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안 되는 스캔들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나는 내가 20대 후반이 되면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되어 있을 줄 알았다.
테이크아웃 아메리카노를 들고 사무실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다 회의 시간이 되면 프레젠테이션을 멋지게 해내고 박수를 받는 그런 직장인.
나는 회사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멋진 여자는 아니었다. 여름이면 땡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거래처를 돌았고, 겨울이면 핫팩을 여기저기 붙이고 가방 두 개를 들쳐 메고 다녔다. 덕분에 "올해의 계약 왕" 상을 따내기도 했다.
영업에서 나아가 또 다른 중요한 일을 하고 싶었다. 그러던 중 마침 기회가 왔다. 사내 전배 신청을 할 수 있는 공모가 뜬 것이다. 하나는 내가 평소에도 관심이 있었던 직무였고, 다른 하나는 내가 속한 부서의 헤드라 할 수 있는 '부서 직속 스탭'이었다.
두 개의 원서를 작성해두고 마감 일자 밤 11시 58분까지 고민했다. 내가 잘할 수 있고 좋아하는 분야로 지원할까, 아니면 새로운 업무에 도전하고 더 높은 자리에 갈 기회를 노려볼까.
우리 아빠 말로 나는 '호전적'이라, 역시. 도전해야 했다. 나는 직속 스태프로 지원했고, 서류와 면접 결과 합격이었다.
부서장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던데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내가 영업을 하면서 느꼈던 아쉬운 점들을 꺼내 해결해 보려고 했다. 그래서 영업 실적 외에도 함께 일하는 구성원들 생각을 더 했다. 메신저 프로필에는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적어 두었고, 어떤 질문에도 친절하게 답변해주려 애썼다.
여기저기 지사가 포진해 있는 영업 부서 특성상, 출장도 꽤 잦았다. 나는 '본사에서 부서장과 함께 나온 직원'으로서 부서장에게 하기엔 어려운 속 이야기들을 듣기도 하고, 사무실에 모자라거나 불편한 곳은 없는지 찾아보기도 했다.
업무가 끝나면 항상 회식이 있었다. 나는 흥이 많아서 술도 마시고 재미있게 떠들기도 했다. 거기서 나온 이야기들을 기억했다가 '나중에 이걸 개선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부서장님께 건의해 봐야겠다' 생각하기도 했다.
덕분에 "enero님이 스태프로 오시면서 일하기 정말 좋아졌어요"라는 칭찬을 자주 듣기도 했다.
기분상 정말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 된 것 같았는데, 이상한 소문이 내 귀에 들려왔다.
출장도 곧잘 다니고 업무 잘한다는 칭찬도 좀 듣다 보니 어느새 나는 '부서장의 여자'가 되어있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누가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내가 남자였어도 그런 소문이 났을 것 같냐고 따졌다.
실제로 나는 유부남에 딸도 하나 있는 부서장님과 업무 시간 외에 사적인 연락 한 번을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 기어이 인사팀에서 나를 불러서 '혹시 부서장과 이성으로서 특별한 사이냐'라고 물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소문을 낸 사람이 누군지 나는 알고 있다. 나름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었다. 마음 같아선 직장 내 괴롭힘 아니냐고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럴 용기도 없다.
게다가 아니러니 하게도 사과는 부서장님이 나에게 했다. 쓸 데 없는 소리 듣게 해서 미안하다고.
어찌 되었든 이 “아니 땐 굴뚝의 연기”는 나와 내 동료들의 호소와 시간이 흐르자 잦아들었다.
지금 나는 다른 부서에서 일하고 있어 그 전 부서 사람들과 마주칠 일이 많지는 않다. 그 인간을 볼 때마다 화가 치밀지만 자본주의 미소로 화답한다. 언젠가는 내가 너 가만 안 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