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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직 채용에 면접관으로 들어갔다

결혼, 육아와 경력 단절에 대하여

by Enero
육아휴직 다녀오니 제 자리가 없어졌어요



몇 해 전, 계약직 10명을 채용하고자 인력 확장 품의를 올리고 면접관으로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날의 기억들이 너무 생생하고, 내 마음에 가득 남아 경력 단절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지방의 영업 지사에서 사무 업무 보조를 하는 서무 직원을 채용하는 일이었는데, 계약직이라 1년간 근무하게 되고 계약 연장 시 최대 2년까지 근무하는 자리였다. 계약직에서 정규직이 될 가능성은 매우 낮으며, 계약이 만료될 무렵 해당 직무에 정규직 TO가 난다면 다른 정규직 채용과 마찬가지로 서류와 면접의 과정을 거쳐 전환될 수도 있다. 다만, 이 점은 절대로 장담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도 해당 직무에 지원하는 지원자가 아주 많았다.

특이한 것은 이 계약직 TO에 많은 여성이 지원했다는 점이며, 지원자들의 나이대가 다양하긴 했으나 주로 30대 초중반이 주를 이뤘다.


첫 번째 지원자도 30대 초반의 여성분이었다.

유명한 대학을 졸업해서 모 대기업에서 과장까지 일한 경력이 있으며 인상도 좋고 말씀도 잘하셔서, 왜 이렇게 능력 있는 분이 그전까지 받던 급여와는 차이가 크게 나는 이 작은 직무에 지원했는지 궁금해서 물었다.


육아휴직 다녀오니 제 자리가 없어졌더라고요. 저는 마케팅팀장으로 일하다가 육아휴직을 다녀왔는데, 돌아오니 원래 하던 일인 마케팅이 아니라 전혀 다른 직무로 전배가 되었어요. 그리고 그 후로는 일을 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퇴사했어요.

연봉과는 관계없이 저는 일을 하고 싶어요…”


그분은 면접이 끝날 무렵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나는 20대에 그냥 운 좋게도 좋은 사수들을 만났고, 능력을 빨리 인정받은 (혹은 과대평가 당한) 덕분에 비슷한 시기 입사한 동기들보다 다소 진급도 빨랐지만, 지금 내 앞에 울고 있는 여성분보다는 훨씬 경력도 부족하고 경험도 없는 신출내기다. 그런 내가 감히 이 직무가 내가 관리해야 하는 ‘계약직’이라는 이유로 면접관으로 참여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나의 미래도 그려졌다.

지금은 이런저런 큰 프로젝트도 참여해보고 중요한 업무들을 맡아 하고 있지만, 언젠가 나도 출산을 하고 육아휴직을 다녀오면 내 앞에 계신 이분처럼 면접관 앞에서 눈물을 보이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아이가 있다고 하면 곧 탈락하더라고요.



다른 지원자도 서글서글한 인상에 부드러운 말씨를 가진 여성 경력자였다.

실장님도 나도 그분이 마음에 들어 업무와 관련된 질문들을 이것저것 던졌고, 그 지원자도 여유롭게 대화하며 즐겁게 면접을 이끌어나갔다.


아무래도 자리가 자리인지라, 실장님은 면접 끝에 꼭 이 말을 덧붙였다.


“저희가 지금 뽑는 TO가 계약직인 건 아시죠? 계약직은 연봉 테이블도 다르고, 경력을 인정해주지 않아요. 계약이 만료되면 정직원이 될 수 있다고 말씀드리기 어렵고요. 그래도 일하실 의사가 있으신가요?”


그런데 그분이 첫 번째 지원자와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네, 저는 그냥 일을 하고 싶습니다. 지금 여기서 면접을 보면서 더 이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졌어요. 면접관님들께서 제가 결혼을 했는지나 아이가 있는지 같은 질문을 하나도 하지 않으셔서요.”


나와 실장님은 깜짝 놀라 되물었다.

“그런 걸 묻는 회사가 있어요? 왜요?”


“보통 결혼을 했다고 하면 아이가 있는지를 묻고, 아이가 있다고 하면 제가 언제든 갑자기 휴가를 쓰거나 야근을 할 수 없을 거로 생각하셨나 봐요. 면접 분위기가 아무리 좋았어도 그 질문이 나오면 곧 탈락이더라고요.”


돌이켜보니 나도 이 회사에 입사하기 전 여러 회사의 면접을 본 적이 있었는데 그중 기억에 남는 회사가 있다.

유명한 금융권 회사였는데, 임원 면접에서 네 명의 남성들이 들어왔고, 여성 면접자들에게 키를 물으며 일어나서 한 바퀴 돌아보라고 했었다.

남자 친구가 있는지를 물었고, 남자 친구가 있다 하면 남자 친구의 직업까지 물었다. 결혼할 계획이 있는지도.

그땐 뭣도 몰라서 뭐가 그리 잘못된 건지도 몰랐는데, 이제 생각해보니 그 회사는 도대체 안에서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 걸까 생각이 든다.




남편 따라서 지방에 왔는데 일자리가 없어요



지방 지사의 서무 계약직 면접에 들어오는 대부분의 여성 지원자들은 결혼 후 남편을 따라 그 도시에 온 사람들이었다.

서울, 혹은 본인이 원래 살던 지역에서 괜찮은 직장에 재직 중이었는데, 결혼 후 퇴사하고 남편이 있는 도시로 이사를 한 것이다.

그래서 새로 온 이 동네에서는 마땅한 직장을 찾기도 어렵고, 주변에 아는 사람도 없어 도움을 구할 친구를 찾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모든 면접을 마치고 집에 와서 결국 눈물이 터졌다.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복지가 좋은 편이고, 성 평등을 고려해도 배려가 많은 회사임이 틀림없다.

그런데도 여성 임원이 비중은 고작 1/10 수준이고, 솔직히 “저런 여성 임원이 되고 싶다!”라는 본보기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주변의 여자 친구들에게 결혼하더라도 절대 일을 그만두지 말라고 한다.

여성도 자신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어야 “누구 와이프” 혹은 “누구 엄마”로 ‘누군가에게 귀속된 삶’을 살지 않고 내 이름 석 자로 불릴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어 “선생님”이라 불리긴 하지만, 누가 우리 엄마 석 자를 불러주는 일은 아마 병원에나 가야 엄마 차례가 되었을 때일 것이다.


언젠가는 멋지고 돈 잘 버는 남자를 만나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서 사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하지만 남편과 시댁의 재력만 믿고 살았다간 내 귀걸이 하나 살 때도 눈치 보게 될 것이 싫었고 만약 이혼이라도 당한다면 나는 홀몸으로 쫓겨나 단절된 경력으로 뭘 할지도 모른 채 길거리를 나돌게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충분히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고, 그 삶을 폄훼할 이유도 의미도 없다.


다만, 나 하나를 떠나 내 여자 후배들까지 생각한다면 더더욱 내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다.

많은 여성 선배들이 결혼과 육아를 위해 자신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떠나면서, ‘여성의 출산이 곧 퇴직’으로 이어지는 생각이 만연해졌고, 그러므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수많은 워킹맘은 눈치를 보게 되었으며, 아무렇지 않게 면접에서 “일하게 되시면 육아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하는 질문은 고스란히 여성들만 받게 되는 게 아닐까 생각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젠더 이슈에 민감한 우리 회사에서도 여성 임원의 비중이 매우 낮다고 하는 말을 “남자들이 일을 더 잘해서”라고 받아치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출산은 온전히 여성 혼자 감당해야 하는 신체적 이슈이다. 그래서 필요한 출산과 육아 휴직으로 인해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팀을 바꿔버리거나 자리를 없애버리는 행태로 더 잘할 수 있는 일을 더는 할 수 없게 되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저런 식의 반박은 발전 가능한 대화의 기회를 앗아간다.


성별을 떠나 부모가 되면 아이의 건강한 성장을 위해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당연히 가져야 한다.

이 사회는 출산을 장려하면서도 결혼과 출산, 육아에 따른 휴직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게 우습다.

특히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고자 한다면 “저 사람 퇴사하려나?” 혹은 “진급은 포기했나 보네”라며 눈치를 주는 게 지랄 맞다. 그럼 다시 아내가 육아 휴직을 내야 하고 그런데 온전히 그러기 쉽지 않고.. 다시 도돌이표 같은 이 싸이클은 계속 돌아간다.



퇴사하겠다고 말할 자신이 없어 죽으려는 마음을 먹은 나에게 이 계약직 면접은 내 머리에 여러 생각과 질문들을 쏟아내듯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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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 태그에 ‘정규직’은 있는데 ‘계약직’이 없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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