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살 중국인 광복군 "그때 우리는 형제였다"
먼저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에 가 건물 외경과 윤 의사 흉상 등을 스케치 하고 홍커우 공원을 스케치했다. 윤봉길 기념관 정문 앞을 지키는 경비원이 내게 취재를 멈추라며 제지를 가했다. 취재비자를 보여줘도 속수무책. 결국 공안들이 왔다. 거세게 손을 저으며 카메라는 안된다고 말하는 도중 다른 장소에 갔던 현지 코디가 왔다. 코디와 공안들이 중국어로 대화를 나눴다. 순식간에 취재는 허락됐다. 영문모를 제지였고 영문모를 허락이었다. 역시, 중국이었다.
외국인 독립운동 유공자 중 유일한 생존자인 쑤징허 지사는 올해로 103세가 됐다. 그동안 그를 찾아 한국에서 여러 언론이 왔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연로한 탓에 여태까지 방문한 취재진들의 질문을 듣고 답하지는 못했다. 3분이상 앉아있기도 힘든 몸이었다. 때문에 주로 인터뷰는 그의 아들 몫이었다.
그래서 우리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의 아들을 만나 아버지의 공적에 대해 듣고, 독립운동가의 아들로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땠는지, 자부심보다 야속함이 앞선 적은 없었는지, 하는 정도를 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 후 방에 누워있는 쑤징허 지사를 스케치하고 올 생각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쑤징허 지사의 집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건물이었다. 카메라를 짊어지고 올라가니 나도 숨이차는 높이었다. 올라가며 난 쑤징허 지사는 아마 돌아가시기 전까지 직접 외출을 하시기는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집 내부는 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ENG카메라에 매트릭스 LED조명을 달았다.
역시나 쑤 지사는 누워있었다. 집 안에 누워서도 패딩점퍼를 입고 있었다. 아들이 침대 모서리에 취재기자와 마주 앉았다. 취재기자는 코디를 통해 혹시 쑤 지사를 잠시만 일으켜 옆에 앉아있게 해줄 수 있겠냐 물었다. 아들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귀에 대고 중국어로 짧은 몇마디를 던지고는 그를 일으켰다. (103세 쑤 지사의 아들도 침상에 누운 노부(老父)를 이리저리 옮기기엔 이미 힘겨워 보이는 나이었다)
질문과 답이 이어졌다. 취재기자가 안춘생 대장에 대해 아버지께 들은바가 있는지를 아들에게 물어보려다, 혹시 쑤징허 지사가 직접 대답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우리도, 그의 아들도 큰 기대는 없었다.
그런데
쑤징허 지사가 직접 입을 열었다.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은 아니었다. 그는 취재진의 질문을 알아들은게 아니었다. 그저 그가 살아온 '역사'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었다. 전문 동시 통역가가 없어 그의 말을 일일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중간중간 눈시울이 붉어질 정도로 열과 성을 다해 전하는 그의 진심은 언어를 초월하는 그 어떤 것이었다.
인터뷰가 모두 끝난 뒤 쑤 지사의 아들은 우리에게 와 조심스레 어떤 말을 했다. 코디를 통해 들은 그의 부탁은 혹시 오늘의 촬영 원본을 추후에라도 줄 수 있냐는 것. 아버지가 이렇게 길게 말씀을 하시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의 일이고 이례적인 일이라며 아마도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일 수도 있기 때문에 그 기록물을 가지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 캡*에게 물을 일이 아니었다.
캡* ; 회사 내부에서 일선 현장을 취재하는 기자들을 통솔하는 역할. 취재 배정부터 취재 방식, 동선, 촬영본 송출 및 원본 처리 등 전반에 걸쳐 관장한다.
우리 취재진도, 쑤 지사의 아들도 기적같은 일이었다고 말했다.
취재기자 선배는 나같은 젊은 피가 첫 출장을 와 뿜어낸 에너지 덕이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택도 없는 소리인줄은 알지만 어쨌든 유일한 생존 외국인 독립운동 유공자의 인터뷰를 확보했다는 것은 기분은 좋은 일이었다.
대한민국에 기적과 같은 공(功)을 세운 그가 만든 또 하나의 사소한 기적이었다.
이후 취재했던 장소들도 뜻깊은 곳들이었다.
선생님,
제 시계는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제 시계와 바꿔차시지요.
우리 지하에서 만납시다.
무심코 지나쳤던, 쉑쉑버거 앞 벤치에서 기념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보며 '굳이?'하는 생각 외에는 별다른 생각 없이 지나치던 신천지 골목길이 달리 보였다.
그런데 지금 돌이켜보면 참 좋은 출장이었다. 취재 일정이 그리 '빡세지' 않았다. 매일 정해진 일정에 맞춰 공부하는 기분으로 사람들을 만나 인터뷰하고 유적지에 가 스케치를 했다. (이후 베트남 북미정상회담 출장에 대해서도 쓰게 되면 대조해 더욱 적나라하게 쓸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중간중간 추가되거나 변경되는 사소한 일정들이 있었지만(다시 한 번 이 부분에서 두번쨰 출장지인 베트남을 떠올리게 된다.), 돌이켜보건데 출장 자체에 대한 기억을 훼손할 정돈 아니었다.
제작을 마치고 날짜별로 흩어져있는 취재 분량을 한데모아 제작된 리포트를 보니 결과적으로 보람이 있었다. (물론 취재량에 비해 2분 안팎의 뉴스 리포트는 짧다고 느끼긴 했다.) 1월 1일 드디어 3원 생중계와 제작 아이템들이 보도 되던 날, 선배들과 임시정부 청사 매표소에 모여 앉아 휴대폰 on air로 모니터를 하던 순간도 떠오른다. 하루하루는 비극이었는데, 멀리서 보니 순간순간이 희극이었다.
아주 가끔, 문득, 상해 출장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아, 사스마와리 영상기자에게 '정해진 일정'의 달콤함이란 !
해당 리포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