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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Sep 09. 2021

우리 절교하자

서른이 넘은 우리의 인연 끊기

너랑 절교야!


 열두 살, 첫 절교 선언을 받았다.

 지금은 내 20년 지기 친구인 S로부터 들은 말이었다.


 우리는 그전까지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같이 태권도 학원에 다녔고, 컵볶이를 나눠 먹었으며, 가끔 용돈이 생기면 피카추 돈가스를 사 먹는 사이었다. 엄마들끼리도 친하게 지냈고, 서로 네 집 내 집 할 것 없이 오갔다. S의 막둥이 동생 돌잔치에 가서 뷔페를 신나게 먹었던 기억도 있다.


 딱 한 가지, 서로에게 예민한 부분이 있었다.

 당시 S와 S의 언니는 H.O.T. 열혈팬이었고, 나는 fan god 3기였다. 

 얼마나 예민했는지 이 글을 쓰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대소문자 구분과 '.'까지 확실하게 쓴다. '져디'라고 하면 안 된다. 거꾸로 말하면 '디져'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린 서로를 존중하며 신곡이 나올 때마다 같이 카세트테이프를 사러 다녔고, S는 '장우혁', 나는 '윤계상' 명찰을 사서 가방에 꿰매 달고 다녔다. 우리 집에는 전축이 있어 라디오를 들으며 녹음을 함께할 수 있었는데, 나는 H.O.T. 노래가 나오면 바로 녹음 버튼을 꾹 눌러뒀고, S에게 선물했다.


 그러던 2001년 어느 날, H.O.T. 가 돌연 해체를 선언했다.

 그날 하굣길엔 내 친구를 비롯해 교복 입은 언니들까지, 모두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집에 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S의 집에 갔는데, S와 언니가 책상에 H.O.T. 앨범과 사진을 펼쳐 놓은 채 '전사의 후예'를 들으며 대성통곡하고 있었다.


 그녀를 위로해준답시고 내가 한 말은 지금 생각해도 참 어리석었다.

 "야, 울지 마. 그럼 이 김에 god로 갈아타는 건 어때?"


 우리는 아직도 이 얘길 하며 웃는다.



이 나이 먹고 싸우기 싫어



 고등학교 3학년 때, 같은 반에 시니컬한 여학생이 있었다. 친하게는 아니어도 같은 반 친구로서는 괜찮게 지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친구가 어느 날 말했다.

 "야, 솔직히 우리 정도 사이면 이제 졸업하고 연락 끊기고 앞으로 못 볼걸?"

 정 많은 19살 소녀는 그 말 뜻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럴 리가 없다고 확언했지만, 결국 그녀 말대로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졌다. 그리고 정말로, 졸업 후 그 친구와 만나는 일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단 한 번도 없었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아마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다.


 나는 사람을 끊어내는 데 소질이 없는지라 웬만큼 이상한 짓을 하지 않고서야 친구의 연을 저버리는 일이 없다. 특이하게도 연인을 끊어내는 데엔 '이 여자에게 이런 면이?' 싶을 정도로 차갑고 매서운 편이라 한 번 돌아선 마음이 되돌아 간 적이 없는데, 싸웠거나 감정이 상해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더라도 '친구'에겐 달랐다. 

 주변 다른 친한 친구들이 "야, 걔는 정말 이상해. 너를 너무 이용하잖아."라던지, "너에게 자격지심이 있나? 그런 애랑은 가깝게 지내지 마."라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에이, 그래도 친구잖아. 내가 데리고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가끔 만나고 연락하는데. 내가 맞춰주면 되지."

 싸우는 일이 없는 평화주의자이자 비둘기인 내 사전에 '절연'은 없다.


 그런데 '내가 맞춰주고 이해하면 되지.'라고 생각한 게 결국 성화봉을 타고 오른 불꽃이 되어 타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오랫동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행동과 말을 하는 걸 보며 별안간 '아, 이제 듣고 싶지도 않고 보고 싶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거기다 대고 '우리 이제 연 끊자.'라고 말하는 건, 이 나이 먹고 유치하고 우습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하기까지와 하고 난 후 내가 소모해야 할 감정이 너무 아깝다.


 한 친구는 그럴 때 주로 말없이 가만히 있거나 만나는 자리에 나가지 않다가 연락을 끊어버린다 했다. 다른 친구는 대놓고 서운한 감정을 이야기해서 풀어나가려 하고, 또 다른 이는 욕을 던지고 버린단다.

 나도 이제 피곤해서 이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 싶은데 그러지도 못해 그냥 리액션만 한다.


 나만 생각하고 싶은데, 나는 친구와 알고 지낸 시간과 주고받은 추억이 아까워서라도 절교 선언은 못 한다.

 서른이 넘은 나는 아직도 친구 관계가 어렵다. 애인 사이보다 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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