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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퇴사한 입사 동기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더니!

by Enero
제가 가장 잘한 일은 잘 버틴 것입니다


D와 나는 한날한시에 입사한 동기 사이다.

공채가 없이 수시 채용으로 진행되다 보니, 같은 날 입사한 동기가 여섯 명이었다. 모두 하는 업무도 다르고 팀도 달랐는데, D와는 팀과 직무, 게다가 나이까지 같았다. 우리는 그해 여름 땡볕 아래 열심히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고 그간 팀에 피바람(?)이 부는 등 여러 가지 사건 사고들을 겪으며 '역시 동기가 있어 버틴다'라며 서로 의지를 많이 했다.


수습 해제 인터뷰가 있는 날이었다. 공통으로 받은 질문 중 "입사하고 본인이 가장 잘한 일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라는 항목이 있었다. 나는 그냥 업무적으로 내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이야기했고, D는 당차게 대표님께 "지금까지 퇴사 안 하고 잘 버틴 거요."라고 답했다고 했다. 그리고 대표님은 그 말에 박장대소하셨단다. 그 말을 들은 나도 말 한번 잘했다며 웃었다.


호기롭게 대답한 것치고 수습 해제 결과가 나오는 며칠간 D는 나에게 본인이 그 말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며 쩔쩔맸다. D는 본인의 말 한마디에 며칠간 후회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둘 다 수습 해제에 성공했고 당당히 정직원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나보다 잘 나가는 입사 동기


D는 머리가 좋았다.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렇다. 숫자에도 빠삭하고 새로운 걸 배우는 데 흡수력이 엄청났다. 이런 걸 언제 공부했지?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했고, 도전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원래 우리가 하던 직무를 벗어나 마케팅팀으로 발탁되어 전배 했다.


질투가 난다기보다는 진정으로 멋지다고 생각했고, 진심으로 응원했다. 커리어를 차곡차곡 잘 쌓아가는 모습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회사는 회사. 그 역시 앞으로의 고민, 업무에 대한 고민을 속으로 쌓아가고 있었다.


그러던 동기 D가 어느 날 돌연 퇴사를 외쳤다.

마케터였던 그가 이제는 개발 공부를 해서 개발자로 커리어 전향을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D라면 정말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꼭 잘 되면 나 좀 데려가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퇴사하고 몇 달 후, 그는 정말로 개발자가 되어 꽤 유명한 회사에 취업했다.



동기사랑 나라사랑 외치더니, 날 두고 가?



그즈음 나는 회사 업무와 개인적인 사정들로 신체적, 심리적으로 여러 고통을 겪고 있었다. 같은 환경에서 업무를 해오고 있으니 당연히 내 편을 들 줄 알았는데, D에게 연락하자 그는 "그래도 나와보니 그만한 회사 없는 것 같더라. 조금 더 버텨봐."라고 했다.


본인은 동기사랑 나라사랑 외치다가 날 버리고 가더니, 난 정말 죽을 것 같은데 나한테 또 버티라고?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어서 "넌 내 마음 모른다"라고 말하고 혼자 씩씩거렸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르다더니! 같이 회사에 있을 때는 이 회사 정말 힘들다고, 퇴사 고민을 나눴던 사람이 이제는 나보고 버티라고 했다. 너무 서운해서 눈물이 다 났다.



내가 잘 몰랐어. 버티지 마. 미안해.



얼마 전 휴직을 하자마자 D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가 너무 심해져 결국 퇴사를 하려 했는데, 회사에서 붙잡아서 그나마 휴직하게 되었다고.

그 사이 개발자로 첫 취업한 회사를 그만둔 D는 같이 놀게 된 마당에 청담동에서 브런치나 먹자고 했다. D가 쉬면서 청담동에서 18,000원 짜리 브런치를 먹으며 주변을 둘러보니, 세상에 참 여유롭게 사는 사람들 많구나 싶더란다.


그래서 바로 그 다음주에 브런치 약속을 잡으려 전화했는데! 이 배신자는 그 새 또 다른 회사에 스카우트되어 취업을 했더라. 그래도 말 꺼낸 날이 아직 출근하기 전이라 낮에 바로 동네에서 만나 커피를 마셨다. 내가 그때 네가 버티라고 한 말이 너무 서운했다고 하자 D는 깜짝 놀라며 사과했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미안해. 내가 잘 몰랐나봐. 우리 그냥 행복하게 살자. 어차피 회사는 다 거기서 거기고, 네가 갈 곳은 많아. 지금 경력도 꽤 많이 쌓았잖아. 버티지 말자.”


그러면서 D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있었으며, 그 자전거를 열심히 타다 쇄골까지 부러져 비싸게 지른 고급 자전거를 중고 시장에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한참 웃었다.


먼저 나간 동기가 잘 살고 있는 걸 보니 안심도 되고 용기도 얻을 수 있었다.

그 어떤 선배와 어른의 조언, 책 한구절보다도 나와 비슷한 또래 친구의 상황과 경험담이 빛과 위로가 되었다.



배경 이미지는 Pixabay로부터 입수된 PicLily 님의 이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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