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Vie devant soi
소설이기에 아름다운, 처연한 이야기
가끔 거리낌 없이 너무 차분하고 솔직해 그 모습이 안타까울 때가 있다.
한 올의 포장도 없이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그저 덤덤하게 마주하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시밭길에 맨 몸으로 부딪히면서 웃음을 잃지 않는 태도라던지
사자를 앞에 두고서도 한번 싸워보겠노라고 주먹을 쥐는 모양새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화자가 그렇다.
감정을 절절히 눈물에 호소하며 이야기하는 게 아닌
그냥 그랬었다. 그리되었다.
이를테면 아주 태연하게 이야기하는데 그 장면을 지켜보는 내가 마음이 쓰라려 눈물 맺는 것이다.
나는 그 오백 프랑을 저어서 하수구에 처넣어버렸다. 그러고는 길바닥에 주저앉아서 두 주먹으로 눈물을 닦으며 송아지처럼 울었다. 하지만 마음만은 행복했다. 로자 아줌마 집은 겨로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돈 한 푼 없는 늙고 병든 아줌마와 함께 사는 우리는 언제 빈민구제 소로 끌려가게 될지 모르는 처지였다. 그러니 개에게도 안전하지 못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30)
쉬페르를 너무도 사랑했기 때문에 떠나보내야만 했던 심정.
부를 수 있는 한 최대한 부르고 , 차마 판 돈을 가질 수 없어 하수구에 버리는
순수한 사랑과 이별의 모습.
"널 보니 우리 아들 생각이 나는구나. 모모야. 방학이라서 엄마와 함께 니스 해변엘 갔는데, 내일 돌아오지. 녀석의 생일이거든. 생일 선물로 자전거를 사줄까 하는데, 우리 아들 녀석 하고 놀고 싶으면 우리 집에 오도록 해라."
그때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모르겠다.
엄마도 아빠도 자전거도 없이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이제 와서 이작자가 나를 못 견디게 만들다니.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할 것이다.
좋다, '인샬라(신의 뜻대로).' 하지만 이건 진심이 아니다.
단지 내가 훌륭한 회교도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하는 것뿐이다.
하여튼 그 사건이 내 감정을 건드렸고,
나는 어떤 끔찍한 폭력적인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런 감정은 내 속에서 치밀어 오른 것이었고, 그래서 더욱 위험했다.
발길로 엉덩이를 차인다든가 하는 밖으로부터의 폭력은 도망가버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안에서 생기는 폭력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럴 때면 나는 무작정 뛰쳐나가 그대로 사라져 버리고만 싶어 진다.
마치 내 속에 다른 녀석이 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 위해 울부짖고 땅바닥에 뒹굴고 벽에 머리를 찧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그 녀석이 다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니까.
아무도 마음속에 다리 따위를 가지고 있지는 않으니까.
그래도 이렇게 얘기하고 나니까 기분이 좀 나아진다.
그 녀석에 조금은 밖으로 나가버린 기분이다.
여러분은 내 말을 이해하는지?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64~65)
이 부분을 읽고 나는 또 읽고 또 읽는 것을 반복했다.
공허하고 아픈 마음을 이보다 더 담담하며 절절하게 표현해 낼 수가 있을까?
읽을수록 코가 시큰하며 애잔한 감상과 동시에 나의 상처도 치유받는 느낌이었다.
간만의 카타르시스에 이 부분을 찍은 사진을 주위 친구들에게 보내주고 엄마에게도 이 부분을 펼쳐 보였다.
하밀 할아버지는 빅토르 위고도 읽었고 그 나이의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경험이 많았는데, 내게 웃으며 이런 말을 해 준 적이 있다.
"완전히 희거나 검은 것은 없단다. 흰색은 흔히 그 안에 검은색을 숨기고 있고, 검은색은 흰색을 포함하고 있는 거지." 그리고 그는 박하차를 가져다주는 드리스 시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오래 산 경험에서 나온 말이란다. " 하밀 할아버지는 위대한 분이었다. 다만, 주변의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뿐.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96~97)
그 구경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들 모두가 실제 인간이 아니라 기계들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들이 고통받지 않고 늙지도 않고 불행에 빠지지도 않으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우리네 인간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중략) 무엇 하나 진짜가 없는 이 서커스의 세계는 인간 현실과는 동떨어진 행복의 세계였다. 철사줄 위에 있는 광대는 절대 떨어질 리가 없었다. 열흘 동안 나는 그가 떨어지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그가 떨어지더라도 하나도 아프지 않으리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정말 별세계였다.
나는 너무 행복해서 죽고 싶을 지경이었다. 왜냐하면 행복이란 손 닿는 곳에 있을 때 바로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110~111)
아... 모모에게 진짜 세계, 인간 세계는 온통 불안과 고통, 불행뿐이었나 보다.
서커스 모형을 보며 모모는 하나도 아프지 않은 그 세계를 '별세계'라고 생각하고
그 안도감에 행복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눈물을 흘린다. 모모의 순진무구한 한마디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든다.
나는 언젠가 메카에 갈 것이다. 하밀 할아버지는 그곳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태양이 뜨겁고 오래 떠 있는데, 그것은 지리적인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메카에서도 나머지들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주 먼 곳, 전혀 새롭고 다른 것들로 가득 찬 곳에 가보고 싶은데, 그런 곳을 상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 공연히 그곳을 망칠 것 같아서이다.
그곳에 태양과 광대와 개들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들은 그대로도 아주 좋으니까. 그러나 나머지는 모두 우리가 알아볼 수 없도록 그곳에 맞게 다시 만들어졌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래 봤자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사물들이 얼마나 자기 모습을 끈덕지게 고집하는지를 생각해보면 참 우습기까지 하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126~127)
모모에게 현실 세계에 '그대로도 아주 좋은' , 미련이 남는 것은 태양과, 개뿐인가 보다.
하기사, 엄마와 아빠 없이 자전거도 없이 살아온 모모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몇 가지나 있었으랴.
나는 예 아니요, 대꾸도 없이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 더 먹었다. 역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세상에서 최고다.
"우리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보렴. 그리고 함께 시골로 놀러 가는 거야. 퐁텐블로에는 별장도 있단다......"
"저 이만 갈게요. 안녕히 가세요."
나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아르튀르를 움켜쥐고 뛰었다. 나는 그녀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게 없었으므로.
나는 아슬아슬하게 차들 사이를 달리면서 그들을 겁주는 게 재밌었다. 운전자들은 어린아이를 칠까 봐 두려워했고, 나는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무엇인가 하게 한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무튼 다치지 않게 하려고 끼익 소리를 내며 급정거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그들을 좀 더 겁줘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지만 그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었다.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144~145)
모모가 어른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차들 사이를 다니며 겁주는 것뿐이었고, 구조차의 관심마저 좋아서 , 따뜻한 가정을 보고 난 공허한 마음을 달래는데 이용하는 것이 씁쓸했다.
그저 어린아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랑받고 관심받는 것은 모모에게는 비현실적인 사치였던 것이다.
"인샬라, 난 곧 죽을 거다."
"인샬라, 로자 아줌마."
"죽는다는 게 만족스럽구나, 모모야."
"우리 모두 아줌마에게 만족해요. 여기 사람들은 모두 아줌마 친구들이에요. 모두들 아줌마에게 잘해주고 싶어 해요."
"하지만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게 하지는 마. 모모야, 그건 절대로 안 된다."
"걱정 마세요."
"병원에서는 나를 억지로 살려놓을 거야. 그런 법이 있단다. 뉘른베르크의 법이지. 너는 너무 어려서 모를 거다."
"난 뭘 하기에 너무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잖아요, 아줌마."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259)
자신이 맡아 키우던 창녀의 아이들 중 가장 사랑했고, 생을 떠나갈 때까지 곁을 지킨 모모에게 하는 로자 아줌마의 말. 뭘 하기 너무 어려본 적이 없다는 모모.
"하밀 할아버지,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도 살 수 있나요?"
"난 쿠스쿠스를 무척 좋아한단다, 빅토르 야. 하지만 매일 먹는 건 싫구나."
(중략)
그녀는 이제 숨을 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숨을 쉬지 않아도 그녀를 사랑했으니까. 나는 그녀 곁에 펴놓은 매트에 내 우산 아르튀르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아주 죽어버리도로 더 아프려고 애썼다.
(중략)
바깥에 나가기가 두려웠다. 밖엔 아무도 없었으니까.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용경식 옮김, 문학동네, 원서 출판 1975, p303,305)
로자 아줌마를 잃는 방법을 모르는 모모는,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 아줌마를 보내주지 못한다.
지하 동굴에서 아줌마를 살아있던 모습 그대로 꾸며주고 값비싼 향수를 사 뿌려주면서
바깥에 나가지 않고 동굴에서 그렇게 계속 함께하고 싶어 한다.
바깥엔 아무도 사랑할 사람이 없으므로.
어쩌면 로자 아줌마에 대한 사랑이 연고 없는 모모를 살게 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바깥으로 구출된 모모가 나딘의 집에 살기로 한 것도, 그 아이들이 자신을 원하기 때문이라고 모모는 말한다.
그리고 우산 아르튀르를 자신이' 사랑해야 한다.'라고 말하며 이야기는 끝맺음된다.
사랑받을 수 있고 사랑할 무언가가 모모를 계속 살게 하는 엔딩.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떠나보내는 슬픈 이야기인데도 이 책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읽는 것만으로 무언가 마음의 응어리를 풀어낸 것 같고 눈물을 흘려서 상쾌해진 감상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행복하게 한다.
가벼이 사랑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에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며, 사랑에 책임을 지는 모모를
우리는 배워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