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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을 그만두고 꿈을 찾는 과 동기들

전공과는 무관한 일을 하는 우리들

by Enero
애국 외대 무한 국제!



2008년 2월, 우리는 전국과 세계의 어딘가에서 고등학교 생활을 마치고 학교 캠퍼스 내에서 열리는 OT에서 처음 만났다.

우리 과는 06년도에 신설된 과로, 한창 글로벌 인재 양성에 대학들이 힘쓰던 시절 여러 서울의 학교들이 만든 ‘국제학부’였다. 국제학부라는 이름답게 미국, 케냐, 일본, 울산(?) 등 각지에서 온 친구들이 함께 08학번으로 입학했고, 모든 수업이 원어 수업으로 진행되었다.


그전까지 나는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서는 그래도 영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나름 자신만만했지만, 이중국적자나 검은 머리 외국인들을 따라잡기에는 당연히 역부족이었다. 기숙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처음 맞은 자유에다가 나름 괜찮은 학교에 입학했다는 안도감에 나는 한동안 학교 수업보다는 동아리 활동이나 그냥 수업을 빼먹고 술을 마시러 다니는 데 주력을 다 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들을 여럿 만났고, 특히 한 학번당 20명이 채 되지 않는 인원 중에서 생일이 2~3일 차이로 몰려있어 ‘469모임’으로 결성된 1월 4일생 B언니, 1월 9일생 S와 주로 같이 다녔다.


08학번 새내기들의 꿈은 꽤 원대했다. 우리는 당연히 우리가 이 과를 졸업하고 나면 UN 같은 국제기구, 글로벌 회사, 국제 변호사, 해외 특파원, 아니면 못해도 KOTRA 직원이라도 되어 있으리라 생각했다. (실제로 선배, 후배 중에는 현재 그 꿈을 이룬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결국 그저 그런 회사원이 되었다. 그나마 대기업 해외사업팀에 있던 S는 과장까지 달며 세계를 누비기도 했지만, 나는 가장 멀리 간 출장이 광주광역시다.


외대를 만나면 세계가 보인다더니 나는 내수 시장에 묶여 있었고, 그건 B도 마찬가지였다. 월스트리트나 워털루에서 일할 줄 알았는데, 우린 여의도와 강남을 벗어나진 못했다. 우리는 그냥 회사원 1로 살고 있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카페를 차린 동기 S



과 동기 S는 동갑내기 친구이기도 하지만 나와 성향이 비슷하기도 하고, 나보다 성실하면서도 도전에 겁이 없는 친구다. 성격도 모진 데가 없어 모두가 S를 칭찬했고, S는 과 회장부터 교환학생까지 휴학 한번 없이 엘리트 코스를 밟다가 유명한 대기업에 해외 사업팀으로 취업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졸업을 한 친구이자 가장 먼저 사회생활을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그 회사에서 과장까지 단 뒤 모 외국계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동갑내기지만 존경하는 선배처럼 생각했다.


취미처럼 엑셀 강의를 찍어 올렸는데 꽤 퀄리티 좋은 수업으로 입소문을 탔고 나중에는 강의로 얻는 수익이 월급보다 커지고, 강남의 지하철 역사에 본인의 얼굴이 담긴 전광판까지 달리면서 쿨하게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리고는 별안간 “나 카페 차리려고 준비하고 있어.”라고 고백했다.

그 이야길 꺼내고 얼마 뒤, 그녀는 정말로 성수동에 카페를 차렸다. 복합 문화 공간으로도 활용할 생각으로 미디어 전시를 할 수 있는 예쁜 카페였다. 말 꺼내기 무섭게 바로 해내는 실행력과 바로 회사를 그만두고 하고 싶은 걸 하는 용기에 손뼉을 쳤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틱톡, 라이브 커머스와 같은 신사업에도 항상 관심을 많이 가졌다. 엑셀 강사로 데뷔를 하더니 이제는 틱톡 스타가 되고, 더해서 대형 포털에서 진행하는 라이브 커머스에서 각종 전자제품을 판매하기도 한다. 그 친구를 보고 있으면 정말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것저것 나도 할 수 있는 게 없을지를 묻는 언니 같은 친구가 되었다.



대기업을 그만두고 필라테스 강사가 되려는 B



또 다른 절친한 동기 B는 우리보다 한 살이 많다. B 언니 역시 학교를 졸업한 뒤 유명 대기업에 취업했다. 우리 중 당시 취업을 못 한 건 나 하나뿐이었고 나는 그냥 되는대로 충동적으로 해외에 나가기도 했다가 이것저것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살았다. 그래서 S나 B 언니가 더 대단해 보였고, 나도 빨리 취업을 해야 성공한 인생일 것 같다는 두려움이 있었다. 그런 한편 그 두 사람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B언니는 우리 과 동기 중 가장 먼저 결혼을 했고, 가장 먼저 아이를 낳았다. 사실 친하게 지내는 과 동기 중 아이가 있는 사람은 언니 하나뿐이다.

언니는 직장에서 사내연애로 결혼에 골인했고, 웃는 얼굴이 언니와 꼭 닮은 아들이 하나 있다. 육아를 하는 친구가 아직은 별로 없는 탓에 언니가 아기를 낳고, 또 키우면서 얼마나 힘든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온전히 알 수는 없었다. 그저 힘내라는 말, 언니는 정말 멋진 엄마라는 말 밖에. 언니는 아들을 보면서 너무 행복하다가도, 자신의 이름을 잊고 살게 되는 것이 아닌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어찌 되었든 언니는 육아휴직을 내고 아이를 돌보고, 언니 본인 스스로를 돌보기 위해 필라테스와 요가를 하고 있었다. 나는 언니를 통해 여자 배의 복근을 처음 봤다.

육아휴직이 끝날 무렵 언니는 복직과 퇴사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우리 회사도 꽤 깨어있는 편이라 남자든 여자든 육아휴직을 갈 수 있다. 그리고 그걸 권장하고, 아이가 있는 구성원들에게 혜택도 더 주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그런데도 육아휴직을 가는 선배들을 보면 이렇게 빠르게 흘러가고 성장하는 시장에서 육아휴직의 공백이 내 커리어에 정말 아무런 영향이 없겠냔 생각을 한다. 임신 사실을 회사에 알리는 순간부터 대부분은 챌린지가 필요하거나 야근이 불가피한 업무들에서는 배제된다. 그런 업무들은 대개 큰 프로젝트이고, 앞으로의 커리어와 포트폴리오에 한 줄 넣기 좋은 것들이다. 회사마다 다르겠지만 조직개편이 잦고 셀 단위로 유연하게 움직이며 사람이 자주 바뀌는 업계 특성상 육아휴직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전의 자리가 아닌 다른 팀에서 이전과는 다른 업무를 하게 될 가능성도 상당히 농후하다.


언니는 결국 언니가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기로 했다.

필라테스가 적성에 꼭 맞았고, 운동을 잘하고, 출산 경험도 있으니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는 다른 아기 엄마들을 잘 교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결정을 한 언니를 우리는 또 진심으로 응원했다.



그만 둘 용기가 없는 게으른 월급쟁이



물론 카페를 차리거나 운동 강사로 전향해서 더 부자가 되었다든지 돈을 쓸어 담고 있다든지 하는 이상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회사원이라면 한 번쯤 “퇴사하고 이런 카페나 차리고 싶다”라고 쉽게 말하지만, 그렇다고 자영업자가 쉬울 거로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건물 월세부터 재료 수급, 인건비, 관리비까지 생각하면 크게 남는 장사를 하고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이건 결국 그래서 ‘진짜 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라고 본다.


남들은 내가 마음먹는 건 무엇이든 해내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내가 아직도 쉽게 하지 못하는 게 ‘월급쟁이 노릇 그만하기’라 할 수 있겠다.

다달이 정기적으로 받는 꿀 같은 돈. 어떤 때에는 내 회사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열심히 하고 있나 싶지만 남의 거라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은 내 성격상 맞지 않는다. 나도 정말 내 걸 한다면 거기에 매달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 빤하다.


부산 기장의 예쁜 카페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글을 쓰면서 앞으로도 이렇게 글 쓰고 책 읽으며 사는 삶을 지속할 수 있다면 얼마나 기쁠까 생각한다.

소위 부모님 세대에서 ‘밥벌이가 안 되니 예체능은 취미로 하고 공부나 해라’라는 말을 듣고 자란 우리는 국제학을 전공하고도 세계로 나가지 않고 문과, 이과 같은 이분법적 정렬이나 국제학 전공과 같은 대학 4년간 체득한 지식과는 무관한 일들을 하고 있다.


‘엄마가 우리들 재능을 일찍이 알아봤다면 좋았을 텐데.’

얼마 전 S의 카페에서 모닝커피를 하던 우리가 서로의 삶을 들여다보다 한 말이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서울의 나름 나쁘지 않은 대학교에 다녔던 우리들은 지금 미디어 전시를 기획하는 카페 사장, 육아와 업무를 병행하며 계속 수련 중인 필라테스 강사, 그리고 회사를 잠시 벗어나 글을 쓰고 있는 자칭 작가가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어찌 될지 모르겠지만 아직은 나만 그만둘 용기가 없는 겁쟁이에 게으른 월급쟁이로 사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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