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시계

후회와 상처, 그 너머의 이야기를 씁니다.

by Boradbury

만실이다.

고상철, 이수임, 황윤상, 홍설희, 서미혜. 전광판 속 고객 명단을 훑는 천 작가의 눈에 천국이 열린다.

“휴대전화 껐냐?”

“아, 예. 지금 껐습니다.”

단호하게 잘리는 목소리와 달리 조던의 손은 둔해서 휴대전화를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천 작가는 눈길 주지 않았지만 깊은 바닥으로 깔리는 그의 한숨만으로도 하고자 하는 말이 다 읽혔다. 조던은 스스로 그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만들어 냈다. 한심한 놈, 쓸데 없는 놈, 손 많이 가는 놈 등, 이 세상 머저리들을 향한 이름이 몸에 자석처럼 들어붙었다.

“가자, 일하러.”

천 작가가 일어서면 조던은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든다. 그들의 일은 장사꾼과 호객꾼, 소리꾼과 고수로 분업한다. 반들반들한 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둘의 검은 구두가 딱딱 소리를 낸다. 느려진 시간 속에 경쾌함이 퍼져간다.

각 호실 밖, 열 맞춰 서 있는 근조화환들은 진시황제를 지키는 병마용처럼 죽은 자의 권력을 나타낸다. 하지만 서너 개든 수십 개든 권력의 시계는 멈췄고, 생의 꽃은 말라 곧 버려질 예정이다.

“저기 있습니다. 상주.”

조던이 고개를 돌리며 천 작가에게 속삭였다. 1호실 빈소 안, 조문객을 맞는 상주는 환갑이 족히 넘어 보였다. 그는 팔에 두 줄짜리 모시 완장이 둘러 있고, 슬픔을 과장하지 않는 얼굴과 태도로 반듯하게 허리 굽혀 인사했다. 천 작가는 이런 고객을 ‘돈 안 되는 고객’이라고 분류한다. 뭐 그렇다고 꼭 맞는 건 아니다. 이런 상주가 더 속 깊은 사연을 갖고 있기도 하니까.

천 작가는 영정 속 고인의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무엇보다 이 절차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 그는 이것을 영적 교감이라 부른다. 눈, 코, 입뿐 아니라 표정에서 느껴져 오는 전체적인 분위기, 얼굴 근육의 모양새마저 캐릭터를 그려낸다고 했다. 만난 적 없는 사람을 그리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앞으로도 만날 수 없으니 더 자세히 봐야 한다. 아마추어처럼 일하지 않으려면.

“얼마나 슬프십니까.”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주와 주고받는 인사는 건조하다. 조던은 천 작가의 반걸음 뒤에서 그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지만 인사말은 건네지 않는다. 수습 기간이라 일의 경계를 지켜야 한다. 더구나 오늘은 현장을 뛰는 첫날이라서 천 작가의 손짓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그에게 눈을 고정했다. 지금이다. 그가 손바닥을 내미는 순간, 조던은 얼른 명함을 한 장 꺼내어 그 위에 올려놨다.

“제 명함입니다. 슬픈 마음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합니다.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해 주십시오.”

상주는 의아한 눈빛으로 명함을 내려다봤다. 검은색 바탕에 흰 국화가 둘린 명함엔 QR 코드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천국만. 후회와 상처, 그 너머의 이야기를 씁니다.

천 작가의 이름과 간단한 문구 외엔 뒷면도 별것 없다. 짧은 문구는 고객들의 궁금증만 일으키면 된다. 그들의 후회와 상처는 납이 되고, 천 작가의 연금술을 통해 금으로 바뀌고 나면 공(0)이 여러 개인 숫자가 계좌에 날아와 꽂힌다.

명함을 건넨 천 작가는 뒤돌아보지 않고, 1호실을 나와 다음 호실로 향했다. 프로는 긴말을 덧붙이지 않는다는 게 그의 소신이다.

작가 보조 구함. 보조 작가 아님. 글쓰기 능력 필요 없음. 보수는 협의 후 결정.

이런 구인 광고를 보고 연락할 사람이 있을까 싶지만, 거기에 걸린 게 조던이다. 그는 현재 하는 일 이외에 시간이 남아 뭔가 새로운 일을 찾고 있었다. 말장난을 잘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같이 일하면 재밌을 거로 생각했다. 작가 집의 빨래, 식사 준비, 청소 같은 일이면 더 좋다고 생각했다. 복잡하게 머리 쓰지 않고, 단순한 일을 하며 누군가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건 관음의 매력을 느끼게 한다. 그렇다고 스스로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이라 생각지 않았다. 그저 누드 크로키를 위한 인물을 관찰하는 작업 비슷한 거라고 스스로 이유를 댔다.

그는 마이에딧과 미드저니로 그림을 만들어 작품을 올린다. 인공지능에 요청해 얻은 그림이니 직접 그렸다고 명하진 않는다. 하지만 작품의 영감과 세밀한 주문이 그에게서 나왔으니 명확한 주인은 자신이라 여기면서 ‘조던’이란 활동명을 내걸었다.

화상채팅 속 천 작가는 전자 담배를 시가처럼 물며 질문했다.

“정장 입을 일이 많을 텐데 정장은 있어요?”

“있긴 한데.”

조던은 곰곰이 생각해 봤다. 대학교 졸업식 때 입었던 보라색 새틴 정장은 요란해서 안 되고, 친구 결혼식에 가려고 대충 홈플러스에서 산 건 푸른빛이 나는 회색이었다.

“검은색, 꼭 검은색이 있어야 해요.”

천 작가의 단호한 어투가 조던의 머릿속에 그려진 정장 두 벌을 단번에 지워버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던 찰나, 돌아가신 아버지의 정장이 떠올랐다. 유품을 정리하며 추억할 물건 하나쯤은 남기고 싶어서 가져온 것이었다.

“있어요! 검은 정장.”

조던은 이 일을 꼭 하고 싶다고 외치듯 주먹까지 꼭 쥔 자신이 좀 없어 보인다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 모습에 입에 물었던 전자 담배까지 내려놓은 천 작가는 손뼉을 쳤다.

“좋아. 내일부터 출근해요. 당장.”

천 작가는 그렇게 말하고 일방적으로 채팅방에서 나갔다. 아직 보수는 말 안 했는데. 조던은 옷장에서 아버지의 검은색 정장을 꺼내어 침대에 펼쳐봤다. 세탁소 비닐 안에 잘 보관되어 있어서 구김 하나 없이 완벽했다.

크기는 맞을까, 또 다른 걱정이 들었다. 그래도 그의 아버지가 한창때 입었고, 현재 자신의 몸과 비슷할 것으로 생각하며 몸을 끼워 넣었다. 다행이다. 좀 오래된 디자인은 통이 넓어 길이만 맞으면 품은 전혀 문제 되지 않았다. 거울 앞에 선 조던은 이십 년 전의 아버지 모습을 마주하는 것 같아 갑자기 고개를 떨궜다. 눈물까진 아니지만, 속이 좀 쓰렸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아버지의 옷을 입게 될 줄은. 조던은 소매와 옷깃을 자꾸 매만졌다.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삶을 입은 것처럼 오래된 정장은 꽤 무거웠다.

천 작가는 고객과의 인터뷰를 준비할 때마다 의식을 치렀다.

“찜질방 다녀오십니까?”

“응. 내 방에 라벤더 향초 켜 놨지?”

“네. 차가운 녹차 준비해 드릴까요?”

그는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그리고 간이 옷장에서 마른 수건 하나를 꺼내어 머리를 털었다. 햇빛 속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방 안 가득 점묘화를 그렸다.

차가운 녹차 한 컵을 세 번에 나눠 입안으로 털어넣고, 정장을 갖춰 입고, 넥타이를 맸다. 그 후엔 향초 앞에서 열 번쯤 빙글빙글 돌았다. 라벤더 향이 자신에게 묻기를 바라는 것처럼.

조던이 컵을 막 치우려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며 오늘의 고객이 들어섰다. 전에 1호실 빈소에서 봤던 상주였다. 이름은 고상철. 천 작가가 장례식장 전광판에서 봤던 상주 이름 중 가장 첫 줄에 있었던 이름이다.

고상철 씨는 어색한 듯 천천히 사무실 이곳저곳을 두리번거렸다. 조던은 계약서를 인쇄해 사무용 폴더에 끼워 넣었다. 일의 절차를 담은 안내서도 함께다.

고객 앞에 앉은 천 작가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한다. 거기에 눈썹 끝을 최대한 내려 누구라도 편히 입을 열게 종용한다.

“저희 서비스는 고인을 보내시고 해결되지 않은 상처와 후회의 이야기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어 드리는 겁니다. 고인과의 추억을 잘 마무리 지어 드리는 셈이지요. 일종의 기억 장례식이랄까요? 현실에선 이루지 못했지만, 사랑도 이뤄드리고, 화해도 시켜 드리고, 안 좋은 기억을 좋은 기억을 바꾸어 남은 분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와 격려를 드리려는 것입니다. 분량은 원하시는 만큼, 혹 이야기를 책으로 만들기 원하신다면 추가 요금이 발생합니다. 오늘 계약하시면, 바로 인터뷰 가능하시고요. 첫 인터뷰는 서비스 요금에 포함되어 있으나 두 번째 인터뷰부터는 또 추가 요금이 발생합니다.”

고상철 씨는 안내서를 한참 동안 내려다보며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천 작가는 능숙하게 말을 이었다.

“신년 특별가는 오십 만원이지만, 작품을 보고 마음에 드신다면 뭐 얼마든지 팁을 더 주셔도 됩니다.”

천 작가는 자신감을 드러내며 너스레를 떨었다. 고상철 씨는 두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결심한 듯 그 큰 눈을 다시 부릅떴다. 그리고 펜을 들어 계약서에 사인했다. 그제야 천 작가는 태블릿을 켜 들고 어떤 이야기든 받아적을 기세로 그에게 집중했다.

“그럼, 이제 고인과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요. 고상철 씨가 후회했던, 상처받았던 그때로 돌아가 봅시다. 어떤 일이 있었나요?”

고상철 씨는 소파 깊숙이 몸을 파묻으며 손은 깍지 껴 허벅지 위에 올려놨다. 그리고 공중으로 시선을 던져넣곤 눈동자를 살짝 오른쪽으로 이동시키며 천천히 입을 뗐다.

“아버지는 연세대를 나온 수재였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아버지의 학벌로 시작했다.

“이 방은 사무실로 쓰시고, 저쪽 작은 방은 창고나 탕비실로 쓰시면 아주 좋을 겁니다. 전에 있던 분이 공방하던 젊은 여자였는데 아주 깨끗하게 잘 써서 특별히 손댈 데도 없어요. 요즘 이만한 매물이면 상급 중에 최상급이라고 할 수 있죠.”

공인중개사는 큰 방 쪽 블라인드를 단번에 올리며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어찌나 빠른지, 어떤 발음은 다음 말에 붙어서 들리지도 않았다. 큰길에서 골목으로 좀 들어와야 하지만, 천 작가는 이곳이 큰 건물에 가려져 그늘지지도 않고, 건너편의 다른 사무실이 훤히 보이지 않는다는 점, 이 두 가지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누군가 자신을 몰래 엿본다는 건 참을 수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편한 차림새로 마음껏 늘어지는 자유, 그것만은 사수하고 싶었다.

“보안 시설은 잘되어 있어요?”

“어우, 그럼요. 요즘 세상에 보안 시설은 기본이죠. 외부, 내부 방범 카메라 다 설치되어 있고요. 보안 업체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수상한 움직임이 포착되면 바로 출동합니다. 뭐, 귀중한 물건을 두실 건가요?”

공인중개사의 기습 질문에 그는 잠시 전자 담배를 입에서 뗐다. 달콤한 딸기향이 주변에 퍼졌다.

“종이 더미들. 거기엔 공이 여러 개 붙어있거든요.”

“네? 종이요? 아, 무슨 땅문서, 계약서 그런 거 말씀하시는 거예요?”

“아뇨, 그런 거에 어디 비하겠습니까. 훨씬 가치가 있는 것들인데.”

그의 말에는 단내가 났다. 너는 모르고 나만 아는 비밀이란다, 하는 것처럼 눈썹을 치켜떴다. 공인중개사는 이해되지 않는 그의 말에 어떻게 답해야 하나 멈칫하더니 뭔가 생각난 것처럼 검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아, 사장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모든 것이 지킬 가치가 있죠. 그럼요, 당연히.”

뒤돌아서는 천 작가의 등에 그의 가벼운 웃음소리가 날아와 간지럼 태웠다. 천 작가도 우스운지 전자 담배를 다시 입에 물며 콧노래를 불렀다. 커피숍에서 들었을 법한 유명한 재즈 노래였다. 맞다. 빌리 홀리데이의 <서머타임>. 저녁 시간, 열기가 잦아드는 노을과 잘 어울리는 멜로디였다.

이제껏 그는 특별히 해 보고 싶은 일이 딱히 없었다. 하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갑자기 사무실이 갖고 싶었다. 집도, 차도 없는 그가 그것들 대신 가지고 싶은 것이 사무실이라니. 하지만, 이 사무실을 집 대용으로 쓸 생각은 없었다. 정말 딱 업무용으로만 쓰고 싶었다. 그래야 자기도 여느 직장인처럼 아침마다 갈 곳이 생기고, 열정을 쏟을 일이 생기고, 그렇게 사람다워질 거란 기대가 들었다.

한때는 매년 신춘문예에 꼬박꼬박 원고를 보내고, 각종 유명 문예지에 신인문학상 공모전을 기웃댔다. 그러다가 점점 나이를 먹고, 주변인들의 눈치에 못 이겨 어디 이름도 없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이란 걸 했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그에게 원고 청탁 같은 건 들어오지 않았다. 책을 내자고 권하는 출판사도 없었다. 그러니 정말 갈 데가 없었다. 작가라는 명함은 얻었지만, 퍼즐 하나가 빠진 불완전한 작가였다.

그의 인생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그는 단연 먹구름이라고 말할 것이다.

진로 희망에 작가라고 적었다. 고등학교 삼 년 동안 바뀐 적이 없었다.

“야, 천국만. 저번에 선생님이 뭐라고 했냐? 지금 낭만이나 좇을 때가 아니라고 했지. 네 어머닌 아버지도 없이 너 하나 잘 키워 보겠다고 아침저녁으로 요양원에서 할머니, 할아버지들 기저귀 갈고, 씻기고, 먹이느라 얼마나 고생하시는데. 빨리 돈 벌 생각을 해야지. 이럴 거면 차라리 실업계로 빠지지 그랬냐. 번듯하게 돈 잘 버는 ‘사’자 들어가는 직업 아니면 대기업이라도 떡하니 붙어서 네 어머니 호강시켜 드릴 생각은 안 하고.”

담임의 눈이 길게 비껴갔다. 반면 천 작가의 눈은 초점이 없었다. 그건 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반항이었다.

“야, 너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이놈의 자식이 정신을 못 차리네. 어이구, 속 터져. 꼭 일 년에 한 명은 이런 놈이 나오니 내가 먼저 죽기 싫으면 입시반을 때려치우든지 해야지, 원.”

천 작가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범죄자처럼 그 모든 말을 마음으로 받기만 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그에게 무엇이 되라고 한 적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해 끼치지 않는, 예의 바른 사람이 되라고 했다. 착하고 바르게. 그것을 가사 삼아 멋대로 노래를 만들어 흥얼거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예술 감각이 높은 아이라고 칭찬했다. 예술이 뭔지도 모르던 나이임에도 그는 그 단어가 좋았다. 어머니의 예쁘고 붉은 입술 같기도 했고, 술빵의 고소하면서도 시큼한 냄새가 떠오르기도 했다. 그냥 그 가운데 어딘가 비슷한 느낌의 단어일 거라고 상상했다.

그는 자라면서 음악이나 그림에 재능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펜을 들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학교 앞 책 대여점에서 빌린 무협 만화를 생각하며 비슷한 이야기를 만들어 봤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제승이 자꾸 힐끔거리더니 교과서 모서리에 뭔가를 적어 보여줬다. 너 글 잘 쓴다. 재밌어. 제승이 자신의 글을 읽고 있는 줄 몰랐다. 더구나 이 글이 누군가에게 재미를 줄 수 있을 거란 예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는 천 작가의 첫 독자였다.

첫 독자의 입소문 덕에 천 작가는 단숨에 유명해졌다. 쉬는 시간마다 그의 공책을 서로 가져가려는 싸움으로 교실이 시끌벅적했다. 다음 이야기를 기다리는 독자들 때문에 그는 수업에 집중하기는커녕 몇 개의 공책을 돌려가며 글쓰기에 전념해야 했다. 무려 한 시간에 세 개의 이야기가 한 쪽씩 전진했다.

후엔 제승이 그의 매니저가 됐다. 그는 천 작가의 공책을 빌려 갈 독자의 순번을 짜고, 반납을 철저히 관리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경을 코 가운데까지 내려쓴 키 작은 녀석이 와서 제안했다.

“오백 원 줄게. 나에게 네 공책을 먼저 가져갈 수 있는 우선권을 줘.”

녀석은 꼭 쥐고 있던 손을 펼쳐 보였다. 체온으로 따뜻해진 동전에서 쇳내가 났다. 천 작가는 그것을 기억해 냈다. 겨울철 문밖에서 엄마를 기다리며 입술을 뜯을 때 나던 시간의 냄새였다.

“안 돼. 모두가 공평해야지. 네가 뭔데 우선권을 달라고 이깟 오백 원으로 새치기하냐?”

제승이 사선으로 녀석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그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녀석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천 작가는 글 쓰던 손을 잠시 멈추고 녀석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손을 뻗어 녀석의 손에 있던 오백 원을 가져와 주머니 속에 넣었다.

“천국만, 뭐 하는 거야?”

제승이 다급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천 작가는 그의 허벅지를 두어 번 두드려 그만두게 했다.

“뭐하는 거긴. 너 자본주의 몰라? 우리 사회 시간에 배웠잖아.”

천 작가는 자본주의의 등에 멋지게 올라타 볼 요량이었다. 사람은 평생 세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던데 이번이 그에게 주어진 첫 번째 기회가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껏 제대로 된 기회가 없지 않았던가. 기억을 갖기 전에 사라진 아버지, 그 이유로 지금껏 요양원에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 어머니, 늘 빠듯한 집안 사정 때문에 가지고 싶은 것과 먹고 싶은 것은 사치라 여기며 빨간 줄 쳤던 지난날을 떠올렸다. 신은 자신에게만 무심하고 가혹했다. 그러니 이제 주머니 좀 채운다고 무엇이 문제겠는가. 죄책감 따윈 가지지 않아도 될 듯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공급보다 수요가 크면 물건값은 올라가는 법이다. 오백 원은 천원이 되고, 이천 원이 되고, 이야기의 끝을 향해 갈수록 기대가 더 커지며 오천 원, 만 원까지 올랐다. 사실, 그 자본주의의 등에서 빨리 내리기 싫어 쉬이 끝낼 수 있는 이야기를 길게 끌기도 했다. 그래야 천 작가의 주머니가 더 크게 부풀 테니까.

반대하던 제승도 천 작가가 매니저 월급을 주기 시작하니 조용해졌다. 아니, 그는 천 작가보다 더했다. 자처해서 그의 공책을 집에서 복사해 와 스테플러로 꾹 찍어 판매하기까지 했다. 그는 점점 실력 있는 매니저가 되어갔다. 새 이야기가 아닌, 지난 이야기를 담은 공책들은 ‘소장용’이라는 미끼를 달아 독자들에게 팔았다. 여학생 독자층도 잡기 위해 제승은 그에게 로맨스 소설도 쓸 것을 권했다. 천 작가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그때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천 작가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됐다.

하지만 그가 간과한 게 있었다.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선 잘되는 가게 옆에 비슷한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긴다는 것. 매번 글짓기 대회를 휩쓸던 옆 반 신예림이 이 싸움판에 등판했다. 그녀는 이미 천 작가의 수를 다 읽고, 그의 방식을 좇아 매니저에 삽화가까지 달고 나타났다. 더구나 그녀는 이 판의 성골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여러 권의 책을 내고 강의도 하는 유명 작가였다. 어릴 적부터 그런 아버지를 보며 자라서인지 그녀의 문장은 고등학생이라고 하기엔 매우 수려했다.

천 작가도 교내외 글짓기 대회에 참가했었다. 하지만 매번 그가 최우수상을 받으면 그녀는 대상을, 그가 우수상을 받으면 그녀는 최우수상을 받았다. 박수와 갈채는 늘 그녀의 몫이었다. 그 콧대 높은 예비 작가가 이런 길거리에 나와 글을 팔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과연 그녀의 작품은 삽시간에, 그것도 고가로 팔려나갔다. 훌륭한 글에 예쁜 삽화까지 그려 넣었으니 유명해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더 많이 벌려는 자는 언제나 다른 이보다 상품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야 한다.

화장실에 가다가 신예림과 복도에서 정면으로 만났다. 천 작가는 그녀를 스쳐 지나가며 나지막이 한 마디를 던졌다.

“너희 아버지는 너 이러는 거 괜찮아하시냐?”

천 작가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멈췄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그녀의 약점을 제대로 찔렀다는 것이다. 며칠 후 다시 복도에서 마주쳤을 때, 그녀의 벌겋게 된 눈과 뺨이 천 작가의 비열한 수를 읽게 했다. 그녀의 사업은 펼치자마자 폐업했다. 그리고 천 작가의 책상 서랍 속에서 노란 봉투 하나가 발견됐다. 그 안엔 갈가리 찢긴 신예림의 공책이 들어 있었고, 겉면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우리 아빠에게 일러바친 게 네 ‘수준’인 걸 잊지 마. 개새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그 봉투를 쓰레기통에 쑤셔 박았다.

“야, 주번. 쓰레기통 꽉 찼다. 갖다 버려.”

그 쓰레기통엔 천 작가의 양심도 버려졌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반으로 접은 지폐 더미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손을 빼면 꼭 냄새를 맡았다. 그건 쇳내와 달랐다.

교실 창밖으로 먹구름이 하늘 전체를 뒤덮었다.

“어떻게, 사무실 계약은 하실 겁니까?”

공인중개사가 아니었다면, 그는 깜빡 잠이 들 뻔했다. 그 목소리는 추억팔이도 이쯤에서 멈춰야 한다고 옆구리를 찔러댔다. 천 작가는 다시 전자담배를 입에 물었다. 달콤한 딸기향이 뿜어져 나왔다.

“바로 들어와도 되죠?”

“아, 그럼요. 안 될 이유가 있겠습니까? 그럼, 제 사무실로 가셔서 마저 도장 찍으실 것 찍고,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하시죠. 얼른 이쪽으로.”

그는 잽싸게 문을 열고, 허리를 이십 도 정도 굽혔다.

고상철 씨는 천 작가가 새 사무실을 열고 처음 맞는 고객이었다. 전엔 친구 제승의 오피스텔을 사무실 삼아 일했지만, 그가 결혼하고 새집으로 이사한 후 독립해야만 했다. 신혼인 그의 아내가 오십이 다 되어 가는 늙수그레한 천 작가를 반길 리 없지 않겠는가.

이참에 천 작가는 작가 보조도 하나 뽑았다. 제승은 무료 봉사에 가깝게 그의 꿈을 응원하고 도왔지만, 이젠 책임져야 할 가족도 생겼으니 알아서 떠나주는 게 미덕 아니겠는가. 심지어 제승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들어오고, 가끔 야근과 회식을 하는 번듯한 직장도 있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같은 대학에서 대학원까지 나오셨습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교사였던 어머니를 중매로 만나 결혼하셨죠.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꽤 좋았습니다. 저는 마치 고귀한 집 도련님이 된 것처럼 기사가 학교 앞까지 매일 태워다 줬고, 저희 집엔 늘 뭔가를 청탁하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그는 중간중간 깊게 숨을 쉬었다. 그리고 가끔 조던이 타 온 커피를 홀짝이며 목을 축였다. 천 작가의 손은 바쁘게 태블릿 위를 오갔다. 고객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 고개도 그쪽으로 기울였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가 회사에 사표를 썼고, 그것을 알게 된 어머니와 크게 싸웠습니다. 어머니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렇게 젊은 나이에 회사의 중직을 맡고 있던 아버지가 뭐가 부족해서 안정적인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는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아버지는 나름 계획을 다 세워놓고 있었습니다. 같이 사표를 쓰고 나와 창업할 동료까지 섭외해 놨었죠. 철저한 아버지 성격에 그 정도는 당연했을 겁니다. 하지만 사람 일이 그렇게 맘대로 된답디까. 창업한 회사는 한 해도 못 견디고 문을 닫고 말았습니다.”

천 작가는 습관적 추임새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사무실 창 저편으로 조던이 간단한 점심을 준비하는 게 보였다. 이 미팅이 끝나면 정오가 되니 미리 준비해 놓으려는 것이다. 천 작가는 손목시계를 곁눈질로 쓱 봤다. 지금 자기 머릿속에 오늘 점심 메뉴는 뭘까, 하고 궁금해하는 게 신기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삶은 늘 하고 싶은 대로였기 때문에 시계를 보는 행위를 넘어 시간에 맞춰, 그것도 누가 준비해 주는 밥을 먹는다는 것 자체가 모두 낯설게 느껴졌다.

제승은 매일 아침밥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하고 문밖으로 사라졌다가 밤엔 술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새벽에 거실로 나오면 씻지도 않고 소파에 늘어져 이불도 없이 잠들어 있는 그를 볼 수 있었다. 뭔가 그와 천 작가는 같은 공간에 살면서도 거실로 나뉜 두 세계에 사는 것만 같았다. 일이 없던 건 아니지만 열심히 살 이유도 없어서 그의 세계를 동경만 했을 뿐, 문을 열고 나갈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 스스로 사무실 임대료도 내고, 공과금도 내고, 먹고 자기도 해야 하니 천 작가도 제승이 매일 사라지는 그 이상한 세계에 발을 들이밀었다.

그는 오늘따라 이상하게 잡념이 들었다. 날씨 탓인가, 냄새 탓인가 모를 일이지만 자꾸 옛 생각에 빠졌다. 고객을 마주할 땐 절대 하지 않는 철칙임에도 불구하고,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몇 번 아슬아슬하게 고상철 씨의 이야기 흐름을 놓칠 뻔하기도 했다. 그래서 천 작가는 정신을 꽉 붙들려고 애먼 커피잔을 들었다.

“그래도 뭐, 어머니가 초등학교 교사니, 가계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제 하교 시간에 맞춰 학교 정문까지 오셨는데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어린 나이임에도 그 둘은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버지 친구라며 인사하라고 해서 어색하게 인사했는데 그 여자는 아버지의 팔에 자기 팔을 걸며 잘 부탁한다고 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점점 흥미진진해졌다. 이런 걸 소위 아침 막장 드라마라 하지 않던가. 사람들은 이 뻔한 인간사의 클리셰를 욕하면서도 본다고 하니 입방아거리는 인간의 속성인가 보다. 오래 묵어서인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도 고상철 씨의 표정은 평온했다. 여전히 가끔 깊은 한숨을 쉬고, 조던이 타 온 커피로 목을 축였다.

“어머니에겐 그날의 일을 말하지 못했는데 어떻게 아셨는지 그때부터 매일 안방에선 큰 소리가 났습니다. 제 방문이 모든 소리를 막을 수 있는 두꺼운 철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어머니는 우울증으로 약을 먹다가 조현병 증세까지 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진 그런 어머니를 정신병원에 보내 버렸습니다. 그 후, 돌아가실 때까지 어머니는 그 병원에서 나오지 못하셨습니다.”

천 작가는 이 이야기의 끝을 예상해 봤다. 이런 고객들은 전에도 여러 번 만나본 적이 있어서 놀랍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외도, 그로 인해 받은 상처, 그리고 결국 화해하지 못하고 떠나버린 아버지로 인해 해결하지 못한 마음. 천 작가는 몇 달 전 비슷한 이야기를 써 준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만났던 고객은 부모가 결국 이혼했고, 아버지와 분리되어 어머니와 살게 된 것은 달랐지만, 아버지의 이야기는 복사, 붙여 넣기 한 것처럼 똑 닮았다.

천 작가에겐 아버지가 없어 그들의 이야기를 들을 땐, 크게 공감하지 못한다. 한 번도 불러본 적 없는 이름이니 아예 그의 사전엔 없는 단어라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없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늘 어색하다. 상상은 할 수 있지만 거의 판타지에 가깝다. 용이나 설인의 존재를 사실로 인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아버지는 전혀 일말의 죄책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집안 사정은 안 좋아졌습니다. 아버지는 연세대 대학원까지 나와 대기업의 중직을 맡으셨다는 자신의 과거에 매여 그만한 자리가 아니면 일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입니다. 그놈의 자존심 때문에 자기 아들 고생하는 건 보이지 않았던 건지. 한심한 양반.”

사무실 창 너머로 조던이 점심 준비가 끝났다고 입 모양으로 알려줬다. 천 작가는 고개를 티 나지 않게 끄덕여 알았다는 의사를 표했다. 사무실 문틈으로 칼칼한 육개장 냄새가 스며들어왔다.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빨리 사라질 정도로 예민한 게 후각이라 하지 않던가. 육개장 냄새가 코안으로 들어오니, 위가 꿀렁거리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꼬르륵 소리가 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중학교 중반부터 안 해 본 게 없습니다. 새벽부터 신문 돌리고, 우유 돌리고, 학교 다녀와선 광고지 돌리고, 집에선 양초에 조화 장식을 다는 부업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겨우 살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정말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단 말입니다.”

고상철 씨의 목소리가 처음으로 데시벨을 높였다. 감정이 올라온다는 뜻이다. 이 지점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천 작가의 일이 이 감정의 얽힌 끈을 푸는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나 고객의 감정이 격해지냐에 따라서 글의 수위는 달라진다. 때론 그다지 감정을 올리지 않는 고객도 있다. 그럴 땐, 가볍지만,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을 그려 넣어 따뜻한 동화처럼 만든다. 하지만 감정이 너무 격해져서 온갖 상스러운 말과 행동도 서슴지 않는 고객도 있다. 그럴 때 이야기를 너무 얕게 썼다간 고객들의 만족을 채울 수 없다. 자신의 감정의 골은 지하 백 미터까지 내려가 있는데 고작 십 미터만 삽으로 흙을 퍼 메꿨다면 만족할 수 있겠는가. 어림도 없다. 그러니 천 작가는 고객의 감정이 오르기 시작할 때를 기다렸다가 대충 감정 수위를 일부터 십 사이 어딘가로 적어 놓는다. 그렇게 해야 나중에 이야기를 쓸 때 실수가 없다.

“사실 전 아버지의 부고를 들을 때까지 연락을 끊고 살았습니다. 전 제 결정에 후회 없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며 살 수 있겠습니까. 네. 아버지가 그냥 빨리 사고를 당하든 암에 걸리든 죽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아이에게 할아버지라고 인사시키기도 싫었고, 처가에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잖습니까. 언제라도 불쑥 내 앞에 나타나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 몸이 아프니 자신을 책임져 달라고 하지는 않을까 늘 불안했습니다. 이건 다 아버지가, 아버지가 잘못한 거니까!”

고상철 씨가 거칠게 목을 긁으며 소리쳤다. 천 작가는 책상 위의 티슈를 한 장 뽑아 그의 손에 쥐여줬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그런 자신에게 놀란 건 천 작가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를 보면 죄책감이 들까 봐 연락하지 않았고, 어머니도 몇 번 연락하다가 눈치가 보였는지 그 후론 소식을 끊었다. 너무 오래 남처럼 살아왔던 시간은 눈물조차 만들지 못하게 만들었다.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던 자신에게 묘한 이질감이 들었다. 마치 옷을 벗기면 건전지를 넣는 구멍이 나올 것만 같았다. 어쩌면 천 작가는 나중에 고철로 버려지지 않기 위해 이 일을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한참을 소리치며 울던 고상철 씨는 힘겹게 감정을 추스르더니 이 일을 잘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를 남겨두고 사라졌다.

“얼른 드십시오. 다 식겠습니다. 다시 데워 올까요?”

“됐어. 나 식은 것도 잘 먹어.”

천 작가는 숟가락을 들어 크게 몇 번 국물을 퍼먹다가 아예 그릇째 들고 마셨다. 배가 뒤틀릴 정도로 고파서였다. 하지만 그는 위산이 가짜 허기를 만든다는 걸 깜빡했다. 그의 허기는 고상철 씨의 이야기 때문이었을까, 자신의 어머니 때문이었을까. 둘 다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하며 허겁지겁 육개장 한 그릇을 둘러 마셨다.

“아, 맞다. 고상철 씨의 아내가 신예림 작가라면서요?”

“응?”

“모르셨습니까? 지난번 장례식장에서 1호실 앞에 있던 근조화환들 리본에 적힌 거 보니까 죄다 무슨 작가협회, 문인협회, 소설가 누구, 시인 누구. 이렇게 쓰여 있어서 고인이 작가였나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들어가 보니 낯익은 여자가 고상철 씨 옆에 서 있길래 작가님이 명함 건넬 때 유심히 봤죠. 그래도 상복을 입고 있으니까 전혀 달라 보여서 아닌가 보다 했는데. 오늘 온라인 뉴스에 떴습니다. 신예림 작가 시부 부고 소식.”

천 작가는 시계를 돌려 1호실 빈소로 날아갔다. 상주 옆에 있던, 그러니까 고상철 씨의 아내가 신예림이었다니. 1호실 앞에 열 맞춰 세워놓은 수십 개의 권력이 고인의 것이 아니라 신예림의 것이었다니. 천 작가의 잊었던 패배감이 신물처럼 올라왔다. 그의 위를 긁은 허기의 정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럼 자기 아내한테 써 달라고 하지 왜. 아, 갑자기 일하기 싫어지네. 이 계약 파기해!”

“네?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그런 게 있어. 밥맛 떨어지게 하는 거. 사람들 다 하나씩은 있잖아. 넌 그런 거 없냐?”

천 작가의 말에 갑자기 조던은 정장의 옷깃을 만졌다. 조금 전, 사무실 밖에서 고상철 씨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렸다. 이름만 바꿨을 뿐 똑 닮은 이야기. 다시 입고 싶지 않았던 추억. 하지만 결국 다시 입게 된 추억. 그는 이제 조금 천 작가의 마음을 알 것도 같았다. 고인은 떠났고, 후회일지 모르는 감정은 무거운 돌이 되어 남은 자의 뱃속을 꽉 막고 있으니까.

“그럼, 고상철 씨 이야기 안 쓸 거면 제 이야기를 써 줄 수 있으십니까? 부탁드립니다.”

그릇을 개수대에 갖다 놓으려 일어서던 천 작가는 엉거주춤 멈춰 버렸다. 둘의 눈은 서로 한참을 바라봤다. 그리고 천 작가는 그에게 말했다.

“공은 몇 개 붙여줄 건데?”

“네? 공을 몇 개나 붙여야 하는 겁니까? 신년 특별가는 오십만 원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심지어 저는 이곳 직원이니 직원 할인율도 붙여 깎아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만.”

“원래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그런 거야. 간절히 사고 싶은 물건은 가치가 올라가기 마련이지.”

천 작가는 조금도 깎아주지 않을 기세였지만, 조던은 알고 있었다. 그가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스스로 살기 위해서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사람도 살리고 싶어서라는 것을. 그러니 그가 조던의 이야기를 써 주지 않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능청스럽게 천 작가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어 그에게 건넸다. 검은색 바탕에 흰 국화가 둘린 명함엔 QR 코드가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천국만. 후회와 상처, 그 너머의 이야기를 씁니다.

천 작가의 이름과 간단한 문구 외엔 뒷면도 별것 없다. 짧은 문구는 고객들의 궁금증만 일으키면 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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