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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레카야자 May 29. 2019

이름 : 승준찬 / 나이 : 9세 / 국적 : '없음'

[소수의견] 우리 땅서 태어난 아이 죽어가는데…'국적' 따지나


[미방분] 11월 20일 성석교회


2018년 11월 20일

승준찬 군의 아버지 승순종 목사는 교회의 연단이 아닌 신도석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에는 아내와 딸이 나란히 앉았다.

셋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그 옆과 뒤로 여러 신도들이 함께 있었다.

모두 함께 기도했고 부는 함께 눈물을 흘렸다.


마주본 연단에는 어린 아이의 사진이 액자에 담겨 놓여있었다.

 


[미방분] 승준찬 군 장례 예배



승순종 씨는 국인이었다. 92년도에 3개월짜리 비자를 받아 한국에 왔다. 

그는 한국에 머물게 됐다. 돈을 벌어 대부분의 몫을 본국의 어머니에게 보냈다.  

그러다 2003년도 그는 성가대 활동 중 지금의 아내를 만났고 화곡동의 한 옥탑방에서 살림을 합쳤다.

2004년에 첫째 딸, 2009년에 둘째 아들 승준찬 군이 태어났다.


신분상 그는 아이들의 출생신고를 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을 자신의 중국 호적에라도 올리려 했으나 중국의 호구등기조례*에 따라 92년도 그가 출국을 함과 동시에 중국 호구부에서 또한 그의 이름이 지워진 상태였다.


그들의 몸과 마음은 한국에 있었으나

그들의 이름은 지구상의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


호구등기조례* ; 1958년 1월 9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91차 회의에서 통과되어 1058년 1월 9일 중화인민공화국 주석령으로 공포하고 공포일부터 시행.                             

호구등기조례 中 제 10조 <이동>

공민이 호구관할지역으로부터 밖으로 이동하는 경우 본인 또는 호주가 이전 전에 호구등기기관에 전출등기를 신고하고 이전증을 받아 호구를 말소한다. 




[미방분] 승준찬 군의 아버지 인터뷰



학교는 어찌어찌 교장선생님의 협조로 보낼 수 있었으나

학교에서 수학여행을 가도 참여 못시혹시나 잔병치레라도 할 때면 의료보험이 되지 않아 수만원씩 생돈이 나갔다.


그러다 준찬이가 초등 1학년을 마칠 때쯤 열이 나고 황달이 생겨 동네 소아과 갔다. 증세가 심상치 않아 이대목동병원으로 옮겼다. 급성간부전증. 간 이식을 위해 이번엔 서울대병원으로 옮겼다. 보험 없이 간이식에 드는 비용은 1억 5천이라고 했다. 준찬이의 두 부모는 하늘이 무너졌다.




[미방분] 승준찬 군 아버지 인터뷰



얼른 나아 놀이동산과 비다를 가는 것이 꿈이던 9살의 준찬이는 결국 2018년 11월 세상을 떠났다.


11월 20일은 그런 준찬이의 장례예배와 발인이 진행되는 날이었다.


나는 그 날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취재했다.


이런 취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투명망토를 뒤집어 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동선이나 위치가 유족이나 조문객들의 시야를 가리지 않고, 나와 오디오맨이 내는 소리가 그들의 울음 소리보다 크게 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했다.


장례 절차에는 꽤 많은 신도들이 함께했고 그 중 많은 신도들이 함께 슬퍼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준찬이를 기억했다. "씩씩했던 준찬이", "밝았던 준찬이", "예배 참석에 열심이던 준찬이" 



[미방분] 승준찬 군 장례 예배



가족 상도 한 번 치러본 적이 없던 나는 '죽음'에 대한 그 모든 슬픔과 아픔들이 낯설었다. 

지난 날 김포 소방관 합동 영결식을 취재했을 때와는 감정의 결이 달랐다. 

'죽음'의 원근(遠近)에서 오는 차이는 꽤나 컸다. 


9세 작은 몸을 염(殮)하는 과정도 함께했다. 

 가까이로 가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통제된 방 안으로  들어갔다. 

투명망토를 쓴 나는 오디오맨에게 와이러리스 마이크를 쥐어 반대편으로 보낸 뒤 유리벽 너머로 신도들의 표정을 찍고 문틈 사이로 승 목사의 눈물을 담았다. 


눈물은 전염이 강했다. 작은 몸을 보며 오열하는 가족들과 신도들의 눈물이 렌즈를 너머 뷰파인더를 타고 나에게도 옮겼다.


이렇게 가까이에 준찬이의 시신이 있다는 것이 이상했다. 얼굴을 하염없이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이 찬 승찬이의 체온과 대비돼 뜨거워 보였다.  



(좌) [미방분] 승준찬 군 염 의식 / (우) 181231 <[소수의견] 우리 땅서 태어난 아이 죽어가는데…'국적' 따지나>



준찬이의 몸을 닦아주고 나온 가족들은 한동안 몸을 옮기지 못했다. 

대기석으로 돌아온 준찬이의 누나는 준찬이의 사진을 꼭 안고는 생전 그에게 너무 퉁명스러웠던 자신이 밉다며 엉엉 울었다.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외치는 누나를 준찬이의 어머니는 안아주며 괜찮다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토닥였다.


[미방분] 승준찬 군 염 의식 후의 유가족



승준찬 군의 누나는 준찬이를 많이 아끼는 누나였다.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쯤, 그러니까 준찬이가 아파 병원에서 지낼 적에, 동생이 아픈데 집안 사정이 어려워 치료가 더디다며 도와달라는 편지를 쓰기도 했었다. 편지의 맨 위에는 'To. 문재인 대통령님께'라고 써있었다. 준찬이의 아버지는 편지를 보내주겠다고 하고는 고이 접어 집안에만 보관했다. 


그래도 미안한 누나였다. 그런 누나였다. 



 [미방분] 승준찬 군의 누나가 대통령에게 쓴 편지



이후 준찬이와 가족, 성도들은 서울시립승화원으로 이동했다. 

이제는 정말로 준찬이가 이 세상을 떠날 차례. 

유리벽 너머로 수의를 입은 준찬이의 몸이 화로로 들어가고 문이 닫히자 준찬이의 어머니는 스러졌다.



181231 <[소수의견] 우리 땅서 태어난 아이 죽어가는데…'국적' 따지나>


납골당에는 여러 층, 여러 단이 있고 특정 층과 칸마다 천차만별의 가격을 매긴다.

사람들은 죽은 가족의 몸을 태운 가루를 항아리에 넣어 올려놓는 댓가로 수백, 수천만원의 가격을 지불한다.

그러나 준찬이의 두 부모에게 그만한 돈은 죽음에 대한 형식치레보단 삶에 값졌다. 


하여 뿌렸다. 

서울시립승화원에는 이런 이들을 위해 따로 마련한 공간이 있었다. 

흰 장갑을 끼고 두 부모를 시작으로 준찬이의 친인척과 교회 성도들이 함께 준찬이의 유골을 뿌렸다. 


뿌리는 사람도, 뿌리는 걸 보는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찍히는 이들도, 찍는 이도 모두 울었다. 



181231 <[소수의견] 우리 땅서 태어난 아이 죽어가는데…'국적' 따지나>



그 날 그 시간엔

사진 속의 준찬이만이 울지 않았다. 





181231 <[소수의견] 우리 땅서 태어난 아이 죽어가는데…'국적' 따지나>










해당 리포트 ; http://imnews.imbc.com//replay/2018/nwdesk/article/5094231_2266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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