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괴리에서
2차 병원 이상의 진단서를 제출해 주세요
먼저, 병가 휴직 제도는 회사에 대해 법적 의무를 가진 제도는 아니다. 근로자에 대한 병가 휴직 제공 여부나 위 기간 내 급여의 지급 여부, 기간의 제한 등은 회사의 재량사항이다. 따라서 위 제도에 대해서는 회사마다 규정이 다르므로 본 글에서는 지극히 내가 다니고 있는 이 회사의 이야기이다. 다만,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질환을 앓는 직장인 독자들이라면 이러한 정신과 병명을 이유로 휴직을 얻어내는 것이 가능할지 궁금할 수 있을 것 같아 나의 경험담을 공유한다.
우리 회사에도 병가 휴직 제도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그전까지는 아프면 본인 연차를 소진하거나 그냥 참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다.
공식적으로 신설된 현재 회사의 병가 휴직 제도에 따르면 2차 병원 이상의 진단서가 있으면 휴직 기간 중 최초 5일은 본인의 연차 소진, 이후 최대 3개월까지 급여의 50%를 받을 수 있다.
팀장님께 업무로 받는 스트레스와 과중한 피로감이 겹쳐 최중증 우울증 판정을 받았고 이제는 퇴사가 아니라 죽고 싶다고 밝힌 날, 팀장님은 당장 휴직을 하라고 권유하셨다. 일단 내가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자 다니고 있는 정신과에 가서 담당 의사 선생님께 진단서와 진료확인서를 받아서 회사로 향했다. 선생님께서는 얼마나 살벌하게 소견을 써 주셨는지, 몇몇 친한 회사 동료들은 내 진단서 내용*을 보고 눈물을 터뜨렸다.
“너 지금까지 어떻게 웃고 있었던 거야?”
사실 병가 휴직을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진단서를 수취한 이유는 그저 내가 지금 당장 쉬고 싶어서 잔꾀를 부리는 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자 하는 목적이 컸다. 팀장님과의 면담에서 팀장님은 인사팀에 서류를 제출하고 병가 휴직 신청을 하라고 하셨다.
생각지도 못했던 유급 휴직이라니! 그래, 생각해 보면 내가 뭣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회사도 책임이 있지. 그 길로 인사팀에 서류를 보내고 휴직 신청 결재를 올렸다.
결과적으로는 반려당했다.
내가 다니고 있는 병원이 대형 종합병원이나 대학병원이 아니라는 게 사유였다. 더 큰 병원에 가서 내 병명에 대한 진단을 받아 오란다. 내게 진단서를 써 준 사람도 엄연히 의사면허를 취득하신 분인데, 내가 무슨 친필 각서를 받아온 것도 아닌데, 어찌 되었든 이 진단서로는 회사 내부 규정에 따라 병가 휴직을 승인할 수 없고, 무급 휴직(사사 휴직)을 받으려 해도 2차 병원 이상의 진단서를 받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휴직 제도는 정신 질환에는 해당이
안 되는 걸로 들리는데, 맞나요?
도대체 2차 병원이 뭐길래. 근처에 정신과가 있는 2차 병원을 확인해보니 <서울특별시 은평병원>, <이대 서울병원>, <삼육 서울병원> 등이 나온다. 전화해 보니 코로나 지정 병원 등의 업무로 인해 정신과 상담이 어렵거나, 예약 대기가 많아 당장 진단서 발급은 어렵다고 했다. 내가 2차 병원 진단서를 받고 휴직을 하는 것보다 퇴사하는 게 빠르겠다고 생각했다.
휴직을 담당하는 인사팀 담당자도 굉장히 난감해했다. 본인이 보기에도 이 사람 정말 많이 아픈 것 같은데, 회사에서는 2차 병원 진단서를 이유로 계속 나에게 병가 휴직을 승인할 수 없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풀이시켰으니 말이다. 그분은 입사하신 지 3개월밖에 되지 않은 상태였는데, 나는 어찌 됐든 이야기할 창구가 그분밖에 없으니 그에게 따지고 들 수밖에 없었다.
“인사팀 의견을 듣자 하니, 질병 휴직 제도 자체가 정신 질환에는 해당이 안 되는 거로 들리는데요, 제가 이해한 게 맞나요? 정신과 특성상 한 번에 알 수 있는 외상과는 달리 심리 검사와 여러 차례의 진료를 통해 진단이 가능하고, 본인에게 맞는 상담과 처방이 가능한 병원을 찾는 것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제가 휴직을 받자고 저에게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채 예약조차 어려운 대형 병원으로 옮겨서 진료를 받고 진단서를 받아오는 것이 정말 직원을 위하는 길이라고 보시는지요?”
그 담당자는 이내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다 했다. 우리 팀장님도 노발대발해서는 회사 때문에 이 사람이 병을 얻었고, 프로젝트가 끝나는 날까지 꾹꾹 참다가 이제야 프로젝트가 끝나서 말을 꺼냈는데 어떻게 이렇게 회사가 무책임할 수가 있느냐며 인사팀 팀장님을 찾아갔다.
결과적으로 나는 질병 휴직이 아닌 무급 휴직을 받았다.
주 52시간의 노동법을 어겨가며 회사를 위해 일하다 이 지경이 되었는데, 회사는 나에게 50%의 급여 지급도 아까운가? 하는 생각에 환멸감이 밀려왔다.
지난 몇 년 간의 업무보다 지난 며칠의 휴직 논의 과정에서 회사에 환멸감을 느꼈습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1년에 두 번, 구성원을 평가한다. 평가는 본인이 상반기/연 내 잘한 점, 아쉬운 점 등을 작성하여 제출하면 상위 조직장들이 해당 내용과 평소 구성원의 퍼포먼스 등을 토대로 피드백을 작성하고 면담을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올해 상반기 평가는 내가 휴직을 한 이후인 7월부터 시작되므로 휴직하기 전 상반기 평가를 작성하고 가야 한다는 지시를 받았다.
지난 몇 년간 회사에 다니면서 선택항목인 “기타 추가 의견”란을 작성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상반기 내가 잘한 일’보다 더 길게 작성해서 (막말로 “갈겨서”) 휴직 전날 제출했다. 아래는 내가 작성한 ‘기타 추가 의견’의 전문이다.
회사에 애정을 갖고 일한 지 어느덧 만 5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좋은 팀장님과 구성원분들을 만나 한 해 한 해 스스로도 많이 성장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다만 이번 휴직 과정에서 회사에 대해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지난 몇 년간 업무로 인해 받은 스트레스보다 최근 며칠간 휴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더 힘겨움을 겪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저는 작년 말 최중증 우울증 진단을 받고 올해 초 대학병원 입원 권유를 받았으나, 이번 서비스 오픈을 앞두고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맡기고 갈 수 없다는 책임감에 불철주야 일에 매진하며 통원 치료를 받았습니다. 서비스 오픈 후 조직장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으며 팀원들의 배려 덕분에 휴직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만, 회사에서는 제가 진단서와 진료 기록을 제출하였음에도 해당 진단서가 2차 병원 이상급에서 받아온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질병 휴직은 불가하다며 무급 휴직으로 대체하였습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등 정신적 질환의 경우 최근 사회적 문제로 크게 대두되고 있으며 개인의 불행이나 유약함 때문이 아니라는 반응이 형성되고 있고, 업계뿐만 아니라 사내에도 이러한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계신 구성원이 꽤 많다고 알고 있습니다. 급여 50%의 유무를 떠나 처음부터 병가 휴직을 생각하고 치료에 임했다면 상담 예약도 어렵고 진료비도 비싼 2차 이상의 대형 병원에 다녔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지난 1년간 적어도 서너 곳의 정신과를 다니며 저에게 맞는 진료와 처방이 가능한 병원을 가까스로 찾아 반년 이상을 내원하였습니다. 이런 상황과 코로나로 인해 정신과 상담이 더더욱 어려워진 대형 병원의 진단서를 받아오는 것이 정말 우리 회사의 “질병 휴직”이라는 제도가 정신과에도 포함이 되는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물론 회사의 규정을 유연하게 적용할 시 어뷰징이 발생할 수 있는 전례가 될 수 있어 제도를 명확히 하기 위하여 1차 병원 진단서는 사용이 어렵다는 점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어떤 병명으로 인해 어떠한 과정으로 얼마나 치료받고 있었는지도 함께 고려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휴직 기간이 끝나고 나면 내가 회사로 돌아갈지, 돌아가지 않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평가서에 쓴 이 글로 인해 불이익을 받게 된다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신고해 버릴 거야.’라는 마음으로 발송 버튼을 눌렀다.
죽겠다는 마음도 먹었던 사람인데 잘리면 뭐 어쩌겠어. 속된 말로 이제는 ‘노빠꾸’다.
*진단서 내용을 살짝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다.
상기인은 금년초부터 우울증 치료 계속 받았으나 차도가 없다며 본원 초진한 분임. 작년 회사일이 너무 바빠 쉴 틈이 없어지며 악화된 듯하다 하심. 내원 2~3주 전부터는 주말 내내 집에서 울고 했다 하심. 초진 당시 시행한 우울척도, 무망감 척도 등에서 최중증 상태의 우울과 무기력, 무망감 호소하심. 본원 치료 후 얼마간 호전 양상 보이기도 했으나, 5월 경 업무량 늘어나고 친구가 자살을 암시하는 문자 남기고 연락 안돼 애태우는 일 있은 후, 과중된 업무로 심신이 지친 와중에 과거 트라우마 올라와 다시 불안과 우울 등 증상 악화되신 상태임.
*표지 배경 이미지는 Pixabay로부터 입수된 Sookyung An님의 이미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