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팀장의 팀원으로 일했다는 것
존경하는 인물이 있나요?
어릴 때부터 곧잘 들어왔던 말이자 심지어 입사 면접을 볼 때도 단골 면접 질문으로 나오는 존경하는 인물.
나는 솔직히 존경하는 인물이 없었다. 그리고 성공한 사람들의 자서전이나 자기 계발서도 읽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인생과 나의 인생, 가치관, 습관 등이 같아지려야 그럴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어리숙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연히 나의 직장 상사들은 나보다 뛰어나고, 경험도 많고, 경력도 풍부한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 상사들을 존중하고 따르고 의견을 청취하고 지시를 받는 정도일 뿐,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으로 따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나에게 직장 생활의 ‘롤모델’이자 인생의 멘토였으면 싶은 사람이 생겼다.
3년여 전 경력직으로 입사한 선배 J다.
직장 생활에서 롤모델을 찾다
나름 회사 생활을 몇 년씩 하면서 느낀 점은, 확실히 이 ‘롤모델’이라는 것이 있어야 내가 일할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월급을 받는 우리네를 돌이켜보면,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일해서 잘 되면 지금 내 옆자리에 있는 팀장님이나 실장님 정도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팀장님이나 실장님의 모습에 내 미래를 투영했을 때 그 모습이 괴로워 보이거나 전혀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면? 내 미래도 아마 그럴 것이다.
작년 초에도 한바탕 번아웃으로 퇴사를 하겠다고 난동 아닌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다.
내가 별로 이 회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도 들었고, 당시 팀장님의 모습을 보니 내 모습도 저렇게 되겠구나, 아니 사실 나아가서 저렇게 팀장이 될 수도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감투 욕심이 없는 나였지만 여하튼 ‘회사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될 바에야 다른 곳에 가서 새롭게 태어나고 싶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때 회사 선배 J와 L을 자주 집 근처로 불러냈다.
당돌하고 어린 후배가 굳이 자기 집 근처 곱창집이며 삼겹살집이며 불러내도 선배들은 군소리 없이 나와서 내 푸념을 다 들어주고 고기도 사주고 술도 사줬다.
선배 J는 퇴사해도 인생이 망하지 않는다고 나를 구태여 붙잡거나 말리지 않았음에도 내가 퇴사 결심을 되돌렸던 이유는 그의 현실적인 조언과 경험담 덕분이었다.
무조건 ‘퇴사해라’ 혹은 ‘나가지 말고 버텨라’가 아닌, 내가 선택하게 될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했다.
예를 들자면 아래와 같다.
1. 내가 퇴사하기로 결정한다면,
퇴사 통보 전 이력서와 포트폴리오 관리
공백기를 현명하게 보내는 방법
타 회사에 면접을 보게 될 시, 경력 면접에 대한 팁과 연봉 협상 방법
J의 대기업, 스타트업, 중견기업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차이점
2. 내가 퇴사하지 않고 이 회사에 남기로 결정한다면,
본인이 사수로서 나와 함께 진행하고 싶은 프로젝트
내가 나의 단점이라 생각한 것들을 보완할 수 있는 방법
본인이 직접 우리의 상사와 면담을 통해 개선해야 할 점들을 전달할 것
이런 사람이 내 선배라니. 이런 복은 아무나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니다.
나는 이 사람을 믿고 조금 더 배워야겠다. 그래서 나는 그때 퇴사 결심을 한 번 접었다.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사람, 팀원의 공로를 빛내는 팀장
내가 생각하는 선배 J의 가장 뛰어난 자질 중 하나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의 강점과 단점을 빠르게 캐치해서, 강점은 더 강하게 단점은 강점으로 보일 수 있게 변화 시켜 주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것이다.
나는 숫자와 셈에 약하다. 엑셀 시트 한가득 메운 매출과 목표 숫자를 보고 있으면 지레 겁을 먹게 되고, 데이터를 추출하기 위한 쿼리를 잘 쓸 줄도 모른다. 다만,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쓰고 무궁무진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데에는 그래도 꽤 능력이 있는 편이다.
“바꿔 말하면”
선배 J의 입버릇 중 하나가 “바꾸어 말하면”인데, 그는 이런 나의 취약점들을 그야말로 바꾸어 말해 주었다.
바꿔 말하면 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데이터를 가공할 수 있는 방향성을 제대로 제시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데이터는 ‘데이터 분석에 강한 사람’에게 잘 부탁하면 되고, 협업을 통해 가공해서 멋진 프레젠테이션을 할 수 있을 거라고.
그 말에 한동안 나를 괴롭게 했던 번아웃 증후군이 다소 가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가 하는 일이 곧 잘하는 일이 되는 것 같고, 잘하는 일을 하고 칭찬을 받으니 일하는 게 재미있어졌기 때문이다. 야근을 밥 먹듯이 하면서도 내가 재밌어서 하는 거라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또, 그는 팀원이 한 프로젝트의 공로를 절대로 가로채지 않았다.
팀원들이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쳐도 팀장으로서의 J는 “oo님이 잘 해낸 일이니 이건 oo님이 직접 보고하고, 피드백을 받을 건 받고 칭찬도 oo님 직접 받으셔야 해요”라며 일개 사원이나 대리급인 팀원들을 이사님부터 부사장님 보고까지 전부 다 회의실로 초대해서 앉혀놓고 직접 보고를 시킨다든지, 전사적 프로젝트의 메일을 보내도록 했다.
물론 그전에 우리가 해 놓은 보고서를 꼼꼼하게 살피며 예상 질문이라든지, 더 강조해야 할 부분들을 짚어 주었다.
덕분에 J의 손을 거치면 대부분 일이 어르신들의 박수를 받으며 결재가 났고, 일개 사원인 팀원들의 이름도 임원들의 머릿속에 각인 시켜 주었다.
나의 우울증을 J에게 고백했을 때에도, J는 나에게 괜찮냐는 위로 대신 “네 탓이 아니야”라고 말해주었다.
네가 아픈 건 네가 나약해서가 아니라 너를 이렇게 아프게 한 회사와 사람들이 잘못한 거라고, 그러니 자책 말고 네 생각만 하라고.
그러면서 내 이력서와 경력 기술서를 받아다 손수 다 수정해주고 첨삭해 주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
이렇다 보니, 이 사람과 함께 일을 하고 나면 그 사람들은 모두 직장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능력자들로 레벨 업했다.
그래서인지 J가 이직을 할 때마다 피리 부는 사나이 마냥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회사를 같이 옮겨 다녔다. 그렇게 우리 회사에 함께 근무하는 사람들도 여럿 되고, J를 따라온 사람들 역시 J만큼이나 능력도 뛰어나고 깊은 사람들이라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나 역시도 J의 피리 소리를 따르는 이 중 하나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했을 정도니까.
그런 J가 오늘 퇴사를 한다.
J의 퇴사 결심을 들은 후로 여러 사람이 흔들렸다. 벌써 다른 팀에서도 “J님 없으면 어떻게 해요?” 소리가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나를 비롯한 J와 가까운 몇몇 사람들은 그의 퇴사 소식을 미리 알고 있었음에도 행여나 마음을 바꾸고 같이 더 일할 가능성은 없을까? 하고 헛된 기대도 조금은 품었다.
하지만 떠나는 J를 그 누구도 말릴 생각은 없다. 그는 또 어디를 가든 ‘에이스’ 노릇을 톡톡히 해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리 부는 사나이를 좇는 130명의 우리는 또 그의 뒤꽁무니에 붙어 나를 찾아주기를 바랄지도 모르겠다.
나에게 글 잘 쓰는 재주가 있다고 이야기해 준 열렬한 구독자 J님, 당신은 제 직장 생활뿐만 아니라 제 인생에서도 값진 보물이었습니다.
그간 고생 많으셨어요. J님 같은 선배이자 팀장이자 멘토를 다시 만날 수 없을 것 같아요.
진심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