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g '사랑이' 체중 20배 쑥쑥…기적 계속되려면
-취재기자
Q. (아이를) 키워보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이 어떤건지?
-이른둥이 아이 母
A. 1순위는 경제적인 것 그리고 2순위는, 주위에서 너무 모르세요 …
아이한테 어떤식으로 접근해야되는건지 모르시고 옛날만 생각해서
"그래도 지금은 살았으니까 다 됐지 뭐" 이런거라든지 …
어쨌든 그런거 …
부끄러운 얘기로 시작해야겠다
취재의뢰서 제목에 '이른둥이'라는 단어를 봤을 때
무슨 뜻인지 몰랐다.
취재장소로 향하는 차 안에서 취재기자 선배와 아이템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알게됐다.
흔히는 '미숙아'라고 부르는 아이들.
엄마의 자궁에서 10개월을 채 버티지 못하고
정상적인 범주의 무게를 채우지 못한채 일찍 세상에 나온 아이들.
그들을 '이른둥이'라고 불렀다.
그 극단적인 사례가 작년 국내에서 가장 작고 가장 가벼운 몸으로 태어난 사랑이이다.
302g …
2018년 1월 25일, 24주 5일만에 사랑이가 태어나던 날
병원에는 여러 언론사의 취재진들이 장사진을 이뤘다고 한다.
6월 24일 내가 만났던 아이는 또다른 이른둥이 이준이.
그는 약 10여년전 750g의 몸으로 태어났다.
이 글을 쓰며 750g이 어떤 무게인지 비교해보고 싶어 네이버에 750g이라고 쳐봤더니
한 팩의 홍삼캔디 광고글이 나왔고
소금750g은 종이컵으로 몇 컵이냐는 지식in질문에
3컵 분량의 소금이 750g이라는 답변이 보였다.
한 팩의 사탕같은 무게로 이준이는 세상에 나왔다.
그리고 그는 올해 열살이 됐다.
이준이를 만난건 의정부의 한 특수체육교실.
뇌병변장애로 인해 신체활동이 원활하지 않은 이준이는
이곳에서 특수교사와 일대일로 수업을 받았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 카메라를 내려놓고 먼저 이준이와 대화를 나눴다.
이준이의 대답을 옆에서 아이 엄마가 되풀이 해줘야 알아들을 수 있을만큼
아이는 언어능력도 떨어져있었다.
그래도 "이름이 뭐야?", "이준이"
"이준이는 몇살이야?", "(양손을 펴보이며) 열 살"
"이준이 학교에는 친구가 몇명이나 있어?", "백 명!"과 같은
대화를 이어나갔다.
대화 중간중간 이준이는 제보다 훨씬 키가 큰 내 양손을 잡고는 펄쩍 펄쩍 제자리 뛰기를 했다.
"하나, 둘, 셋!"에 맞춰 점프를 하면
그에 맞춰 힘껏 들어올려 줬더니 이준이는 까무러치게 좋아했다.
"힘센 삼촌이 오니까 이준이가 신났네" 하던 이준이의 엄마는
이준이가 끊임없이 흥분하며 좋아하자 우리를 자제시켰다. (쩝..)
수업은 특별할게 없었다.
준비운동을 마치고 고깔을 따라 걷고 뛰고
일정한 간격으로 늘어선 작대기 사이사이로 두발을 모아 뛰고,
크고 작은 공들을 선생님과 주고 받았다.
그런데 이준이에겐 그 움직인들이 전혀 쉽지가 않았다.
선생님 말로는 이준이가 양 발을 모아 점프한 뒤 착지하는 동작을 할 수 있게 된지가
며칠되지 않았다고 했다.
양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는 것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었다고.
지나치게 가벼운 무게로 태어난 그는 양 발이 모두 땅에서 떨어지면
자칫 날아가버리게 될까 무서웠던걸까.
수업 전 내 손을 붙잡고 깡총깡총 뛰었던게
그저 신이 난 표현이었다기보다
새로이 터득한 동작에 대한 일종의 뿌듯한 자랑같은 것이었나보다.
이준이는 수업 중간중간 나와 제 몸뚱이만한 카메라에 관심을 보였다.
다른 아이들보다도 집중이 어려운 그에게 새로운 사람과 물체는
한눈을 팔기에 아주 좋은 '꺼리'였다.
수업을 잘 받고 나면 카메라를 만져보게 해주겠다는 말로 달래며
촬영을 진행했다.
수업이 끝나고 이준이는 함께 집에 가자고 했다.
"응 이준이네 집에 같이 갈거야" 대답에 이준이는 그제야 안심을 하고는
차에 올랐다.
집에서는 이준이 엄마를 인터뷰 한 후
이준이와 이준이 엄마가 함께 공부하는 모습을 스케치했다.
태블릿 pc에서 나오는 안내에 따라 책에 스티커를 붙이고 하는 등의 학습이었다.
이준이는 자기를 놔두고 엄마랑만 인터뷰를 하던 시간을 잘 기다리지 못했는데
자신과 엄마를 함께 촬영하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필요한 분량의 스케치는 진작에 끝났지만
이준이가 한 챕터의 공부를 끝낼 때까지 나는 열심히 찍는 척을 하고 있었다.
취재를 모두 마치고 간다고 하자 이준이는 달려와 나를 안아줬다.
가지말라거나 카메라를 놓고 가라고 떼를 쓰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준이는 딱 그정도로 정이 많은 아이였고, 딱 그정도로 의젓한 아이였다.
750g으로 태어났지만
이제는 내가 힘껏 들어올려 주려면 꽤 많은 힘이 필요할만큼
무거워진 이준이.
이준이가 가끔 생각날 것 같다.
-이른둥이 아이 母
A. 그리고 미숙아를 제가 낳아보니까 주위에서도 보니까
미숙아가 남의 얘기가 아니더라구요
(미숙아의 숫자가) 지금 점점 커지고 많아지고
미숙아를 낳을 수 있는 범위는 굉장히 크더라구요.
어디가 아팠다든지 자궁에 이상이 있다든지 하다못해 이빨에 염증이라든지 그런거요 …
저같이 첫짼데 개월수가 안됐는데 진통이 진통인줄 모르고 있다가 병원에 가는
이런걸 사전에 방지를 한다면
미숙아의 비율이라든지 미숙아의 위험성 같은건 좀 현저히 줄지 않을까 생각을 해요.
이준이와 같은 이른둥이를 키우는데에 가장 중요한건 경제력과 정보력이었다.
미숙아가 태어나면 병원에 입원한채로
아이가 '살아나가'는 데 까지는 일정 부분 지원이 있지만
그 이후 아이와 가족의 삶은 그 누구도 지원해주거나 가르쳐주지 않는다.
어떤 치료와 교육이 그 아이에게 필요한지, 필요한 그것들을 어디서 어떻게 받을 수 있는지는
오롯이 아이와 가족들의 몫이다.
그리고 물론, 언제나, 그것들을 위한 '돈'.
이름있는 브랜드의 새로 지은 아파트.
이준이의 집에 가보았을 때 나는 은연중에
'이준이네는 그나마 다행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이보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가정들의 이른둥이는, 장애 아동들은
어떤 교육과 치료를 받으며 자랄까 하는 생각.
그러다 이내
어떠한 집에 사는 어떤 아이더라도
그리고 그 아이가 어떻게 태어났더라도
그들이 '잘' 자랄 수 있는 나라가 되기를 바랐다.
바란다.
해당 리포트 ;
http://imnews.imbc.com//replay/2019/nwdesk/article/5383131_24634.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