닐까?" 하고 걱정스럽게 되물었다.
맨 처음 정신과를 갔던 건 스무 살 때였지만, 이렇게 꾸준히 본격적으로 정신과를 다닌 것은 작년이 처음이었다. 재작년 친구를 잃고 꼭 한 달 만에 너무 사랑하는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였다. 추석이 조금 지난 후의 일이었는데, 그때 친구에게, 또 할머니에게 전화하지 않은 내가 너무 미웠다. 그러던 중 마침 회사에서 여러 프로젝트를 맡게 되고 재택근무에 돌입하면서 내 하루의 시작은 컴퓨터를 켜고 메신저에 접속하는 것으로 시작해 야근하고, 밤이 되면 메신저를 끄고 술을 마시고 울다 잠이 들곤 했다.
그러다 2021년 1월 1일, 새해가 밝은 날, 나는 회사 건물 옥상에 올라가 뛰어내려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너는 그럼 한 번도 죽고 싶었던 적이 없었단 말이야?
나는 누구나 종종 - 혹은 한 번 이상은 -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또 실현 방법에 대해서도 생각해 봤을 것으로 생각했다. 단짝이라 말한 E의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이야기다. E는 한 번도 죽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느냐고 놀라 물을 정도였다. 사실 더 놀란 쪽은 나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을 수가 있지? 그럼 정말 내가 너무 우울하게 산다는 거야? 나는 언제나 내 삶의 마지막은 나 스스로 결정할 거로 생각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아동 우울증' 같은 것부터 시작해서 쭉 안고 살았던 것 같다. 처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그런 이야기를 일기에 썼던 게 11살 즈음인 것 같다. 그 무렵 같은 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고 있었고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한 번 아빠의 넥타이를 꺼내 들고 죽겠다고 한바탕 씨름을 하다 어린 동생에게 발각되었고, 엄마에게 크게 혼이 났다. 엄마는 울면서 절대 이런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했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90년대에는 소위 최근 방송에 나오는 '금쪽이' 같은 사례나, 이런 아이들의 우울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나는 결심했다. 엄마가 슬퍼하니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걸 엄마한테 걸리지 말아야겠다.
2021년 1월 1일의 결심은 결국 용기가 모자란 탓이었는지, 그날도 공휴일임에도 업무가 많아 시간이 없었던 탓인지 이 핑계 저런 핑계로 실패했다. 대신 회사 선배 J에게 전화해서 대성통곡을 했다. 운이 좋게도 선배 J는 현존하는 인물 중 단연 내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사람이었다. 오롯이 내 걱정만 하라 했다. 회사 따위 그만둬도 세상이 망하지 않는다고, 30대 초반에 내려놓고 쉰다고 해서 네 인생 망치지 않는다고, 먹고살자고 하는 일 때문에 죽으면 어떡하냐고 했다. 덧붙여 현실적으로, 그래도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회사에 다니고 있으니 이직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 쉬라고 했다.
그때 나는 쉬지 못했다. 아니, 쉴 수 없었다. 쉬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월급쟁이가 가장 게으르다더니, 나는 매월 들어오는 급여가 없어지는 게 두렵기도 했고, 또 내가 맡은 프로젝트를 끝내지 못하고 다른 동료들에게 떠넘기는 꼴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우울증은 감기 같은 거라면서, 왜 그렇게까지 나를 걱정하는 거야?
가족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알면 너무 슬퍼할 것 같아서, 도저히 용기가 안 났다. 단짝 E를 비롯한 친한 친구들 외에는 이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종종 사회는 '우울증은 감기 같은 것'이라고 하면서 감기와 똑같이 병원에 다녀왔다는 이야길 했을 뿐인데, 마치 시한부를 대하듯 주변 사람들은 자꾸 나에게 "힘내", "잘 될 거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게 싫었다. 그래도 절친한 친구들에게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알릴 필요는 있었다. E는 나를 돕기 위해 내가 다니는 병원에 함께 가서 의사 선생님에게 주변 사람들이 무얼 해야 하는지 물었다. 선생님은 "힘내, 잘 될 거야, 다시 하면 돼, 잘해보자 같은 응원 금지. 그냥 옆에서 가만히 있을 것"이라고 간결하게 말했다. 얼마 전 TV에서 오은영 박사님도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오히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게 더 위안이 된 것이 참 신기했다.
하지만 결국 엄마에게 걸렸다. 약 봉투를 걸리고 만 것이다. 무슨 약이냐 묻는 엄마에게 나는 시답잖은 일은 듯 덤덤하게 "그냥, 엄마 나 우울증이래. 그것도 최중증. 그래서 사실 요즘 잠을 거의 못 자서 약을 좀 받아왔어." 엄마도 덤덤하게 대답했다. "그래, 약 먹고 나서는 잠 잘 자니? 그럼 다행이고."
그렇지만 역시 예상한 대로 엄마는 매일 카톡을 보내기 시작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누구보다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인 엄마지만 우리는 매일 연락을 하지는 않았는데, 그런 엄마가 매일 아침 카톡을 보냈다.
"우리 딸, 오늘은 잘 잤니?"
저, 더 이상은 못하겠어요. 퇴사가 아니라 죽고 싶어요.
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 방법을 찾다가 피트니스 클럽에서 PT를 등록했는데, 이게 웬걸, 정말 재미있었다. 운동하는 동안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우울증과 함께 섭식장애가 생겨 식사를 하루에 한 끼 먹을까 말까 하던 중이었는데, 트레이너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만 했을 뿐인데 내가 삼시 세끼 다 잘 챙겨 먹고 열심히 운동하는, 내가 상상하던 "멋진 직장인"의 모습이 된 것만 같았다. 이 김에 목표도 만들자 싶어 바디 프로필까지 예약을 걸었다.
그렇게 반년 정도 지나고 아침부터 밤까지 일하면서도 눈물이 멎지 않고 숨도 쉬어지지 않던 어느 날, 팀장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저 더는 못하겠어요. 퇴사가 아니라 죽고 싶어요. 죽으면 남들이 제 일을 떠맡지 않을까 걱정할 필요도 없잖아요. 저는 매일 누우면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상상해요. 이렇게는 못 살겠어요."
숨 가쁘게 울던 나를 진정시키던 팀장님은 프로젝트고 뭐고 그냥 쉬라고 했다. 진행 중이던 프로젝트가 꽤 큰 프로젝트라 나와 팀장님은 매일 통화를 하거나 담배를 같이 태우면서 힘들다고 이야기하곤 했는데, 은연중에 농담 반, 진심 반으로 "저 회사 때문에 우울증 걸렸어요. 병원 다녀요."라고 했던 말을 팀장님은 온전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당장 연차 쓰고, 휴직 준비부터 하자고 난리였다.
진단서를 받고 병가 휴직을 받아내는 과정이 쉽지 않았는데, 아직도 정신과 과목의 병명으로는 사회적으로 그렇게나 이슈가 된다 해도 현실적으로는 뼈가 부러지거나 하는 등의 외상을 입은 것에 비하면 합리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모양이다.
한 달의 무급 휴직과 내 연차를 더하니 약 두 달의 공백이 생겼다.
업무 인수인계를 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에게 부재 공지 메일을 보내고 나니 새삼 느껴졌다.
나, 이제 쉴 수 있네.
아니, 나 이제 쉬어야 한다.
*표지의 배경 이미지는 Pixabay로부터 입수된 Alberto Adán님의 이미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