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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추문에 왜 이렇게 관심들이 많으세요?

도를 넘는 마녀사냥에 대한 환멸

by Enero
OO회사 불륜 찌라시 봤어?



단톡방에는 내가 물어본 적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은 찌라시들이 올라온다.

그런 걸 퍼 나르는 친구에게 나는 이런 거엔 관심도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 말해도 일방적으로 ‘전달’과 ‘공유’되어 날아오는 메시지들을 피할 길이 없다.

단톡방마다 찌라시의 내용도 조금씩 다르다.


어릴 때는 그냥 단순 호기심에 어떤 연예인의 추잡한 뒷모습이랄지, 인기에 힘입어 소위 ‘배우병’에 걸린 이야기랄지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가졌던 적도 있다.

그러다 한 연예인의 솔직한 고백을 듣게 되었다.

지인과 함께 술자리에서 잠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던 그분은 남들 다 태우는 담배도 그놈의 이미지 관리 때문에 피울 수도 없고, 바닥에 침 한 번 함부로 뱉을 수도 없다 했다. 메이크업하지 않은 채 사진을 찍어주면 ‘OOO 관리 진짜 안 하는 것 같다’고 올라오고, 아프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아 사진 촬영을 거절하면 ‘연예인병 걸려서 팬서비스도 안 해주는 나쁜 놈’이 된다 했다.

아무리 입방아에 오를수록 돈을 버는 연예인이라는 직업이라 해도 결국 인간인데, 내가 연예인이 된다면 나는 데뷔하자마자 자살했다고 당일 하루만 기삿거리로 반짝 나올지도 모르겠다.


연예인도 이런데 일반인은 또 어떠한가.

얼마 전부터 연예인 찌라시보다 자주 보게 되는 게 ‘OO 회사 상간녀’, ‘XX 회사 불륜남과 오피스 와이프’를 고발하는 내용의 메시지들이다.

대부분 어리고 예쁜 아가씨와 나이 많은 유부남의 불륜이 들켰고, 그래서 화가 난 부인이 찾아갔다는 내용이거나, 그 사실을 눈치챈 사내 다른 직원들이 이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당사자들 간을 넘어서 회사 전체에, 나아가 대한민국 전체에 얼굴 사진과 온갖 신상정보가 뿌려져 이 사회에서 쳐 죽여야 할 놈들이 된다.

사람을 죽였다거나 스토킹을 하다 해친 놈이라든지, 아니면 아동 착취 영상물을 소비하는 놈들보다 세세하게 개인정보가 후드득 떨어진다.


바람을 피웠거나 불륜 행위를 했다는 게 지탄받아 마땅할 일이라도 당사자가 아닌 이상 왜 그렇게까지 열을 올리며 ‘미친 X’ 소리를 하고 손가락질을 해 대는지, 본인의 소중한 감정과 시간을 왜 그런 곳에 소모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그런 사건들은 또 한 일주일이 지나면 사라져서, 그때 카톡방에 뿌려졌던 사진 속 사람들을 길에서 마주치더라도 알아볼 수도 없다.

그런데도 오늘의 찌라시에 이렇게 열을 내는 게 도대체 무엇을 위한 일인가 싶다.



C 대리랑 전무랑 불륜 사이래



나 역시도 그전에 함께 일하던 유부남 실장님과 말도 안 되는 추문에 휩싸여서 인사팀까지 다녀온 경험이 있다.

업무 시간 외 단 한 번도 사적인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 그 실장님과 나에 대해 괴소문을 퍼뜨린 작자 덕분에 나는 인사팀에 끌려가서 그 실장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 아니냐는 불쾌한 질문을 받은 것이다.


내 절친한 친구 C의 경우는 더 심하다.

그녀는 내로라하는 유명한 대기업에 근무하고 있으며, 똘똘하고 야무지다. 무엇보다 길을 걸어가면 10명 중 8명은 뒤돌아볼 정도로 출중한 외모를 갖췄다.

일도 잘하고 아나운서 준비를 했던 만큼 말도 잘하고, 심지어 외국어까지 잘 구사하고 예쁘기까지 하니 사내 공식 행사나 대외 업무에 그녀가 불려 다니는 것도 이상할 게 없다.

남초 회사인 그 회사에서 그 친구 이름은 수많은 이름 중 딱 하나고, 악바리 성격으로 아저씨들 등쌀에 밀리지 않고 계속 기세를 펼치고 있었다.


그런데 블라인드*에 그 친구의 실명이 올라왔다.

(*블라인드: 회사 메일 인증을 통해 가입하는 익명의 직장인 커뮤니티)


C 대리는 뭔데 저렇게 잘 나가요?
> X전무한테 몸 대주는 거 아니에요?
> ㅋㅋ 메신저 검색하니 딱 한 명 나오네요
> 불륜이라던데?
> 지가 뭔데 대외 행사에서 VIP석에 앉는 거죠?


C는 아무렇지 않은 척 이 이야길 해 주었지만, 그녀의 속이 얼마나 곪고 썩어 있을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만했다.


특히 그녀가 충격을 받은 건 익명 뒤에 숨어 있던 사람들보다 바로 옆에 함께 붙어 다니던 친한 남자 후배 때문이었다.

자주 술자리도 갖고 그녀가 무척 아끼던 후배였는데, 바로 며칠 전에도 본인의 동기 단톡방에 저런 불륜 관련 블라인드 글을 캡처해서 낄낄거리고 있다는 것을 다른 후배가 보고 알려줬다는 것이다.


그녀의 정신력이 튼튼하고 건강하기에 망정이지, 만약 내가 그녀의 상황이었다면 나는 이미 블라인드에 유서를 갈기고 회사 옥상에서 뛰어내렸을 것이다.

아니, 그녀도 본인이 죽지 못한 이유는 단 하나라 했다.

근무하고 있는 연구소 건물이 너무 낮아서.


만약 소문의 주인공이 자살한다 해도 찌라시를 퍼다 나르고 익명의 가면 뒤에 숨어서 낄낄거리던 그 인간들은 본인의 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 소문을 기정사실화하고 또 다른 사람을 잡아다 마녀사냥을 할 것이다.



신경 끄고 일이나 하세요



우리 회사 블라인드에도 간혹 불륜이나 바람 관련된 글들이 올라올 때가 있다.

업계와 회사 특성상 2~30대 젊은 사람들이 주를 이루기도 하고, 워낙 업무가 많고 바쁜 회사라 그런지 팀장 고발이나 상사에 대한 불만이 아닌 이런 개인사에 대한 글이 올라오면 사람들이 일명 ‘먹금’(먹이 금지 / 관심 끄기)을 하므로 주로 글쓴이 본인만 댓글로 욕을 먹고 글을 삭제한다.

주로 ‘바빠 죽겠는데 이딴 거에 신경 쓰지 말고 제발 일 좀 해라’, ‘당사자끼리 알아서 하게 해라’라는 등 글쓴이가 김샐 만한 댓글만 달리는 걸 보고 그래도 우리 회사 사람들은 괜찮은 편이네, 생각했다.


그래, 제발 일이나 하고 네 인생이나 신경 쓰길 바란다.

불륜 사실을 용서해 주고 말고는 당사자가 해야 할 일이며 가정 파탄의 책임은 아무도 당신들에게 묻지 않을 것이니 그냥 입 다물라고 하고 싶다.

괜한 찌라시 퍼다 나르다 명예훼손으로 고소장을 받고 난 후에야 구구절절 반성문을 쓸 생각 말고, 제발 신경 끄고 일이나 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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