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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nish Jan 31. 2020

워킹대디는 왜 박사과정에 진학했을까?

1화. 워킹대디의 박사 도전기

지난해 박사과정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는 모습. 경제학 박사과정은 단순히 글 쓰기 실력뿐 아니라 적당한 수학, 프로그래밍 실력까지 갖추고 있어야 한다. 에니시ⓒ


하루 4시간. 퇴근 후 피곤에 쩐 나에겐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다. 누군가는 이 시간 동안에 드라마를 시청하거나, 아이와 시간을 보내거나, 배우자와 산책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이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논문을 읽는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숨 막히는 일상일 수 있겠다. 그렇다. 난 직장인이자, 육아러이자, 서울 모 대학원 박사과정이다. 전공은 경제학이다.


여기서 잠깐. 대개 직장인이 박사과정을 병행한다고 하면 '야매'로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다. 무엇보다 대학별로 수준 차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가 다니는 경제학 박사과정은 야간 과정이 아닌 엄연히 '일반 대학원'으로 분류되며, 코스워크와 종합시험 난도, 그리고 졸업생의 job placement를 고려했을 때 수준이 아주 낮은 편은 아님을 밝히고자 한다.


다시 주제로 돌아가 보자. 내가 주위에 "박사과정을 한다"고 하면 대개는 수도 없는 질문이 꼬리를 잇는다.


"직장 다니고 있잖아. 그런데 왜 피곤하게 박사를 해? 석사도 아니고?" "직장 생활, 육아도 하고 말이야. 공부 제대로 하겠어?" "어차피 국내 박사는 해외 박사에 비해 안 쳐주는 거 알지?"


이런 질문을 연속으로 받다 보면 피곤할 법 하지만, 사실 주위의 시선은 크게 중요치 않다. 중요한 건 내가 왜 업무와 학업을 병행하냐는 것이다. 명분이 충분하다면 주위에서 뭐라고 하든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시작은, 작은 성취감이었다. 내 첫 직장은 경제와 관련된 회사였다. 경제 리포트를 주로 쓰던 나는 전문성을 키우려는 목적으로 3년 차 때 서울 모 대학의 경제대학원에 입학했다. 경제의 큰 흐름을 잡아주는 거시경제부터 난해한 수식을 풀어야 하는 경제수학까지 다양한 과목을 접하는 과정은 호기심 높은 성격이던 내게 짜릿하고 흥미롭게 다가왔다.


이론 제시부터 데이터 수집부터 작성까지 약 1년이 걸렸던 논문 기간은 좀 힘들었는데, 이때는 박사과정을 할 엄두를 내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학업과 대학원을 병행하는 사람들만이 느끼는 게 있다. 바로 성취감이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직장 생활을 하면서도 학업적인 무엇인가를 이룬다는 만족감 말이다. 그게 꼭 금전적 보상을 수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개인적 성취감과 학계에서 인정되는 학술적 성취감은 크게 다른 얘기일 수 있다.


결국 그 성취감에 대한 미련 탓인지, 난 석사 졸업 2년 만에 다시 학교를 향했다. 그런데 직장 병행자인 내게 석사와 박사는 단순히 학업적 난도 외에도 큰 차이가 있다. 바로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이었다.


첫째, 석사 때 나는 미혼이었다. 하지만 박사과정인 나는 기혼인 데다 아이까지 생겼다.

둘째, 첫째의 결과로 나는 육아러가 되었다. 온전히 나만 신경썼던 미혼 때와는 크게 다르다.

셋째, 직장이 바뀌었다. 직장 적응에 대한 부담이 생겼다.


이와 같은 변화들은 안 그래도 어려운 박사과정에 적지않은 짐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육체적 피로감이 커졌고, 미혼일 때에 비해 한없이 '아저씨화(이를테면 살이 찌고 피부가 푸석해지는..)'되는 가운데 매일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한다는 것은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좀 더 깊이 있는 공부를 하려는 직장인에겐 이런 상황이 달갑진 않다. 그래서인지 내 주변을 보면 선택의 기로에 놓이는 분들이 있다. 학업을 당분간 쉬고 직업과 육아에 집중하든가, 아니면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학업과 공부를 병행하든가.


난 결과적으로 후자를 선택했지만, 사실 후자가 전자에 비해 꼭 나은 선택이었는지는 개인의 판단에 달려있기 마련이다. 모든 선택엔 기회비용이 따르는데, 후자의 경우로 보면 학업에 시간을 쏟으면 쏟을수록 직장에서 더 나은 성과를 거두기 위한 심적 여유가 줄어들고 육아의 퀄리티마저도 형편없이 떨어질 수 있다.


게다가 학업에 신경 쓰기 위한 선택을 내리는 데는 배우자의 헌신적인 희생까지 요구된다. (물론 본인의 직장-학업 병행 여부를 '허락'해주는 배우자를 만나느냐 여부는 철저히 복불복이다. 주변에선 배우자의 반대로 학업을 하지 못 하는 경우도 봤다. 그렇다고 꼭 더 안 좋은 삶을 사는 건 물론 아니지만..)




사실, 직장과 육아까지 병행하는 박사과정의 삶을 요약해 한 편의 글로 정리하는 것은 무리다. 그래서 앞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글을 남기겠지만, 그래도 첫 글에서 꼭 강조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대학원이 내 미래에 보장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돈을 벌려면 사업을 하면 되고, 승진을 하려면 지금 직장 생활에 충실하면 된다. 내가 대학원을 다녀서 무엇을 이룰 것인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내가 미래에 어떤 내가 되길 바라는지 등에 대해 정답을 내릴 수 없다면 박사과정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다음 글에선 대학원이 육아로 직장인의 일상에 미친 영향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다뤄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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