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토론토 공항은 추웠다.
캐나다는 호락호락한 곳이 아니었다.
캐나다는 G7에 들어가는 경제 규모가 큰 나라이면서 동시에 이민자에게 기회가 많이 열려있는 곳이었다. 과거형으로 굳이 쓰는 이유는 말 그대로 과거형이기 때문이다. 타지에서 캐나다에 오기를 원하는 유학생들이나 이민자들에게 호의적이었던 캐나다는 2024년 상반기 부터 '호락호락 하지 않은' 나라도 바뀌었다. 그때가 바로 우리 가족이 캐나다 일년 살이를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다. 하필.
관문 1. 비자는 언제 나와?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의 플랜을 가지고 캐나다로 들어갈 계획을 세운다. 잠깐의 여행이라면, 한 두달 정도라면 비자 면제 협정국인 한국인은 ETA라고 불리는 전자여행허가만 신청하면 된다. 특별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빠른 속도로 발급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처럼 6개월 이상, 1년 또는 그 이상을 머물러야 하는 경우엔 그에 합당한 비자가 필요하다. 남편은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 있는 컬리지에 입학 허가를 받은 터라 남편의 학업 비자를 진행했다. 캐나다는 비자와 관련된 승인 레터를 받으면 서류들을 들고 공항에 입국 할 때 비자 심사와 함께 종이로 된 실물 비자를 받는 시스템이었다.
예전에는 학교의 입학 허가 서류와 각종 개인적 서류를 내면 무리 없이 스터디퍼밋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캐나다의 이민 정책이 바뀌면서 입학 허가서와 함께 주정부에서 발행하는 국제 학생 쿼터와 관련된 PAL이라고 하는 서류를 한장 더 받아야 했다. 이미 입학 허가서를 받았으니 그 서류를 받는 데는 문제가 없을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시행 첫 해라 주정부의 공식 지침이 자꾸 늦어지고 있었고 그에 따라 학교에서도 그 놈의 PAL이라고 하는 서류를 발급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4월에 신청한 서류는 5월 중순이 되어서야 나왔고 그제서야 학업 비자를 신청했다. 그리고 그 비자는 6월 중순이 되어서야 우리에게 메일로 왔다.
2월달에 처음 이야기를 꺼내고 그 때부터 부랴부랴 준비했기에 더 오랜 기간 준비한 분들에 비하면 빠른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 우리는 이번기회가 아니면 안된다는 심정 때문인지 하루하루 마음이 바싹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걱정인형인 나는 유학 관련 커뮤니티에서 허가가 반려되었다거나, 우리보다 더 먼저 넣으신 분들도 아직 못받아서 출국 계획을 바꿔야 된다는 글을 보며 절망 회로를 돌리기도 했다는 건 안비밀이다.
관문 2. 왜 엄마 아빠 마음대로 정해?!
두번째 난관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터졌다. 앞서 여러번 언급했던 캐나다 정부의 유학생 관련 정책 변화로 우리는 혹시나 학업 비자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는 확실히 학업 비자가 나오면 말하기로 했다. 물론 눈치가 빠르고 귀가 밝은 딸은 엄마 아빠가 뭔가 작당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지만, 아마 가끔 가는 여행 정도, 조금 긴 여행을 가려나보다 정도로만 생각했을 터였다.
" 왜 우리 일을 엄마 아빠 맘대로 결정해?!"
엄마 아빠가 하는 일에 큰 툴툴거림 없이 늘 잘 따라주던 첫째가 눈물을 왈칵 쏟으며 원망의 말을 내뱉을 때 우리 부부는 '아차' 싶었다. 초등학교 5학년. 이제 슬 사춘기도 시작하고,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노는데 얼마나 재밌는지 깨달아버린 아이의 현재를 간과했던 것이었다.
친구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활동도 제법 열심히 해서 내년에 6학년이 되면 파트장을 해보겠다고 했었는데, 그리고 6학년때 친구랑 수학여행도 갈건데 왜 엄빠 마음대로 하냐고 우리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 부었다.
차라리 미리 말을 해서 의향을 물어봤어야 했나 싶었다. 우리 두 사람의 오래된 '일년 휴가'의 꿈은 우리 두 사람의 것이었지 거기에 우리 아이들은 당연히 따라오는 별책 부록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이미 정해진 일, 엎지러진 물이라 아이를 어르고 달랬다. 사탕발림이라도 좋으니 우리의 꾐에 넘어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딱 일년만 있다가 오자고, 그럼 친구들이랑 졸업식도 할 수 있고, 오케스트라 마지막 연주회도 다녀와서 하면 되지 않느냐고 이야기하고는 이번 여행의 의미, 좋은 점, 그리고 주워들은 캐나다 학교 이야기를 해주었다.
다행히 며칠 후부터는 군말없이 따라주었다. 물론 자발적인 동조라기 보다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체념한 것일테지만, 어느 순간 부터는 조금 기대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물론 우리 생각이다.
3학년인 우리 둘째는 큰 눈으로 마냥 웃으며 곰을 볼 수 있냐고 물었다.
다행이었다.
관문 3. 첫날 느낀 타향의 서러움
그래서 우리가 일년 살이를 하게 된 도시는 캐나다의 수도인 오타와였다. 사람들이 너무 많은 벤쿠버나 토론토는 가고 싶지 않았고, 마침 오타와에 남편이 다닐 학교도 있어서 가벼운 마음으로 그곳으로 정했다. 대도시는 아니지만 인프라가 갖춰져있다는 주변의 이야기를 듣고서.
모든 준비를 마치고 집에서 인천공항까지 그리고 인천공항에서 토론토 공항까지 20시간의 이동 후에 간신히 캐나다에 발을 디뎠다. 우리는 일년을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그냥 입국 심사를 받는 것이 아닌 이민국 심사를 따로 받아야 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유학원에서 알려준 대로 이민국을 알리는 표지판을 찾아서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때까지는 몰랐다. 단순 여행이 아닌 장기로 머무는 사람들에게 이민국이 얼마나 냉정한 곳인지 말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우리가 도착한 8월 말은 이민 관련 분위기가 험악할 때였다. 이민국 심사를 통해 남편의 학업 비자를 받고, 우리는 방문객 자격(visitor record)를 받을 생각이었다. 남편의 서류는 다 되어있었고, 늘 학업 비자로 온 가족이 방문하면 학업 비자 대상자의 기간에 맞추어 방문 자격을 부여해주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착각했다.
이민국 심사장에는 조용하고 어색한 침묵이 가득차 있었다. 그 공기 속에 마치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공손한 자세로 사람들이 저마다 서류 뭉치를 한가득 들고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씩씩하고 설렜던 발걸음은 어느새 의기소침한 잰 걸음으로 바뀌고, 심장이 이유없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류도 다 챙겨왔고, 탈 날 거 없으니 괜찮아.'
스스로 다짐을 하는 사이 우리 앞에 있는 이민국 직원이 손을 흔들며 자신에게 오라고 했다. 짧게 깍은 금발머리의 그는 시작부터 굉장히 고압적이고 사무적인 태도였다. 마치 철야근무를 한 사람처럼. 남편과 나는 취조를 받는 사람 처럼 그 앞에 섰다. 그는 우리가 내민 학업 비자 승인서를 한참 바라보더니 한국에서 남편의 직업이 뭔지, 왜 이 전공을 공부하러 왔는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고는 남편의 전공은 1월에 시작하고, 그전까지 어학 코스를 완료해야 전공을 시작할 수 있으니 어학 코스 +3개월까지만, 그러니 4월까지만 비자를 발급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어학 끝나고 비자 연장을 신청하면 되니 문제 될거 없다고 했다. 무난히 1년짜리 비자를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우리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리였다. 무슨 소리냐고, 캐나다 정부가 발행한 비자 승인서에는 2025년 10월 말까지라고, 그대로 비자를 달라고 하니, 어학 후 전공 시작이기 때문에 결정할 권한은 자기에게 있다며, 그 허가 서류는 '쓰레기'라고 했다. 정확히 우리에게 'garbage'라고 말했다. 기분 나쁘게 서류를 흔들어 대며 비자 서류를 가지고 가라고 재촉했다. 그러면서 '너희 일하면 안돼, 불법이야.' 라고 덧붙였다. 순식간에 불법체류자가 된 기분이었다. 뭔가 모욕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타향살이가 이런 것일까. 아쉬운 쪽은 우리여서 더 그런가. 그 더운 8월, 이민국을 나서면서 나는 마치 한겨울에 들판에 서 있는 것 처럼 온몸이 덜덜 떨렸다. 대한민국 여권파워를 느끼며 늘 어느 곳에 여행을 가든 무비자로, 웰컴이라는 소리만 들으며 바로 통과했던 우리 가족이었는데 캐나다에 들어가는 첫 순간, 그 첫인상이 너무나 쓰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토론토에 마중나온 지인에게 그 서러움을 한껏 털어놓으니 원래 토론토 이민국에 이상한 직원들이 많다며 요즘 더 그런거 같다고 함게 욕을 해주었다. 그러고나니 좀 마음이 풀렸다.
어쨌거나, 큰 관문 세개를 넘어 우리는 캐나다 땅을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