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하는 팀장과 싸워주는 팀장

팀원을 보호하지 않는 팀장에게 신뢰는 없다

by Enero
아이고, 잘 해결해 봐요.



영업 거래처가 아무래도 수상했다. 거래처 사장이 준 명함도 이상하고, 미팅하러 오라고 한 위치도 청담동 지하에 있었다. 로드맵으로 살펴보니 유흥업소 같았다. VOC가 내 앞으로 왔기 때문에 내 담당인 건 맞지만 아무래도 영 찜찜해서 팀장님께 말씀드렸다.


"멍부" (멍청한데 부지런한) 팀장은 나더러 "조심히 다녀와요." 했다. 내 친구가 이런 델 간대도 나는 가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 거기다 대고 잘 다녀오라니. 결국 옆 자리 남자 선배가 내가 팀장님께 이야기하는 걸 듣다가 "거기 그냥 제가 담당할게요. 제가 갈 테니 OO님은 가지 마세요." 해 주었다.


한 번은 강성으로 항의하는 거래처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그 거래처 사장은 늘 본인이 우리 회사 높은 분과 아는 사이며, 내가 빨리 처리해주지 않으면 그분께 말씀드리겠다고 협박했다.

자기 일부터 빨리 처리하라며 낮이고 밤이고 전화를 해대는 통에 스트레스가 도를 넘었다. 몇 번이고 안 된다고, 그건 그 어르신께 말씀드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지만 그 사장 놈은 듣지 않았다. 그가 나에게 빨리 처리해달라고 하는 일은 이를테면 김밥천국에 가서 다짜고짜 참치김밥 100줄을 5분 만에 내놓으라는 는 것과 비슷했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앞에 먼저 기다리고 있는 분들이 계시니 순서를 기다려 달라, 그리고 그렇게 빨리 처리될 수도 없는 일이라 몇 번을 말해도 그는 수화기에 대고 소리를 꽥꽥 질러댔다.


"윗사람 바꿔! 당신 말고, 당신 팀장 바꿔!"


결국 불호령이 떨어졌다.

그 호통이 떨어진 날은 공교롭게도 팀 회식 자리였다. 신입 조무래기부터 팀장, 실장 모두 모여있는 저녁 술자리 회식에서 나는 혼자 테이블 끝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연신 죄송하지도 않으면서 죄송하다 말하며 그 사장 놈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언에 눈물이 나서 구석 자리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키보드를 두들기는데 동기와 선배들은 담배 태우는 나를 따라나서서 어깨를 토닥여주고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말하라 했다.


"팀장님과 통화하고 싶으시대요."

"그럼 당연히 팀장님께 말씀드려야지, 팀원 보호해주는 것도 팀장 역할인데. 가서 말씀드려요!"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서 결국 팀장님께 말을 꺼냈다.


"팀장님, XXX 거래처 사장님이 너무 강성이어서요. 팀장님과 통화 좀 하고 싶으시다는데, 괜찮으실까요?"

"아... 저런... 혹시 OO님 선에서 해결 안 되는 거예요? 알아서 한 번 잘 말씀드려 봐요."


거래처 사장보다 이 팀장 놈 때문에 더 화가 치밀었다. 내 선에서 해결이 안 되니 관리자인 너한테 내가 왔지, 내가 해결할 수 있었으면 이 밤 10시 넘은 시간까지 회식 자리에서 젓가락 한 번 못 들고 이러고 쩔쩔맸겠냐고. 심지어 실장이란 사람도 내 두 칸 옆자리에 앉아서 내가 일하는 걸 보고 있으면서도 잔 빨리 안 든다고 짜증을 냈다.


그 팀장이 나더러 "알아서 해 봐라." 한 걸 그 자리에 있던 팀원 모두가 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후에 그 일에 대해 말이 나올 때마다 한숨을 푹 쉬었다.


"진짜 정이 뚝 떨어지더라. 안 그래도 회피해대는 데 질렸는데 OO님한테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보고 신뢰가 다 없어졌어."


나는 다른 팀으로 전배 되어 그 팀장을 떠날 때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아무런 업무 관련 조언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팀장이 좌천되는 걸 보면서 내심 속으로 낄낄 웃었다.




감히 우리 OO님에게? 기다려봐요, 제가 해결해요.



팀장의 역할 중 팀원을 보호하는 일이 있으며 그걸 실제로 행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최근 겪은 두 팀장님을 통해 알았다.

그들은 다른 팀의 누군가 나에게 예의 없이 굴었거나 말도 안 되는 고압적인 자세를 취하는 걸 보면 바로 그쪽 팀에 항의했다. 덕분에 메일을 보낼 때 "참조" 목록에 우리 팀장님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든든했다.


다른 부서에 신규 입사하신 분이 다짜고짜 나에게 따지듯 물었다.

"작년 KPI 파일 봤는데요. 저 좀 이해 안 되거든요. 이거 그쪽 팀에서 짰다고 들었는데, 쿼리 있어요?"


직장인 메신저 에티켓의 기본 중 기본! "안녕하세요!"가 빠진 날 선 멘트였다.

사실 아마 날 서 있는 수준은 아니었을 거고, 그냥 급한 마음에 사내 인트라넷에서 우리 팀을 검색하니 입사 연월이 꽤 오래된 내가 보여서 나에게 메신저를 보냈을 것이다.


"안녕하세요. 작년에 그 업무는 XX님이 하셨는데, 현재 퇴사하신 분이시고요. 저희 팀에서 그 업무를 담당하시는 분은 다른 분이세요. 그분께 여쭤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담배나 태우러 가자는 팀장님을 따라나서며 혼자 말없이 화를 삭였다. 그 모습을 본 팀장님이 무슨 일이냐 묻기에 너무 황당하다며 이야길 털어놓았다. 팀장님은 그 자리에서 그쪽 팀장님께 메신저를 보냈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OOOO팀 J입니다. XXXX팀에서 최근 작년도 KPI를 살피는 업무를 하고 계신가 봐요. 관련해서 궁금하신 점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 주시면 됩니다. 저희 팀원들 각자 맡고 있는 롤이 달라서 제게 먼저 문의해달라 해주시면 담당자 지정은 제가 해 드리겠습니다."


화 한번 내지 않고 나를 보호하고 우회적으로 '너네 팀원 하나가 우리 팀을 들쑤시고 있다'는 뼈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팀장님, 당장 스타벅스 가요. 프라푸치노, 아니 벤티 사이즈로 사 드릴게요."


나는 그 후 사소한 것부터 업무 외적인 것까지 고민이 생기면 가장 든든한 내 인생 선배이자 존경하는 사람으로 우리 팀장님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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