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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월 손님*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속 그녀는 왜 황량하게 시든 나무를 사랑했을까.

by Boradbury

우리 이 멋진 가을의 낭만과 감상을 마음껏 누려 봐요.

그의 문자에 시린 발을 끌며 부엌으로 향했다. 동동거리는 시계가 데퉁스럽게 잠옷 끝자락을 붙잡는다. 평소 같았으면 못 이기는 척 따라주었겠지만 올해는 시애틀의 단풍이 빨리 물들고 진다는 소식이다. 전기주전자를 켜고 블라인드를 걷는다.

삐딱하게 기운 목에 힘을 줘 바로 하니 오랫동안 쳐다봐 주지 못한 마을 풍경이 눈앞으로 달려와 줄을 선다. 맨 앞줄엔 잎 떨어진 장미가, 맨 뒷줄엔 태평양을 옆구리에 끼고 위드비섬Whidby Island이 투명 액자를 채워 넣는다. 밤새 세찬 바람이 불어서 모두 몰골이 초췌하다. 이런 가을이 좋은 이유가 무엇일까, 다시 삐딱하게 목이 기운다.

전기주전자가 가라앉은 공기를 하얗게 뿜어 올린다. 홀로 활기찬 아침을 맞는 쇳소리, 정확히는 쇠를 긁고 나오는 공기 소리에 번뜩 잡념이 끼어든다. 빈혈 같은 철분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작은 쇳덩어리를 수프에 넣어 끓인다는 뉴스 한 줄이 떠오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날카롭던 소리에도 온기가 더해진다.

이젠 내 몸에도 온기를 더할 차례다. 뜨거운 물과 만난 티백이 더 진한 색으로 물들며 온 거실에 차 향이 퍼진다. 대충 소파에 걸쳐둔 담요로 몸을 감싸고 다시 창 앞에 섰다. 일주일 남은 시월은 마치 이별이 두려워 예고 없이 사라져 버린 연인처럼 재빠르게 자신의 흔적을 지워 버렸다.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속 그녀는 왜 황량하게 시든 나무를 사랑했을까. 궁금증에 앞머리가 간질거릴 땐, 직접 그 정체를 찾아 마구 헤집고 샅샅이 뒤져야 한다. 비가 내리는 하늘, 마른풀 쭉정이만 남은 풀길, 안개 묻은 회색 스웨터, 색을 잃어버린 흙, 어떤 희망이나 가장도 벗어버린 계절. 그의 시어를 조용히 투명 액자 속에서 바라본다. 그는 <시월>이란 시도 썼지만, 난 그 안에 서 있길 거절하고 잰걸음으로 단풍이 드문드문 남아있는 마을을 십일월에 가져다 놓았다. 얼굴도 모르는 그녀를 쫓아 서둘러 낯선 미래의 문을 연 것이다.

어젯밤 잔뜩 쏟고도 여전히 작은 물방울을 분사하는 무거운 하늘을 올려다보며 찻잔 가까이에 코를 가져다 댔다. 금세 그 작은 물방울들이 옮겨붙은 코가 촉촉해졌다. 옷을 벗다 만 나무들이 물을 먹어 더 어두워진 색으로 처져 있다. 그 무거운 옷도 곧 다 벗어버리겠지. 입안으로 후루룩 빨려 들어가는 생각 한 모금에서 젖은 흙냄새가 난다.

안개 묻은 회색 스웨터처럼 옅게 깔린 머킬티오의 해무는 그가 말한 것처럼 은빛으로 반짝인다. 색이 사라지는 중이다. 한 해의 시간도 이렇게 조용히 저물어가니 잠옷 끝자락을 붙잡았던 시계가 동동거릴 만도 하다. 아직 못다 한 일이 있어서, 일찍 포기한 일이 발길에 차여서 마음이 앞으로도 뒤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섰다. 투명 액자 속 고요하고 황량한 나무숲처럼. 흘러내리는 담요를 다시 추켜 올려 더 꽉 몸에 둘러 감는다. 후루룩. 생각 한 모금을 머금은 입안에서 젖은 흙냄새가 안으로 안으로 점점 더 스며든다.

또 잡념이 든다. 나쓰메 소세키는 자신의 중편 소설 <태풍>에서 처음으로 ‘로망’을 ‘낭만’으로 번역했다. 그는 비슷한 한자로 음차했다고 밝혔지만, 한국인인 나는 여전히 머리가 기운다. 낭만과 로망을 번갈아 입에 붙여 본다. 둘은 이란성 쌍둥이처럼 영 생김새가 다르단 생각이 든다. 낭만은 좀 더 이상과, 로망은 좀 더 사랑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억측일까. 해무가 걷힌 우리 마을은 로버트 프로스트가 늘 보았던 전원과 다르다. 전혀 낭만과 로망 둘 다 느껴지지 않고 그저 황량하고 쓸쓸하기만 하다. 그래도 그의 시에서 그녀가 말한 감성은 이 풍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아직 반걸음을 잠에 담그고 있는 내 멋대로의 생각이다.

둘 다 아니라면 감상적이긴 한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내 모든 감각을 하얀 김처럼 끌어 올려 폭발시킨다. 세찬 바람이 장미를 후려치고 지나간다. 서글픔 하나 없이 아득바득 붙어있는 잎사귀가 말한다. 감상은 얼어 죽을. 투명 액자를 가운데 두고 나는 분위기를 둘러 감고 그들은 찬기를 둘러 감는다. 남은 바람이 여전히 장미 둘레를 빙빙 돌며 싹 다 발가벗길 기세다.

시선을 멀리 둔다. 바다는 거리만큼이나 색이 뭉개져 파고를 예측할 수 없다. 단지 떠다니는 배가 없는 걸로 보아 그럴만한 사정을 추측할 뿐이다. 위드비섬Whidby Island은 해무를 덮고 고요히 잠들어 있다. 이 풍경 속에서 그와 나만 잠잠하다. 잡념에 빠진 나는 그저 방관자이고, 황량하게 시든 나무를 그리워한 십일월 애호가이고, 사라진 시월이 돌아오길 기다리지 않은 채 액자 속에 붙박인 가을이다.

이토록 이기적인 가을을, 십일월을, 나의 손님을 낭만과 감상이라는 핑계로 시간을 끌어당겨 액자 밖에 세워뒀다. 찻잔과 함께 시월을 내려놓는다. 거추장스러운 것들에 가려졌던 태초의 미학을 예찬하며.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나의 십일월 손님>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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