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레카야자 Jan 30. 2024

얼리턴(Earlyturn)



프리다이빙 용어에서 얼리턴(Earlyturn)은 목표한 수심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얼리턴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목표한 수심까지 가는 중에 이퀄라이징(EQ)이 되지 않거나

숨이 모자라-다는 느낌이 들-거나 

마스크, 핀 등 장비에 문제가 생겼다든지 

릴렉스가 제대로 되지 않아 불안함이 엄습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얼리턴은 목표 수심 달성 실패다. 


목표가 50m였다면 5m에서 턴을 하든 49m에서 턴을 하든 얼리턴이다. 

농구에서 슛이 에어볼(air ball)이든, 림(rim)을 맞고 돌아 나오든 어쨌든 노골(no goal)이듯이. 

프리다이빙 대회에서도 실제 다녀온 수심과 관계없이 얼리턴은 화이트카드를 받지 못한다.



얼리턴(early turn)





그렇다면 얼리턴을 한 다이빙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목표 수심을 충족하지 못한 다이빙. 

그러나 얼리턴을 '다이빙 실패'라고 말하는 순간, 진한 서운함이 남는다.

캔디볼을 눈앞에 두고 돌아선 얼리턴을 다이빙 실패라고 한다면

거기까지의 내 다이빙은 어디로 가버리는 걸까? 

그 다이빙 자체가 무의미해지고 마는 걸까?


아니다.


프리다이빙은 분명히 수심을 겨루는 종목이지만 

(물론 무호흡잠영 DYN 등 다른 종목들도 있다)

성적을 내야 하는 대회의 선수 다이버가 아니라면

우리 개개인의 프리다이빙에 있어서

수심의 충족이 좋은 다이빙을 판가름하는 충분조건일 수는 없다. 


기실 바다의 입장에서 인간의 다이빙이란 늘 얼리턴이지 않나.

작년 9월 또 한 번 CWT 세계 신기록을 경신한 

알렉세이 몰차노브(Alexey Molchanov)가 136m를 다녀왔다. 

136m. 아득한 그 깊이도 바다가 보기엔 턱없는 얼리턴이다. 

모든 인간의 다이빙이 바다 입장에서는 겨우 대야에 고개를 담근 정도 아닐까.


결국 우리가 설정한 목표 수심은 그저 숫자에 불과하다.


다이빙의 성공과 실패를 수심에 맡길 수는 없다. 

'목표한 수심을 달성했는가?' 

그건 그 다이빙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인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목표한 수심에 도달해야 그 다이빙에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다. 

수면에서 그 다이빙을 준비할 때의 호흡과 마음가짐,

부드러운 입수와 안정적인 피닝, 편안한 이퀄라이징, 

고요하고 평화로운 프리폴 등 이 모든 것이 그 다이빙의 완성도를 결정한다. 

다이빙 과정의 질이 만족스러웠다면, 

설령 얼리턴을 했더라도 그 다이빙은 그 자체로 훌륭한 다이빙이다.




강사과정 중 수심 기준인 40m를 눈앞에 두고 돌아 나온 적이 있었다. 

다이빙 컴퓨터에 기록된 당시 수심은 38.6m. 

프리폴(free fall)을 타고 1초만 더 참았으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수심 달성에 실패한 그 다이빙은 그러나 나에게 많은 걸 가르쳐주었다. 


눈앞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

바텀 플레이트를 향해 다이빙하기보다 나의 내면을 향해 다이빙하기.

수심 달성을 위해 다이빙하기보다 바다의 평온함을 느끼는 다이빙하기.

내 숨과 귀의 상태를 정확하게 느끼고 판단하기.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나는 과감히 얼리턴을 할 줄 아는 다이버가

본인의 몸과 정신을 돌보지 않고 억지로 목표 수심을 달성하는

다이버보다 더욱 훌륭한 다이버라고 믿는다. 


본인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얼리턴을 했다면

그다음 다이빙을 준비하면 된다.

직전의 얼리턴은 그다음 다이빙에 있어 적잖은 가르침을 줄 것이다.


프리다이버는 얼리턴을 할 때 비로소 성장한다




앞으로의 내 프리다이빙에서도 

숱하게 많은 얼리턴을 하게 될 것이다.

그 얼리턴과 얼리턴들 사이에서 많은 걸 배울 것이다. 


우리는 멈추고 돌아올 때 한 단계 성장한다. 

중요한 건

그 얼리턴까지의 내 다이빙이 어땠는지,

그 얼리턴에서 어떤 걸 느끼고 무엇을 배웠는지.


우리가 겁내야 할 것은

목표 수심 달성을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얼리턴을 통해 아무것도 느끼고 배우지 못하는 것.


다시 한번,


얼리턴.


 




매거진의 이전글 프리폴(Free fall)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