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차면 좋으련만(下)

by 기미닉

20대 후반, 어쩌다 대학교 졸업(식)보다 취업을 먼저 했다. 출근 3달 만에 ‘식단 조절과 운동 없이 체중 8kg 감량’이라는 아무도 시키지 않은 성과를 냈고, 그에 대한 성과보고서도 제출했다. 내용으론 세대를 아우르는 명문을 담았다.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하고자 하오니 이를 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그 뒤로 딱 한 달 더 일하는 동안 2kg이 추가로 빠졌다.)

유치원 입학 후 처음으로 사라진 ‘소속’의 자리엔 당시 나로선 매우 커 보였던 약간의 돈과 감당이 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남겨져있었다.

미처 짐작하지 못한 채 이틀, 삼일, 일주일 같은 하루를 보내다 기어이 미쳤던 걸까.

일자리는 언제든 구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간과 돈이 함께 있는 때는 또 오지 않을 같았다. (결과적으로 둘 다 틀렸다. 아까 말한 신기 어디 갔냐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잖습니까. 네, 그런 겁니다.) 그렇게 출근 대신 출국을 했다.

‘물 한 병’(a bottle of water)에 취하는 영국으로, 맥주에 취하는 게 아니라는 독일로.


beer4.jpg Berlin Museum Island, Pentax Mesuper ⓒ기미닉


기꺼이 놀라기 위해 여행을 간다지만 독일에선 그 순간이 예상보다 너무 빨리, 그리고 많이 왔다.

테겔 공항에 도착해 C를 기다렸다.

그의 가족이 이민을 떠난 뒤로 못 봤으니 8년여 만에 재회가 이뤄질 차례였다.

극적 상봉의 기준인 ’TV는 뭐시기를 싣고‘적 의례에 따라 입국게이트가 열리고, 두리번거리며 문을 나서고, 마침내 C와 눈이 마주쳤을 때 감격에 겨워 소리를 지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감격은커녕 대합실에서 두 번이나 마주치고도 긴가민가해서 세 번째에야 “어?!‘라며 한국어도 독일어도 아닌 무언가가 인사를 대신했다.

이따금 SNS에 올라온 사진을 보긴 했었다. 하지만 그를 실제로 보니 사진엔 오롯이 담기지 못한 것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키가 20cm 넘게 자라서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 변성기를 지나 '앳됨'이란 흔적조차 없어진 목소리 같은 것들. 그것들은 독일에서의 첫 기억을 반가움, 동시에 그만큼의 당황으로 만들었다.


그의 변화가 그러했듯, 이후로도 난 C에게 당연해진 것들에 줄곧 놀랐다. 그중에서도 맥주를 마신 어떤 곳은 여러모로 신기했다.

‘술집이 특별해봤자 술집’이라고? 맞다. 그런데 술집인데 술집이 아니라면? 이건 좀 신기할 만하지 않나?


베를린 가이드가 되어준 C의 소개에 따르면 '전문 술집은 아니고, 사설 기숙사 건물에서 맥주를 직접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왠지 밀주를 팔 것 같은 설명에 걸맞게 위치도 음성적이었다. 따분할 정도로 조용한 주택가에서 굴다리처럼 생긴 짧은 통로를 지나자 나타난 웬 아파트 단지 내 공터처럼 생긴 곳이 나타났고, 거기엔 맥주 마시는 사람들이 차있었다.


C와 갔던 베를린 어딘가의 술집(?) 외부. Pentax Mesuper ⓒ기미닉

안내 직원 따윈 없어서 아무 빈 테이블 앉았다. 메뉴판도 없었다. ‘뭐지 여긴’

하지만 상관없었다. C가 있었으니까. 과연 현지인은 위풍당당했다.


- 내가 알아서 사 올게
- 응 그래.


그는 잠시 뒤 양손에 맥주잔 하나씩을 들고 돌아와 말했다.

- 음식이 다 떨어졌대
- 응...?

내 상식 밖의 일이었다. 술집에 술 떨어져서 알바생이 옆 가게에서 빌려왔단 말은 들어봤어도, 전 메뉴가 못 나가는데 술 파는 가게가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다. 와중에 C는 너무도 태연했는데,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됐다.

그 어느 테이블에도 잔뜩 졸아든 부대찌개 혹은 뻥튀기의 대체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모든 사람이 말 그대로 깡맥주를 들이키고 있었다.

‘세상에...’


"이 양반들은 안주로 뭐 먹어?"

C는 부러 인상을 찡그리며 고민하는 척했다.

“음...맥주?”

“응?”

“그러고 보니까 이상하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석회질이 어쩌고 하는 이유로 물 대신 맥주를 마신다는 썰을 듣긴 했다만 농담인 줄 알았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농담이든 문화 차이든 그날 본 사람들은 맥주를 물처럼, 동시에 안주처럼 마시고 있었다.

맥주 한 모금, 다시 맥주 한 모금, 또 맥주 한 모금.

오래전 B의 집에서 배운 교훈이 되살아났다.

‘맥주는 술이다, 나한테만.’


그곳의 실내 공간 ⓒ기미닉


여행자 버프였는지 무엇 때문인지 과자 쪼가리 하나 없이 맥주는 평소 주량을 넘길 때까지 잘도 넘어갔다. 아무 탈 없이 C의 집으로 돌아갔고, 그날 저녁 C의 형인 D와 셋이 앉아 (또!!!) 맥주를 앞에 두고 그간의 회포를 풀었다.

놀람의 연속이었던 그날 밤, 내가 알지 못했던 해묵은 이야기에 연신 놀랐다. 그리고, 맥주가 맛있어서 놀랐다.

갈증이 없어도, 감미료가 첨가되지 않아도, 황금비율로 무언가를 섞지 않아도 맥주가 맛있을 수 있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다.

한국에 돌아와 뒤늦게 그날 마신 맥주가 무엇이었는지 D에게 물었지만 기억하지 못했다. 그 뒤로 한동안 백화점과 마트 주류 코너를 전전하며 독일 맥주라면 보이는 족족 집어왔다.

당연하게도 그 제품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모른다. 아마 영영 알 수 없을 거다. 우연히 그것을 다시 구한다 한들 정말 그게 맞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날의 술을 찾고 싶다는 망상을 아직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괜찮다.

황당한 수색을 하다 취향을 발견했으니까.

구운 빵 냄새가 나는 맥주, 맛을 못 느낄 정도로 인공적인 꽃향기가 나는 맥주... 이런저런 특징들로 첫 경험부터 맘에 든 것도, 학습하듯 반복할수록 좋아진 것도, 몇 번의 시도 끝에 다신 안 먹겠다고 다짐하게 된 것까지.

D가 품명을 알려줬다면 그 모든 걸 '그냥' 맥주로 여기고 지나쳤을 뻔했다. 휴...


이젠 그럭저럭 다양하게 즐겨봤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모르는 맛이 너무 많다. 그뿐인가. 요즘 편의점 맥주 냉장고 앞에 서면 껌, 라면은 애교고 항공사, 심지어 구두약 회사(!!!)까지 도무지 맛이 상상되지 않는 이름을 내건 신상이 계속 출시되는 통에 눈도 손도 갈 곳을 잃는다.(와중에 구두약 회사표 두 에일은 달달한 게 간단히 마시기에 좋았다지... 어째서!!!)

그러니 기꺼이 마셔볼밖에.

혹시 정말 맘에 들 수도 있으니까. 맘에 들지 않으면 다시 마시지 않을 이유가 생기니까.

그렇게 내 취향을 찾아갈 테니.


더딘 속도가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맥주 따윈 술이 아니라는 사람이 못되어 매일 마시지도, 혼자서는 세 번째 캔을 따지도 않으니 도대체 언제 다 알 수 있을는지...

일단 되는대로 마셔보는 중이다.

그러다 어느덧 불콰해진 얼굴이 거울에 비치면 괜스레 심술을 부리면서.


‘그럼 맥주가 보리로 만든 술이지 보리차냐’고, ‘내게도 보리차였으면 좋으련만’이라고.



22.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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