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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내 연애 비밀 지켜주기 프로젝트

사무실 프린터기까지 안다는 사내 연애 비밀 지켜주기

by Enero
나 괜찮다고 하는 사람 없어?


우리 회사에는 젊고 매력적인 남녀들이 많이 모여있다 보니, 당연히 여러 스캔들과 이벤트도 발생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나는 나름 철칙으로 ‘사내 연애 금지’를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기분 나쁜 소문이었던 ‘실장님과의 추문’을 제외하고는 이성 스캔들이 나거나, 사내에서 고백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론 멋진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 화장도 하지 않고 후줄근하게 출근을 했는데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중요한 미팅이 있어서 화장도 하고 옷도 차려입고 나가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다른 부서, 다른 층에 근무하는 그 선배에게 커피 한잔할 구실이라도 만들고 싶은 적도 있었다. 본격적인 직장 생활이 처음이었던 사회 초년생의 나에게 그런 적당한 ‘구실’을 만드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 내 마음속 철칙을 굳건히 지키려는 신념도 있었기 때문에 그 멋진 선배가 퇴사하기 전까지 밥 한 끼, 커피 한 잔 따로 한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창문에 매달려 축구 경기를 하는 F4 선배들의 모습을 보는 여고생의 마음처럼 그냥 정말 멋진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리고 연애에 관심이 많았던 20대의 나는 같은 팀의 친한 남자 동기인 D에게 혹시 누군가가 나에게 관심이 있거나 친해지고 싶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면 꼭 나한테 알려 달라고 했다. D는 알겠다고, 몇 층 사람이 내게 관심이 있는지 자기가 손가락으로 사인을 보내주겠다고 해놓고는 4년여 후 그가 퇴사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손가락 사인을 보내주지 않았다.


그가 퇴사하기 전 다시 물어보니 정말 단 한 명도 없었단다…



너 H선배랑 사귀지?


나는 눈치가 꽤 빠른 편이라 사무실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잘 눈치채기도 했고, 주변에 사람이 몰리는 복이 있는 덕분에 아는 사람들이 많은 만큼, 들리는 것도 많았다. 그래도 입은 무거워서 내 비밀은 다 까발릴지언정 남의 인생사에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팀에서 근무하는 동기 S와는 급속도로 친해졌고, 빠른 생일인 나와 태어난 생년이 같은 S는 서로 그냥 반말하는 친구 사이가 되기로 했다.

그런데 며칠 뒤, S가 아는 언니를 만났는데, 그 언니가 나와 친구 사이였다며 교통정리를 위해 그냥 ‘언니’라고 부르기로 했다. 언니 동생 사이로 매일 같이 밥을 먹고 통화를 하고 술을 마시던 우리는 얼마 뒤 후쿠오카로 함께 여행을 다녀왔다.

호텔 사우나에 가자고 했는데 S는 몸이 좋지 않아서 쉬고 싶다고 해서 혼자 사우나에 갔다.

그런데 너무 어색하고.. 일본 사우나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혼자 뚝딱거리다가 한 30여 분 만에 호텔 방으로 돌아왔는데, S가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깜짝 놀라서 전화를 끊었다. 뭔가 있구나 싶었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먼저 이야기하기 전까진 굳이 내가 캐물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을 먹고 나서 후쿠오카 시내를 걷는데, 여러 뭇 남성이 우리에게 함께 술을 마시자며 일본어로 말을 걸어왔다.

맥주를 마시기 위해 찾은 펍에서도 여러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명탐정 코난과 에반게리온으로 중무장한 오타쿠 일본어를 조금 하는 내가 “와타시와 강코쿠 진까라…(제가 한국인이라..)”하면, 그쪽에서는 “에-고 오케! 오케! (영어 오케이!)” 했다.

일본의 소방관 - 정확히는 화이야화이따루 - 이라던 남자 둘은 맥주를 마시는 우리에게 ‘나마비-루’(생맥주)를 사줬다. 고맙다고 이야기했는데, 그들은 영어도 한국말도 안 되니, 돌직구로 “캔 아이 고 투 유어 호테루?”했다. 애니메이션 판 크레용 신짱의 주제가인 “다메!(싫어!)”와 에반게리온에서 싸움이 날 때마다 주인공이 외치는 “야메!(그만둬!)”를 써먹었다.


이 일화를 한국에 돌아가서 팀 사람들에게 너무 웃겼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선배 H의 낯빛이.. 약간 어두워지고 억지웃음을 짓는 것 같았다.


며칠 뒤, 동기 S와 저녁을 먹던 중 그녀가 “언니, 나 할 말이 있어.” 하길래 대뜸 물었다.

“너 H 선배랑 사귀지?”


그녀는 깜짝 놀라 마시던 물을 뿜었다.



비밀 연애 지켜주기 프로젝트


흔히들 사내 연애는 본인들 빼고 다 안다고, 사무실의 정수기와 프린터기까지 다 안다고 한다.

나에게 연애 사실을 털어놓은 S와 H선배는 말하고 나니 속이 다 시원하다고 하면서도 이 기밀을 제대로 지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그들의 데이트에 마치 연예인의 비밀 연애 유지를 위해 친구 한두 명을 위장용으로 끼워 넣는 것처럼 셋이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팀원들 모두가 친했지만, 누구는 입이 가벼우므로 절대 알아서는 안 된다, 누구는 너무 충격받을 것 같으니 이야기하지 말자 등등. 나름 전략을 짰고, 친한 사람들에게 어느 시점에 어떻게 이야기할지도 같이 의논했다.


둘 다 매력적이고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이었고, 나와 친하다는 걸 회사의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끔 S나 H를 소개해 줄 수 없겠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연애할 생각이 없대요.” 하거나, “얼마 전에 소개팅 한 사람이랑 잘 되어 가는 것 같던데요?” 하고 뻔뻔하게 말했다.


그들도 회사와 최대한 먼 곳에서 데이트했고, 회사에서도 철저한 거리 두기를 해서 3년 넘게 아무도 그 둘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그 커플이 회사의 다른 사람에게 걸린 것은 딱 한 번이었다.

회사 사람 결혼식에 함께 갔다가 끝나고 결혼 박람회에 간다고 했다. S는 나와 약속이 있는 척하고 먼저 빠져나왔고, 선배 H는 뒤이어 다른 선약이 있는 척하고 나왔다. 둘이 잘 다녀오라고 인사를 하고 한 시간 뒤, S에게 전화가 왔다.


“언니… 나 웨딩 박람회에서 J파트장님이랑 마주쳤어!”


다행히 J파트장님은 우리와도 친하고 입도 무거운 분이라 소문이 날 걱정은 안 했다. 다만 오히려 그분이 정말 놀라서 펄쩍 뛰었다고 한다.

“아니, 둘이? 언제부터? 둘이 왜 결혼박람회에? 왜?”


S와 깔깔 웃으며 전화를 끊자마자, J파트장님이 나에게 전화를 했다.

“입 간지러워서 도대체 몇 년을 어떻게 참았대요?”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잘하는 게 중요하죠



선배 H는 팀에서 ‘젊은 꼰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신입 교육을 확실히 하는 호랑이 같은 선배였던 반면, S는 자그마한 체형에 디즈니 만화에서 나온 것 같은 귀여운 외모와 발랄하고 애교 많은 성격의 소유자였다. 나는 H 선배에게 S를 만난 건 ‘전생에 선배가 나라를 구했거나, S가 나라를 팔았나 봐요’ 했다.


그 선배가 후배 교육을 하면서 항상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어떻게 일할 거예요? 열심히 하겠다고요?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잘하는 게 중요하죠. 성과를 보여야 할 것 아니에요?”


그래서 나는 그 둘의 결혼식에서 축사하며 끝에 그 말을 똑같이 날려 주었다.


“선배님, S한테 잘하세요. 열심히 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잘하는 게 중요하죠.”




사실 이 커플 말고도 내가 지켜주고 있는 사내 커플이 몇 있다.

그 커플도 H와 S처럼 결실을 이루는 날, 나의 비밀 프로젝트 하나가 더 성공하는 것이니 그때 또 글을 남겨볼 심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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