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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ero Jul 21. 2021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

엄마도 엄마에겐 아직도 어린 딸이다

내가 암일 수도 있다고 하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1년 정도 지났을 무렵,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 엄마” 나는 평범한 어느 때처럼 전화를 받았는데 엄마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엄마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 있어?” 그제야 엄마는 흐느끼는 목소리로 말했다.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자궁암이 의심된대. 정밀 검사해 봐야 알 것 같다고 하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엄마가 걱정되기도 하고 너무 안쓰러웠다.

우리 큰 이모는 지적 장애를 앓고 있어 큰언니인 엄마가 항상 작은 동생을 케어했고, 결혼을 하고서는 연세 지긋한 시조모를 (나에게는 증조할머니) 모시고 살았고, 시어머니 암투병 당시 병간호를 해야 했다. 내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할머니가 암에서 완치되자 이번에는 친할아버지가 당뇨로 앓아눕다 돌아가셨고, 지금은 엄마의 남편이 파킨슨병 투병 중이다. 우리 엄마의 일생을 돌아보면 그렇게 누군가를 계속 돌보며 살았다.

 그럼에도 엄마가 일종의 ‘천사병’에 걸린 사람처럼 남들을 돌보고 항상 밝은 듯, 행복한 사람처럼 지내왔고 그 상처를 남들에게 드러내지 않았지만, 엄마의 가장 친한 친구인 나는 고스란히 엄마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사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정밀검사 날짜 언제로 잡았는데?”

“암센터에 다음 주 목요일.”


 엄마에겐 내가 연차를 쓰고 데려다줄 테니, 굳이 아빠나 동생이랑 가지 말고 나랑 가자고 말했다. 엄마는 한사코 너 일하느라 바쁜데 그럴 필요 없다고 했지만, 분명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잠도 못 이루고 밥도 못 먹을 엄마 성격을 빤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우리 딸, 고맙고 미안해.. 나는 아프다고 하소연할 엄마가 없어서 딸한테 이런 소리를 다 하네..”


 다행히 엄마의 검사 결과 상 암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고, 6개월 뒤에 다시 진료를 했을 때에도 건강하다는 소견을 받았다.

의사의 미소를 보니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


 가족의 죽음 중 가장 충격적이고 긴 여운을 준 것은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었다.


 친할아버지는 내가 고등학생 때 돌아가셨는데, 친할아버지가 워낙 무뚝뚝하고 말씀이 없던 분이셨기도 해서 나와 동생은 할아버지를 아주 무서워했었다. 심지어 친할머니는 시시때때로 우리 앞에서 할아버지 욕을 하기도 했었으므로 그리 친하게 지낼 기회도 없었던 것 같다.

돌아가시기 몇 해 전부터는 당뇨로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까지 받으시고 늘 방에 누워 계셨는데, 그런 할아버지를 안타깝게 생각했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같이 큰할아버지 산소에 가는 길에 할아버지를 내가 부축했던 기억이 있다.

그래도 친할아버지는 긴 시간 우리에게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기 때문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이 엄청난 충격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많이 울었고, 할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를 혼자 써서 책상에 간직했다.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는 건 달랐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엄마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인 ‘엄마의 엄마’를 다시 볼 수 없게 된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나는 우리 엄마가 없는 삶을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엄마를 떠나보낼 수 있을까.



많이 무라, 내 새끼


 외할머니는 이름도 생소한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렇게 아프시다는 소리 한마디를 하지 않으셔서 발견이 너무 늦어버렸다. 할머니는 본인의 아픔을 내색하지 않고 서른이 넘은 나를 보고도 ‘아이고 내 강아지’하면서 빨간 앞치마에서 꽁꽁 묶어둔 쌈짓돈을 우리 손주 용돈이라고 쥐어 주셨다.


 우리 아빠와 엄마는 둘 다 각 집안의 장남, 장녀로 나는 이 씨와 임 씨 집안의 첫 손주였다.

첫 손주가 딸인 것을 확인하고 나의 친할아버지, 친할머니는 적잖이 실망하셨다. 그래서 내 이름은 돌림자를 따르지도 않았고, 이름도 마음대로 지으라고 하셔서 지금의 내 이름은 엄마, 아빠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다.

하지만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내가 딸이건 아들이건 상관하지 않고 ‘우리 강아지’하며 세상 제일 예뻐해 주셨다.

남동생이 태어났을 때, 친할아버지는 공책 두 권에 가득 ‘재’ 자 돌림이 들어간 이름을 빼곡히 적어 오셨다고 한다. 그때에도 우리 외할머니는 동생을 보기 전에 나를 먼저 안아주고 예쁘다 해 줬다. 그 어릴 때 기억이 아직도 난다.

 친가에 가면 맛있는 반찬과 고기는 동생 앞에 있었고, 외가에 가면 그런 맛있는 것들이 내 앞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나는 부산에 가는 게 행복했다.


 매 방학이 되면 부산에 내려가 외할머니 집에서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지냈다.

외할머니 음식 솜씨가 좋아서 할머니는 이런저런 식당을 운영하셨는데, 그중에서도 할머니의 김치와 돼지국밥은 그 어떤 식당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맛이었다.

지금처럼 고속도로가 뚫리기 전, 서울에서 아빠 차를 타고 열 시간 가까이 걸려 부산에 내려가면 나는 할머니에게 저 멀리서부터 달려가서 꼭 끌어안고는, “할머니, 국밥 먹고 싶어요”하면 기다렸다는 듯 가스레인지 불을 올리셨다. 손으로 김치를 찢어 올려 주면서 “많이 무라, 내 새끼” 하셨다.


 외할머니로부터 마지막으로 받은 선물은 쌀 한 포대였다.

잘 챙겨 먹으라고 쌀 한 포대를 택배로 보내주셨다. 회사원 둘이 사는 집에서 쌀 한 포대를 비운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던지라 그 쌀은 결국 묵고 묵어 노랗게 되었다. 할머니가 떠나고 2년이 지나서야 이제는 정말 안 되겠다 싶어 남은 쌀을 버렸다.

그리고 한참을 또 울었다.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서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 우리 엄마도 외할머니에게 전화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하고 조언도 많이 구했다.

우리 외할머니는 그 시대 사람 치고 꽤나 깨어 있는 분이셔서, ‘결혼하지 말아라’, ‘애 낳지 말고 너 재밌게 살아라’ 이런 이야길 많이 하셨다고 한다. 엄마도 나처럼 엄마와 친구처럼 잘 지내는 사이였다.


 엄마도 처음 겪는 일들 투성이었을 것이다.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하고, 딸이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아들이 군대에 가고, 애들이 대학교에 들어가고 취업을 하고, 연애를 한다고 하지를 않나 결혼을 한다고 하지 않나. 이 모든 것들이 엄마에게도 처음 겪는 순간들이라 본인의 엄마에게 많이 의지 했으리라 믿는다.



 얼마 전, 외할머니 제사로 엄마와 내가 둘이 일찍이 부산으로 여행 겸 내려와서 술을 마시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누구를 닮아 이렇게 술을 많이 먹나 싶었는데, 아무래도 엄마 유전자임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할머니 단골 곱창집에서 포장해 온 양념곱창을 안주로 둘이서 대선 다섯 병을 비우고야 잠을 잤다.

나는 엄마에게 흡연 사실을 고백했고, 엄마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그래, 담배는 기호식품이지 뭐. 편의점 가보면 껌 종류보다 담배 종류가 더 많더라.” 했다.


그리고 같이 외할머니를 그리워했다. 할머니와 함께한 추억들을 하나씩 꺼내면서 부디 할머니가 지금은 아프지 않기를, 엄마가 행복하기를 빌었다.

소주 다섯 병을 마신 모녀는 함께 침대에 누워 더 이상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눈물만 줄줄 흘리며 베개를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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