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동안 벼르고 별렀던 일본 여행이었건만 주요 계획은 모두 뻐그러졌다.
4박 5일의 여정을 얼마나 치밀하게 짰었냐면...
1. 2일차 오전 : 쿠마몬 스퀘어_쿠마몬 서프라이즈 구경
2. 2일차 저녁 : 말고기 육회에 니혼슈때리기
3. 4일차 저녁 : 추천받은 이자카야 가기
저게 다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는데, 찾아갈 지역들에 관해 미리 찾아본 게 딱 저만큼이었다.
여행 계획을 세울 때 일정을 세세하게 짜지 않는 편이긴 하다. 작정하고 한량질 좀 해보겠다며 출국까지 해놓고선 시간에 쫓기는 게 싫은 탓이다. 그리고 뭐... 시간표를 짠다고 해서 예상과 똑같이 흘러가는 것도 아니잖나. 국빈이 되어보지 못해서 늘 착륙하자마자 변수에 맞닥뜨리곤 했다.
비행기가 멈추면 비상탈출 버튼이라도 눌린 듯 수백 명이 동시에 벌떡 일어나 짐을 챙긴다. 빨리 이동해서 입국심사를 마치고 1분 1초라도 더 효율적으로 즐기겠다는 결연한 눈빛들을 볼 수 있다. ‘K-부지런’을 목격하는 순간이다.(세계 어디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방면에서 내가 본 중엔 튀르키예인이 최고였다. 이들은 바퀴가 땅에 닿는 순간부터 일어난다. 한국인을 ‘빨리빨리’로 놀라게 하다니... 과연 형제의 나라이자 유목민의 후예다운 속도다!)
그런데, 비행기에서 가장 먼저 내린다 한들 수하물 찾는 곳에서 내 캐리어가 제일 늦게 나올지 어떻게 아나. 또, 도심으로 들어가는 데 신호마다 다 걸릴 지는 어떻게 아나? 내 경우엔 시간표가 세세해질수록 풍경보다 시계를 더 열심히 보고 있었다. ‘24분에 타면 성공, 28분에 타면 망함.’ 매일 출근길에서 느끼는 조마조마함을 굳이 돈 들여가며 느끼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몇 번의 경험 끝에 생긴 버릇은 ‘가능한 한 계획을 세우지 말자’였다. 이런 이유로 보통 오전에 한 곳, 오후에 한곳 내지 두 곳을 행선지로 정한다. 교외로 빠지는 경우가 있다면 아예 하루 또는 N박을 하기로 작정한다.
웬걸, ‘이 정도야...’라는 생각이 틀릴 거라곤 미처 알지 못했다.
22.11.26(토)
✓ 계획1 : 포기
구태여 봐야 할 것 같지 않았다.
쿠마몬스퀘어는 별도로 공연무대까지 갖춘 기념품샵이래서 조금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니 인근 대형 쇼핑몰의 그것보다 작았다. 와중에 단일 페르소나로 채워진 공간이다 보니 사방팔방 쿠마몬이었다.
한쪽 벽에선 왠지 '쿠마몬과 함께하는 뽀뽀뽀 체조'일 것 같은 영상이 반복재생되고 있었고, 가게 한 귀퉁이엔 '과장 쿠마몬이라는 명패가 올려진 쿠마몬 사무실까지 있었다.
지역민들이 이 캐릭터에 진심이라는 것도 잘 알 수 있었지만...공급과잉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었다.
기껏 왔으니 구경이나 하자는 맘으로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15분쯤 지났을까, 예정 시간이 다 되자 상점 직원이 뭐라 뭐라 소리쳤다. '아 이제 보는 건가!!!'하고 있는데 앉아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밖으로 나갔다. 얼마 안 되어 관객석엔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던 백인 커플 한 쌍과 나만 남았다.
뭔가 아니구나 싶어 나가보니 문 앞에 사람들이 바글거렸고 그들 손엔 은행 대기표 같은 쪽지가 쥐어져 있었다. 대기표는 어디서 챙긴 건지, 왜 그 곰탱이가 예정 시간에 나타나지 않은 것인지는 여태 모르겠지만, 일단 그 시간대에 내가 관객일 수 없다는 사실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가게 앞에 쓰인 시간표를 보니 다음 차례는 3시간 뒤,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곰탕이라도 끓여준다면 몰라, 돈만 있으면 백 마리고 만 마리고 찍어낼 수 있는 탈바가지 따위 재롱 좀 보겠다고 오전을 통째로 태워? 내가 왜?'
뒤도 안 보고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당시엔 합리적인 선택인 줄 알았는데 이제 와 돌아보니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그랬다면 애당초 그 모자란 짓을 하러 가지 않았어야지.
아무튼, 첫 계획부터 망했다.
✓ 계획2. 대실패.
그날 밤, 흐드러지게 담아 서빙된 말고기 사시미와 니혼슈는커녕 식탁조차 없었다. 편의점에서 산 닭다리 몇 조각이 든 비닐봉투, 작은 캔 맥주, 강가 벤치가 위의 것들을 대신했다. 분해서 부리게 된 청승이었다.(여기서 잠깐, 강가 벤치라고 해서 한강 치맥 같은 모습을 떠올리면 틀렸다. 구마모토성벽 아래 있는 데다 폭이 좁아 해자로 착각할 만큼 ‘천 같지만 강인 그런 강’이다. 궁금하면 “츠보이강”을 검색.)
지역특산물이라기에 바닷가 횟집마냥 가게 선택이 관건일 거라 생각했었다. 때문에 기껏 호텔 리셉션 직원에게 “가이드 북 안에 있는 곳 말고, 그쪽이 좋아하는 곳으로 추천해주세요”라고 물어 알아낸 곳으로 갔더니만... 문을 열기도 전에 퇴짜를 맞았다. 글을 알든 모르든 “오늘 자리 없음. 죄송”이 써진 걸 알법한 입간판이 서 있었다. 그 뒤로 한 열 번쯤은 이런 대화 아닌 대화가 오간 것 같다.
- 안녕하세요. 혼자예요. 식사 가능해요?
- 예약하셨어요?
- 아니요...
- 아!!! 죄송해요~ 오늘 만석이네요
- 괜찮아요...ㅎ
- @#@$#?!$%^(여기서부터 못 알아들음)
- 저기...죄송한데 저 일본어 못해요
- 아!!!! 어쩌구저쩌구(역시 못알아 들음)... 죄송합니다.
- 진짜 괜찮아요. 오케이! 빠이!!(꾸벅)
한 시간 넘도록 걷다 지쳐 결국 아무 술집에나 들어가기로 맘을 돌렸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오라질, 돈을 챙겨왔는데 왜 주문을 못 하니...예보와 달리 오늘은 날씨가 좋더니만...
편의점에서 요깃거리를 사 들고 호텔로 돌아가던 길, 목마르고 배고픈 탓도 있었지만 주말 밤답게 붉어진 얼굴로 떠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약이 올랐다. 그대로 맥주 한 캔을 따서 들고 다니다 주저앉은 곳이 강가 벤치였다.
그날, 난 3만보를 걸었다.
이틀 뒤, 계획 3 역시 '예약하셨나요?'라는 질문과 함께 시원하게 망했다.
기어이 싹 다 망해버렸다.
실패한 여행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예상이 엇나가던 순간들을 빼면 대체로 만족스러웠다. 게다가 뜻밖의 즐거움을 일정이 틀어진 덕에 만끽하기도 했다.
대화의 즐거움은 기대조차 하지 않고 짐을 싸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홀로 다니는 게 편해서다.
구글이 알려주는 길을 무시한 채 갑자기 아무 골목으로 들어가도, 우연히 본 풍경이 맘에 든다며 한 자리에서 한참을 멍때리고 있어도, 음식 생각이 안 난다는 이유로 10시간 넘게 공복이 되어도 눈치 보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혼자서 길도 잘 찾고, 남 신경 안 쓰고 밥도 술도 잘 먹는다. 딱히 아쉬움 못 느끼며 시간을 보내지만, 하루 내지 며칠씩이나 입을 닫고 있다 보면 이따금 대화가 고파지긴 한다. 어느 쪽이든 완벽하진 않지만, 일자 조율부터 컨디션까지 신경 쓰는 귀찮음보단 가끔의 외로움을 택해왔다. 그런데, 이번엔 말 상대가 생겼다.
노상에서 청승을 떨어댄 그다음 날, 끝끝내 말고기 사시미와 잔에 넘치게 따라주는 니혼슈까지 맛보기는 했다. 그 역시 녹록치 않았다. 아무리 내일이 월요일이라고해도 그렇지, 절반 이상의 가게가 휴무라니... 별점을 따질 상황이 못 됐다. 난 다음날 후쿠오카로 넘어가야하니까. 간판에 ‘바사시’라고 써있길래 바로 들어갔다. <쉬리>적 최민식과 똑닮은 사장님이 친절했고, 구마모토산 쌀로만 만들었다며 추천하신 니혼슈도 퍽 입에 맞았다. 하지만 정작 기대했던 말고기는 그저 그랬다. 접시를 비우자마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헛헛해서 2차로 갈 곳을 찾아 배회했다. 골목 몇 개를 지났어도 영업 중인 식당은 안보였고, 거리는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기시감이 들었다. ‘또 편의점인가...’
못내 아쉬워 터덜거리며 걷다 멀리서 웅성거리고 있는 무리에 눈이 끌렸다. 가까이 가보니 실내외에 놓인 스탠딩 테이블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일본과 코스타리카 월드컵‘ 경기가 막 시작된 참이었다. 본래 우리나라 경기도 안 볼만큼 스포츠에 관심이 없지만, 잠시 지켜보고 싶어졌다. 한국인으로서의 불순한 마음(이라고 쓰고 애국심이라고 포장해본다) 스멀스멀 올라왔기 때문이다. 주변의 이들과는 반응이 반대로 나올 수밖에 없어서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섰다. 슬쩍슬쩍 분위기나 보던 그때, 일본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은 점원 N과 눈이 마주쳤다. N은 싱긋 웃더니 곧장 다가왔다.
어디에서 왔어요?
“한국이요”
“오! 한국!! 여행? 비즈니스?” 몇 마디 말이 오간 뒤엔 어느새 테이블 앞에 서 있었다.
N이 생맥주를 들고 돌아왔다. 잔을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있던 Y 일행에게 말했다. “한국인이래!” 이내 몇 명의 시선이 모였다. 기분 탓인지 묘하게 찡그려지는 미간을 본 것 같다. ‘지...지금..? 여기서...?!’
적어도 N은 정말 별 의도가 없던 것 같다.
“재팬 서포터?!”, “응??” 맞다고 답하면 너무 거짓말이고, 딱 잘라 아니라고 대답할 용기는 또 없어 객쩍게 웃을 따름이었다. N이 능숙하게 제시한 차선책이었다.
비로소 주변의 시선이 풀리는 느낌을 받았다. 아닌 게 아니라 그 시점부터 하나둘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일본은 몇 번이나 와보았는지, 일본의 무엇이 그리 좋은지 같은 질문에서 시작해,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비롯한 한국 드라마 이야기로 번져나갔다. 서로의 언어엔 전혀 유창하지 않았다. 나중에 영어가 통하는 타지역 사람이 끼기 전까지, 5단어가 넘어가는 문장은 거진 번역 앱을 통합 필담이 됐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근 1년 중 가장 요란하게 수다를 떨었던 날이됐다. 말이 유창하지 않은 만큼 리액션이 커졌다. 서울에서 들으면 과장이 되는 일본산 리액션을 보는 것도 재밌었다. 그 분위기에 신이 나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몇 번의 건배가 이뤄졌고, 얼결에 주문했던 술 한 잔은 두 잔, 세 잔이 됐다.
숙소로 돌아오기 전, 한바탕 인스타 공유회가 있은 뒤엔 어젯밤 그토록 괜히 얄밉던 붉은 인간이 되어 어깨동무를 한 채 외치고 있었다.
“컴온컴온! 잇쑈니!!!”
왜 한 번도 의심하지 못했을까. 목적이 후질 수도 있다는걸.
애써 일본어 대본을 만들어 식당을 예약했다면 바람대로 이틀 차에 고기를 먹었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랬다고 한들 다음날 스포츠펍에서만큼 흡족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 같다.
계획은 아는 범위에서만 세워진다. 애석하게도 그 앎의 경계 안에 모든 실재가 들어가진 못한다.
11월의 어느 밤이 되기 전에 어떻게 알 수 있었겠나. 아무런 연결점이 없는 N의 근무 시간과 장소를, Y가 박은빈의 팬이라는 사실을.
계획대로 된다는 건 현재의 영역에 갇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단지 여행뿐인가. 오래 신경 쓴 일일수록 뜻대로 풀리지 않으면 짜증을 넘어 두려움으로 이어지곤 했다.
포기가 포기를 불러올까 봐, 실패가 실패를 낚아올까 봐, 그렇게 끝 간 데 없이 망하기만 할까 봐 겁이 났다.
하지만 무서워한다고 미리 알게 되는 것도 없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어차피 미리 알 수 없기에, 변수 뒤에 딸려 올 일이 의외로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기에, 뜻밖의 해방일 수도 있기에,
비로소 아주 조금은 기꺼이 망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