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박령을 만나다

와라세차장 스토리 8

by 로제타

오늘만 벌써 다섯 명이다. 이 세차장에 들어올 때만 해도 자신들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저 셀프라 이름 붙여진 세차장에서 혼자, 또는 일행과 조용히 차를 청소하고 떠나게 될 줄 알았다.


공포영화를 몇 편 보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거나,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허둥대거나,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인물들이 제일 먼저 희생되기 마련이다. 이들은 손쉬운 먹잇감이며 순식간에 미혹된다. 이 세차장에서 그들은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경험을 기어이 하게 되고야 만다.


'지박령(地縛靈)이란, 땅에 얽매여 있는 영혼이라는 뜻'

출처: 네이버 국어사전


스스로를 지박령이라 칭하는 세차장 귀신은 오늘도 어김없이 한쪽 구석에서 자신의 차를 닦고 있다. 그는 이미 이 세차장의 자연스러운 풍경인 듯 전혀 두드러지지 않아서 왔다가는 손님들은 그를 의식하지 못한다. 지하철 건너편 좌석에 앉아있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던 귀신이 나를 노려보고 있는 것도 모른 채 휴대폰 화면만 쳐다보고 있었을 나를 생각해보면 오싹한 기분이 든다.


흰색 벤츠가 5번 베이 오토버블 세차기로 들어갔다. 며칠 전 잠깐 내린 비로 인해 군데군데 먼지 얼룩이 묻었지만 대체로 광택은 잘 살아있다. 운전석 쪽에서 스커트를 입은 날씬한 아가씨가 내린다. 드라이존에서 차를 닦던 젊은 남자가 슬쩍 쳐다본다. 잠시 뒤 조수석 쪽에서 엄마로 추정되는 중년의 여성이 내린다.


둘은 세차기를 쳐다보며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는다. 젊은 여자가 어떤 말을 했고, 중년 여성은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다. 이번에는 반대로 중년 여성이 무슨 말을 했고, 아가씨는 아니란 듯 고개를 저었다. 둘의 의견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 듯 보였다. 둘의 행동은 주변에서 세차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무슨 문제 또는 도와줄 일이 있나 싶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들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갑자기 내 뒤에 누가 서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섬뜩한 마음에 고개를 돌려보니 어느새 지박령이 따라붙었다.


"아! 결국 이 두 모녀는 앞으로 힘든 길을 가게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어쩌면 이 세차장에 온 것을 후회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편했던 세차의 기억을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한편으로 든 생각은 이 또한 그들의 선택이 될 터이니 앞으로의 일은 그들에게 맡겨두기로 했다.


그들은 그동안 자신의 차를 손세차에 맡겨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엔 딸이 가까운 곳에 셀프세차장이 생겼으니 한번 가보자고 해서 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엄마는 굳이 잘할 줄도 모르는 세차를 직접 하는 것이 마뜩지 않아서 그 둘은 의견을 맞추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때 벤츠를 유심히 살피던 세귀(세차장 귀신의 준말)가 보닛 표면을 가리키면서 여기저기 잔흠집, 스월들이 많네요라고 지적했다. 그러자 엄마가 기분이 상했는지 한마디 쏘아붙인다. "누구신지는 모르겠지만 이 차는요! 새 차 뽑은 뒤로 계속 손세차에만 맡겨왔는데요!"


세차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도 해박하고 진정으로 셀프세차인을 아끼는 세귀가 찬찬히 설명해준다. "모두 그렇지는 않지만 삼사 만원 받고 손세차해주시는 분들은 같은 수건으로 이 차 닦고 저 차 닦고, 어저 쓰던 수건 오늘 쓰고 또 내일 쓰고 하는 경우들이 있어요. 여기 보시는 이 잔흠집들은 손세차 과정에서 생긴 것이지요."


그제야 엄마는 고개를 끄덕한다. 이제는 어쩔 수 없다. 곧 저 두 모녀는 세귀가 알려주는 셀프세차의 마력에 푹 빠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세귀는 예비 세차하기 전 타이어 및 휠 클리너를 뿌려준다. 클리너 액이 타이어 틈새에 파고든 철분 및 오물을 녹여 빼내는 약 일이 분 동안 기초적인 세차 지식을 알려준다. 귀를 쫑긋하게 해서 듣는 모녀를 남겨두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들은 물과 거품을 이용한 외부세차를 마치고 드라잉 존으로 이동한다. 멀리서 지켜보니 세귀와 함께하면서 그들은 뭐가 즐거운지 웃음소리가 이곳까지 들린다. 딸은 웃겨서 뒤로 넘어간다. 세귀의 마력은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상기된 얼굴의 두 모녀가 들어왔다. 둘 다 얼굴이 약간 발갛게 달아오른 듯, 마치 화난 사람처럼 보였다. "혹시 또 무슨 문제가 생겼던 건 아닐까?"


걱정과는 달리 모녀는 엔도르핀이 쏟아져 나오는 매우 즐거운 상태였다. "사장님, 목이 말라서 그런데 음료수 팔아요?" "아직 자판기가 안 들어왔는데.. 죄송합니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캔맥주가 보인다. "혹시 저... 이걸로라도 목을 축이실래요?" 이 어머니 반색을 하시며, "아이고 내가 맥주 좋아하는지 어찌 알고.. 여기서 한 모금 해도 되지요?"


딸이 눈을 흘긴다. "알았다. 이따 집에 가서 먹으마! 호호호"하면서 크게 웃는다

옆에서 구경하던 이들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진다. 이 모녀는 다음부터 손세차 안 맡기고 자기들이 직접 하겠노라며 고맙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세차장을 떠난다. 아니다. 바로 떠나지 못한다. 세차장을 나서다 말고 PET병 하나를 들고 내려 세귀에게 준다. 너무 고맙다며 귀한 거라고!!!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아쉽게 떠났다.


셀귀가 병을 받아 들고 왔다. "이게 고로쇠 수액을 몇 번이나 정제한 원액이라네요. 사장님도 같이 드셔 봐요."


진한 원액을 물에 희석해 같이 한잔을 마셨다. 달싹하고 진한 향이 입속으로 퍼진다. 자극적이지 않고 속이 편안해지는 맛이다.


이런 게 사는 맛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벤츠 모녀가 주고간 고로쇠 진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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