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내 인생에 내비게이션에 있다면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차에서 이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
동공은 확대되고 가슴은 쿵쾅쿵쾅 거리고 그래서 어디로 가라고 어떻게 가라고 빨리 말해줘
그녀를 보채게 된다. (아... 아직 난 운전면허증이 없다. 남편이 운전할 때...)
자, 우리를 매번 가슴 떨리게 하는 이 문장을 잘 살펴보자.
가만히 들어보면 목적지를 이탈한 게 아니라 경로를 이탈했다고 하는 거다.
목적지를 이탈한 게 아닌데 왜 우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렇게 불안해하는 걸까.
만약 내 인생에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매번 울렸을 것이다.
도대체 몇 번째 경로 이탈이냐며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경로 이탈을 목적지 이탈로 잘 못 받아들여 불안한 내면을 더욱 불안하게 만든다.
사실 제 3자의 목소리가 아닌, 내면의 나 자신의 목소리인 건데 말이다.
내 인생에서 가장 굵직하게 가상의 경로를 이탈한 경험은 네 번이다.
첫 번째는 졸업 직전 미국 유학을 가고 싶어 취업 준비 대신 GRE 시험을 본 것 (심지어 일본 가서 봄. 덕분에 어휘는 정말 많이 늘었다...)
두 번째는 첫 번째 직장을 1년 반 만에 나온 것 (여길 나온 건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 칭찬해)
세 번째는 27살에 대학원에 간 것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가장 행복했던 시절)
네 번째는 4년 차 UX 기획자에서 번역가로 직업을 틀려는 지금 (카오스 그 자체, 매일 스스로에게 묻는다. 정말 괜찮니?)
이렇게 다른 길로 샐(?) 때 앞뒤 안 보고 했지만 중간중간 들려오는 마음의 소리는 늘 귓가를 간지럽혔다.
경로를 이탈했다고... 좀 그냥 살 수 없어? 그냥 좀 편하게 살 수 없냐고.
그럴 때마다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정해진 길이 있긴 한 거야? 라며 스스로 다독여 왔다.
이런 나의 불안함은 어디서 온 것인지를 고민하던 와중, 유시민 작가의 <유럽 도시 기행> 책에서 답을 찾았다.
경로 의존성 : 우연히 어떤 길에 들어서고 나면 더 좋은 길을 알아도 가던 길을 벗어나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경로 의존성'을 무시했기 때문에 불안했던 거다.
완전한 무시가 아니라, 끊임없이 의심하며 고민했고 지금도 현재 진행 중이다. 길을 가다가 왼쪽으로 가면 완전히 다른 길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이전에 걸었던 길로 다시 합류할 수 있는 길이 나올 땐 정말 미칠 것 같다.
특히 한 직장이나 한 커리어에 10년 이상 몸담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들을 보면 항상 부럽다를 연달아 외치지만
어쩌겠는가
내 인생이 이렇게 된 건 내 성향 때문인 것을 누굴 탓하겠냐는 말이다.
목적지: 하고 싶은 일 하기
어쨌든 나의 목적지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하고 싶은 게 그때그때 다르다는 게 문제이지만 말이다.
<유럽 도시 기행>을 읽은 후, 원인을 알고 나니 덜 불안해졌다. 그리고 내가 이렇게 살아감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됐다.
그래, 멀리 돌아가더라도 목적지를 알고 있으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