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군대 있을 때, 특등 사수였다니까.
“아이구야, 날씨가 왜 이러냐? 쨍 추운 것도 아닌 것이 으슬으슬하네.”
너는 겉옷 앞섶을 여미며 서둘러 차 문을 닫았다.
“시애틀 날씨가 그래요. 좀 두꺼운 옷 챙겨오시라니까 왜 이렇게 얇은 걸 입고 오셨어요?”
딸의 타박 아닌 타박에 넌 억울했는지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너희 엄마가 입으라니까 입었지. 내가 언제 내 맘대로 옷 하나 입을 수 있는 사람이냐? 마나님이 이거 입으라면 이거 입고, 저거 입으라면 저거 입고 하는 거지.”
“또 시작이다. 당신이 그럴 사람이야, 어디? 입만 열면 거짓말. 으이구.”
“노후가 심심하진 않겠어요. 두 분.”
그런데도 넌 아주 틀린 말은 아니란 듯 과장해서 어깨를 들어 올렸다 놨다. 네 마나님은 그 말에 전혀 동의할 수 없다고 말꼬리에 잔소리를 여러 개 더 달았지만, 빙글빙글 돌아내려 가는 공항 주차장 때문에 어지러운지 다들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차가 끝까지 다 내려오고 난 다음에야 넌 다시 말했다.
“김 서방은 일 갔냐?”
“네. 늘 그렇죠. 저녁 일곱 시쯤 들어올 거예요.”
넌 김 서방을 생각하면 늘 마음 한구석이 편하지 않았다. 많은 식구 다 건사한다고 애쓰는 모습이 과거의 네 모습을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가장의 삶이려니, 하고 김 서방과 화상 통화할 때마다 위로의 말을 건네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넌 시애틀에 도착하면 으레 김 서방의 안부를 가장 먼저 묻곤 했다. 그 마른 체격에 어디 아프진 않은지, 하는 일은 잘 되는지, 이민 생활의 어려움은 없는지. 가까이 살지 못해 곁에서 챙겨줄 수 없기에 더 마음을 담아 물었다.
오 년 전에 왔을 때 김 서방은 집 지붕을 새로 하다가 무릎 관절이 부어 고생했는데 그 일로 하는 일도 바꿨다길래 넌마나님 몰래 홈쇼핑에서 무릎 관절 보호대도 사서 가방에 넣었다. 가재는 게 편이라 하지 않던가. 바깥일 하는 사람의 노고는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생각하며 네 마음은 늘 김 서방에게로 향했다.
“그래, 요즘도 김 서방은 볼링치고, 골프도 치고 그러냐?”
“아휴, 못 나가요. 무릎 다치고는. 대신 다른 취미가 생겼지.”
“다른 취미?”
넌 딸의 아리송하게 번지는 미소에 궁금증이 일었다. 김 서방이 결혼 전부터 즐기던 볼링과 골프를 내려놓고. 새로 시작했다는 취미는 과연 뭘까. 무릎이 아프니, 하체를 많이 쓰는 건 아닐 터다. 그렇다고 앉아서 하는 일은 좀이 쑤시니 글쓰거나 음악 듣는 것도 아닐 터다.
“김 서방 오면 물어봐요. 아주 신나서 아빠한테 이야기할 테니.”
딸에게 계속 캐묻고 싶었지만 네 마나님이 손주들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더는 김 서방의 새 취미에 관해 물을 수없었다. 그리고 괜히 휴대전화 시계만 내려다봤다. 넌 네 시가 다 되어가니 앞으로 세 시간만 기다리면 김 서방을 만날 수 있겠다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딸네 집은 시애틀에서 한 시간 정도 북쪽에 있는 작은 도시에 있다. 아담한 이 도시는 바다를 끼고 있어서 집으로 가는 길에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와 거기에 떠 있는 섬을 볼 수 있다. 그 섬에는 산이 있는데 만년설을 가지고 있어서 산꼭대기가 설탕을 뿌려 놓은 것처럼 눈부시게 하얬다. 그 있지 않은가. 서양화 같은 데서 자주 볼 수 있는 풍경. 넌 그 풍경이 아주 이국적이고 좋았다. 한여름에도 반소매를 입고 산에 올라 눈을 밟아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신기한 일이던지. 한국 친구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 때면 네 눈은 만년설보다 더 반짝였다. 마치 다섯 살 어린애가 아주 신기한 변신 로봇을 처음 봤을 때의 눈이랄까.
“어머나, 내 고사리밭에 고사리가 많이 자랐네.”
네가 차에서 내려 주변 풍경에 한창 빠져있을 때, 네 마나님이 옆집 앞마당에서 당차게 고개를 쳐든 고사리를 보며 외쳤다. 그 통에 운치를 즐기던 마음이 와장창하는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이 사람아, 그게 왜 당신 고사리밭이야? 남의 앞마당이지.”
“모르는 소리 마. 미국 사람들은 고사리 안 먹는다니까. 그냥 잡초라고 생각한다고요. 그러니까 내가 요렇게똑똑 따 주면 감사한 거지.”
네 마나님이 고사리 윗부분을 야무지게 끊어내며 말했다. 그러자 차에서 가방을 내리던 딸이 한마디 했다. 네 편을 들면서.
“엄마, 아빠 말이 맞아요. 아무리 미국 사람이 안 먹어도 남의 집 앞마당에 있는 거 함부로 건들면 안 돼요. 미국 사람들이 자기 영역 침범하는 거 얼마나 싫어한다고요. 잘못하면 총 맞아요. 법적으로도 자기 땅 안에 무단침입한 사람에게 총을 쏴도 괜찮은 나라가 여기라니까.”
“에이, 설마.”
“농담 아냐. 오늘 아침에도 공항 부근에서 총기사건 나서 뉴스에 떴더라고. 뭐라더라? 졸업파티하러 친구네 간다고 한 애가 집을 잘못 찾아서 다른 집에 가 계속 문 두르렸다가 집주인에게 총 맞아 죽었대요.”
“어머머, 세상 너무 각박한 거 아니니? 좀 물어나 보지. 무작정 총을 쏘면 어떡해?”
네 마나님은 몇 가닥 꺾은 고사리를 슬며시 등 뒤로 숨기며 재빨리 딸네 집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딸을 도와 가방 하나를 끌고 재빨리 집안으로 들어갔다. 넌 혹시나 해 두 여자의 뒤를 따르면서도 자꾸 옆집 쪽을 돌아봤다. 시애틀의 서늘한 바람이 환영 인사 대신 겉옷 안으로 훅하고 들어왔다.
“아버님, 잘 오셨어요? 오시는 데 힘들진 않으셨고요?”
“어, 김 서방 왔나? 힘들긴 뭐.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다 데려다주는걸.”
김 서방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꾸벅 인사했다. 넌 그런 김 서방의 얼굴이 화면에서 볼 때보다 더 안 좋아 보인다고 생각했다. 양 볼도 푹 꺼지고, 못 본 새에 동안이던 얼굴에 주름도 생겼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릎 때문인지 부자연스러운 그의 걸음걸이가 영 신경 쓰였다. 그래서 얼른 가방 안에서 무릎 보호대가 든 까만 봉지를 꺼내어 건넸다.
“이거 자네 쓰라고 사 왔으니 어여 해 봐.”
우리네 아버지들이 다 그렇지만 선물을 주는 네 손은 괜히 부끄러웠다. 어색한지 눈꺼풀도 자꾸 껌뻑였다. 그리고 마지막은 꼭 시선을 딴 데로 돌리고 만다.
“이게 뭐죠? 스프링도 달리고...”
“어. 무릎 관절 안 좋은 사람들 앉았다 일어났다 할 때 좀 쉽게 해 주는 거라더라. 내가 한번 해 봤는데 성능은 나쁘지 않은 것 같던데.”
넌 그제야 무릎 보호대를 채워 준다는 명목으로 김 서방의 무릎을 만져봤다. 가느다란 다리가 바지 안으로 한 손에 잡혔다. 김 서방이 네가 가져온 무릎 보호대를 착용하고 몇 번 앉았다 일어났다 할 때마다 굵은 스프링이 끽끽 우는 소리를 냈다. 작동은 잘 되는 것 같았다.
“이거 완전히 아이디어 상품인데요? 아버님 덕에 이제 무릎이 좀 편하겠습니다.”
“아니, 뭐... 그게 뭐라고... 별것도 아닌데...”
넌 김 서방의 말에 다시 뻘쭘한 듯 말을 얼버무리며 시선을 돌렸다. 나이를 먹고 시대가 변해도 누구의 칭찬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한국인이 칭찬하는 것도 익숙하지 않지만, 칭찬 받는 것엔 더 어색해한다는 걸 몸소 보여주듯 넌 괜히 목을 긁어 헛기침했다.
이 어색함을 타개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네가 꺼낸 말은 바로 김 서방의 새 취미에 관한 것이었다. 사실 공항에서 올라오는 차 안에서부터 내내 궁금했던 것이기도 했다.
“자네 새 취미가 생겼다던데 도대체 그게 뭔가?”
“취미요?”
“응. 요즘 볼링도, 골프도 안 친다면서.”
“아, 그거요. 지연인 아주 질색합니다. 하지만 아버님께선 좋아하실 거예요.”
김 서방의 말에 넌 얼른 뒤돌아 딸의 얼굴을 살폈다. 딸은 네 마나님과 함께 가방 안에서 손주들 선물로 사 온 옷가지들을 꺼내다가 제 남편을 보며 가재 눈을 떴다. 그러자 김 서방은 네 귀에 은밀히 속삭였다.
“저녁 식사하시고, 제 방으로 가시죠. 다 보여 드릴 테니.”
넌 더 궁금해졌다. 취미가 무엇인지 알려준다더니 갑자기 방안으로 오라니. 방안에서 김 서방의 새 취미를 볼 수 있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또 다른 물음표가 머리 위로 살포시 떠올랐다.
딸의 방에는 전에 없던 금고가 무려 세 개나 있었다. 사람 키만 한 금고가 하나, 이삿짐 상자만 한 금고가 하나, 그보다 작은 정사각형 모양의 금고 하나가 그것이었다. 넌 머리를 굴렸다. 딸은 귀금속에 관심을 두는 타입이 아니었다. 아니, 귀금속이라 할지라도 저렇게 크고 여러 개의 금고를 채울 정도의 양이면 도대체 얼마나 많아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귀금속보단 부피가 큰 물건들이 들어있다는 말인데. 하지만 네 머릿속엔 그만한 물건들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집문서, 땅문서, 차 문서 같은 건 더 아닐 것이다. 그런 서류들이 뭐 부피가 얼마나 한다고 이 큰 금고를 다 채울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무엇일까, 무엇일까, 무엇일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머릿속은 점점 더 물음표로 채워져 갔다.
그때, 김 서방이 비밀번호를 누르고 가장 큰 금고를 열었다. 그리고 열린 금고 안에서 나온 건 다름 아닌 총이었다. 한 자루, 두 자루도 아니고 여러 자루의 총이었다. 딱 보기에도 오래되어 보이는 장총부터 금장을 입힌 권총까지 금고 안은 말 그대로 작은 무기고였다.
“아버님, 이게 다 제가 콜렉트한 총들입니다.”
“아니, 이게 다 뭔가. 이걸 다 어디서 났나?”
넌 오십 년 전에 군대에서나 보던 총들을 눈앞에서 보게 되자 턱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러면서 문득 딸과 손주들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한국에서 본 해외 뉴스에서 얼마나 미국 총기 사건이 자주 소개되던가. 한국인과 관련된 조지아텍 총기 난사 사건만 하더라도 미국인뿐 아니라 한국인들에게까지 얼마나 큰 충격을 안겨 주었는가. 또 수시로 나오는 어린아이의 오발 사고들을 떠올렸다. 부모가 집안에 둔 총을 장난감인 줄 알고 만지다가 아이 자신이 죽거나 다른 형제들 혹은 부모까지 다치고 죽는 사건이 얼마나 많이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지 너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 집주인에게 총 맞아 죽었대요.”
넌 오늘 집 앞에서 들었던 딸의 말이 갑자기 떠올랐다. 시애틀 날씨만큼 서늘한 바람이 어디선가 집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이 또 가슴께가 서늘해졌다. 손주들이 잘못해서 사고를 당하거나 딸 부부가 말다툼하다가 우발적으로 총기 사고를 내는 걸 상상했다. 그러다가 빨래를 털어 널 듯 머리를 좌우로 빠르게 털어 버렸다.
“이런 거 집에 두지 마. 괜히 집안에서 사고 나면 어쩌려고.”
“아버님, 걱정하지 마세요. 사실 한국 사람들이 잘 몰라서 그렇지, 총기 문화는 미국에선 굉장히 자연스러운 것이고, 안전 교육도 강하게 합니다.”
"그렇게 철저히 한다면 뉴스에 나오는 사건들은 왜 생기겠나. 다 그만한 위험성이 같이 따르니까 그런 거겠지.”
네 목소리는 우려가 섞이며 가늘게 떨렸다. 하지만 김 서방의 태도는 되레 더 여유 있어 보였다. 그리고 총을 하나 꺼내어 바닥에 내려놨다.
“보세요. 아버님. 총알은 없습니다. 법적으로 총알을 미리 장전해 놓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총알은 이렇게 다른 금고에 따로 넣어 보관하죠.”
영화 속 금고 털이범처럼 김 서방이 금고 문 한 가운데에 달린 동그란 계기판 같은 걸 오른쪽 왼쪽으로 이리 돌리고저리 돌리니까 금세 금고 문이 열렸다. 그리고 네게 물었다.
“이 총알 아세요?”
김 서방이 작은 상자 속에서 총알 한 개를 꺼내어 들었다. 그건 네가 군대에서 본 총알보다 크기가 작고 가늘었다.
“아니, 근데 이건 왜 이렇게 작지?”
“이 총알은 작은 동물을 사냥할 때 쓰는 겁니다. 이것도 한번 보시죠.”
김 서방이 이번엔 그보다 더 작은 총알을 들어 보였다.
“이건 더 작은 동물이나 새를 사냥할 때 쓰는 총알입니다. 그래서 총알도 더 작죠.”
넌 어느새 총의 위험성을 걱정하던 마음을 내려놓고 김 서방의 설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남자들은 어릴 때부터 이상하게 총에 관심을 두지 않던가. 나뭇사지를 고무줄에 묶어 만든 새총부터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팔던 BB탄을 넣어 사용하는 플라스틱 장난감 총 그리고 조금 더 자라서는 직접 조립해서 만드는 모조품까지. 그뿐인가. 컴퓨터나 비디오 게임에서도 피파 같은 축구 게임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게임들이 슈팅 게임들이다. 뭐가 그렇게도 좋은지 목표물을 맞힐 때마다 화면에 피가 퍽퍽 튀기면서도 고도의 집중력을 다해 총을 쏴댄다. 그런데 진짜 총이라니. 진짜 총이 눈 앞에 있다니! 넌 네 심장이 공포 때문이 아닌 설렘으로 흥분되고 있다는 걸 속일 수 없었다.
김 서방은 제일 큰 금고에서 총들을 꺼내어 방바닥에 늘어놓았다. 그리고 그중 가장 오래되어 보이는 총을 들며 설명했다.
“이 총은 남북 전쟁 때 사용한 M1 그랜드입니다. 굉장히 오래된 총인 만큼 콜렉트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죠. 아버님도 군대에서 이런 총 쓰지 않으셨어요?”
“그렇지. 우리는 M1 칼빈 썼지. 내가 이래 봬도 특등 사수였다니까. 쏘는 것마다 탁탁 얼마나 잘 맞혔다고.”
너의 허세에 김 서방은 다시 권총 하나를 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콜트 1911 권총입니다.”
“아, 이런 건 우리 군대 다닐 때 보면 장교들이 옆구리에 항상 차고 다니곤 했지. 멋있구먼.”
넌 군대에 있을 때 장교들의 권총을 보며 참 부럽다고 생각했다. 제복도 멋있는데 거기에다 한 손에 착 감기는 권총이라니. 일반 사병들은 훈련 시에 겨우 기다랗고 오래된 총을 한번 잡아보는데 장교들의 허리춤엔 은빛으로 반짝이는 권총이 그 위엄을 더 세워주는 듯했다.
그렇게 네가 권총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있을 때, 김 서방은 또 다른 총을 꺼내어 보여줬다. 이번엔 좀 더 현대식 디자인을 한 총이었다.
“이 총은 AR-15라는 총인데 제가 레이저를 달아서 이렇게 누르면...”
“오! 영화에서 나오잖아, 이런 거. 저격수가 막 머리에 겨냥하면 빨간색이나 초록색으로 점처럼 불이 나오고.”
넌 더 흥분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김 서방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져 갔다.
“네. 맞아요. 타깃을 잡아주는 거죠. 딱.”
두 사람은 점점 하나가 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총에 열중했다.
“그런데 이렇게 총을 모으기만 하면 뭘 하나? 쏠 일도 없는데. 그냥 호신용으로 사 모으는 건가?”
“아뇨. 연습하러 슈팅 레인지에 갑니다. 이게 보기엔 쉬워 보여도 타깃을 맞춘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반동으로 흔들리기 때문에 타깃을 순간 맞춘다는 건 많은 연습을 필요로 하죠.”
“아무래도 그렇겠지.”
넌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양팔을 꼬아 옆구리로 말아 넣었다.
김 서방은 현대식 디자인을 한 총을 옆으로 치우고 검은색 권총 하나를 더 꺼냈다. 그리고 네게 말했다.
“아버님, 이 총 좀 보십시오. 아주 정교하게 만들었지만 이건 페이크 건입니다.”
“페이크 건? 그게 뭔가?”
“가짜 총이란 뜻이에요. BB총 아시죠? 그런 거요.”
“BB 총이 꼭 진짜 총같이 생겼군. 진짜라고 해도 믿겠어.”
넌 아들이 어렸을 때 사줬던 BB 총을 떠올렸지만,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느껴졌다. 장난감 총은 플라스틱으로 허접하게 만들어져 있었던 반면, 김 서방이 보여준 총은 전문가가 아니라면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꽤 잘 만들어져 있었다. 그렇게 네가 그 총의 정교함에 감탄하고 있을 때, 다시 김 서방이 물었다.
“아버님, 미국의 총기 법에 대해 좀 아세요?”
“알 리가 있겠나. 이렇게 많은 총을 보는 것도 처음인데.”
“미국에선 주마다 법이 좀 다르긴 하지만... 거의 시민권자만 총기 소유가 가능합니다. 워싱턴주에선 등록도 해야 하고요. 그리고 반드시 금고에 넣어 보관하거나 락을 걸어둬야 합니다. 미국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올바른 총기 교육을 하기도 하죠. 사실 수많은 총기 사고가 이런 것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 생기는 겁니다.”
넌 바닥에 일렬로 늘어선 총들을 내려다보며 복잡한 생각에 빠졌다. 법대로 올바르게 사용한다고 해도 총기 사용이 합법화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그런데도 세계엔 총기 소유가 법적으로 금지된 나라가 더 많고, 여전히 총기 사건은 가장 두려운 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에 김 서방의 설득력 있는 말에도 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너의 표정을 읽었는지 김 서방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아이들은 이 금고 비밀번호도 모르니까요. 지연이에겐 같이 슈팅 레인지 가자고 몇 번 권했는데 영 싫다네요. 총 만지는 것도 싫어해요. 그런데 저 없을 때, 혹시 강도가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경찰에 신고해도 오는 사이에 죽고 말 겁니다. 강도가 총을 들고 들어온다면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자기 몸은 자기가 지킬 수 있어야죠.”
넌 김 서방의 말에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어느 정도는 일리가 있지만 사람의 감정이 격해지면 총이란 게 자기방어나 보호를 위해서만 아니라 자기 분노를 표출하기 위해 악용될 수도 있으니까. 넌 마치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뒤 안 닦고 나온 사람처럼 찝찝한 기분이 들어 한 번 더 목을 긁어 헛기침을 했다.
그날 밤, 넌 네 마나님의 코 고는 소리조차 날카로운 총소리 같이 느껴져 바닥에 담요 한 장과 베개를 들고 내려와 누웠다. 그리고 저 벽 너머에 있는 금고 속 총들이 계속 천장을 어지럽게 떠다녔다. 그래서 눈을 질끈 감고 숫자를 셌다. 시차 적응도 안 되는 그날 밤,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러갔다.
거의 아침 녘이 되어서야 깊은 잠에 든 너는 점심때가 되어서 눈을 떴다. 정신이 몽롱했다. 창문 밖이 훤했다. 네 마나님은 이부자리를 정갈하게 정리해 놓고 이미 방을 나간 뒤였다. 더 누워있고 싶었지만 배꼽 시계는 정확하게 돌아 시끄럽게 알람 소리를 냈다. 밤새 충전한 휴대전화를 켰다. 오후 열두 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늘어지게 하품하며 아래층으로 내려와 화장실에서 일을 보고 나오니 네 마나님은 거실 안마의자에 앉아 휴대전화로한국에서부터 보던 드라마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너와 눈이 마주쳤는지 얼른 휴대전화를 끄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났어요? 오래 잤네. 아침은 고사하고 점심 먹을 시간인데.”
“애들은 다 어디 갔어?”
넌 마나님의 질문은 등 뒤로 넘겨버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다른 식구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어딜 갔겠어요? 손주들은 다 학교 가고, 김 서방은 일 가고, 지연인 교회에 볼일 있다고 나갔지.”
넌 슬며시 식탁으로 가 앉았다. 그리고 네 마나님이 차려준 밥과 반찬들, 국을 천천히 들기 시작했다. 어제 옆집 앞마당에서 꺾은 고사리가 밥상에 올랐다. 한 접시밖에 되진 않았지만 한국 고사리와는 다르게 통통하게 살이 오른 미국 고사리는 제법 고기 같은 맛을 냈다. 미국은 사람도 크고, 나라도 큰데 고사리마저 크구나. 넌 고사리나물을 꼭꼭 씹으며 생각했다.
그런데 갑자기 또 어디선가 서늘한 공기가 네 몸을 감아올랐다. 어제와는 다른, 뼈가 시린 공기였다.
“아니, 어디서 이렇게 찬 바람이 들어오는 거야? 추워 죽겠네.”
네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어떻게 들었는지 네 마나님이 드라마를 보다가 대답했다.
“집에 고사리 삶은 냄새가 나서 뒷문 좀 열었어요. 좀만 참아요. 애들이 냄새난다고 뭐라 하잖아.”
넌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들에게 어디 고사리 삶는 냄새가 반가웠겠는가 싶어서였다. 네게도 묘한 그 냄새는 뭐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속을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도 김치찌개에 더 깊이 코를 박아 넣었다. 그편이 나았다. 시큼하게 콧속을 강타하는 김치 냄새는 강하긴 했지만 싫은 냄새는 아니었으니까.
그때였다. 갑자기 열어둔 뒷문에서 요란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웬 백인 남자 두 명이 집안으로 들이닥쳤다. 한국 등산로에서나 파는 요란한 무늬의 손수건으로 입가를 가리긴 했지만, 언뜻 봐도 나이가 어려 보였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영어로 소리치며 너와 네 마나님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으악! 여보, 어떡해!”
너무 놀라 아무것도 못 하고 숟가락만 들고 있던 넌 네 마나님의 비명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네 입속엔 아직도 김치찌개 국물에 말은 밥알이 굴러다니고 있었다. 넌 최대한 침착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들의 손에 총이 있지 않은가. 최대한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내어주고 목숨만은 보전해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러기 위해선 네 마나님을 진정시키는 것이 최우선이었다.
“침착해. 소리 지르지 말고. 당신 휴대전화로 신고할 수 있겠어?”
넌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했다. 그러자 강도 두 명 중 키가 더 큰 녀석이 네 머리에 총구를 갖다 대며 뭐라고 영어로 소리쳤다. 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내용이 뭔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입 다물고 조용히 있으란 뜻 같았다. 넌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네 마나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쪽도 신고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또 다른 녀석의 손에 이미 네 마나님의 휴대전화가 들려 있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너나 네 마나님은 나이가 칠십이고 이생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네 딸과 사위, 손주들은 달랐다. 아직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은 나이가 아닌가. 이렇게 다른 가족들이 없을 때 강도가 들어온 것이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러면서도 그놈의 고사리 냄새 때문에 뒷문을 열어둔 것에 대한 원망도 밀려왔다.
어쩐다. 넌 더 머리를 굴려야 했다. 너와 네 마나님은 안마 의자 옆에 케이블 타이로 두 손이 묶인 채 무릎 꿇고 앉았다. 어쩐다, 어쩐다, 어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영어 공부 좀 해 둘걸. 넌 그 짧은 시간에도 그런 후회가 들었다. 그래도 어쨌든 살아야 하니 뭐라도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네 마나님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리고 네 몸쪽으로 자기 몸을 바투 붙여 앉았다.
“걱정하지 마. 내가 이래 봬도 태권도 유단자라고. 그리고 내가 군대 있을 때, 특등 사수였다니까.”
넌 강도들이 잘 들을 수 없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마나님에게 속삭였다.
“지금 허세 떨 때예요? 어떻게 좀 해 봐요. 이러다가 우리 둘 다 한국으로 못 돌아가고 미국에서 죽게 생겼어요.”
키가 큰 녀석은 이층으로 뛰어 올라갔다가 몇 분 만에 다시 계단을 내려왔다. 나머지 녀석은 너와 네 마나님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키가 큰 녀석이 다른 녀석에게 영어로 뭐라고 한참 지껄이더니 네 쪽을 몇 번 힐끔 쳐다봤다. 그리고 뭔가를 결심한 듯 네게로 와 섰다. 그는 네게 영어로 뭐라고 몇 마디를 했다. 그리고 네가 영어를 못 알아듣는 것 같아 보이자, 녀석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넘버! 원 투 쓰리 포. 넘버!”
그제야 너는 그들이 금고를 털려고 한단 걸 눈치챘다. 키 큰 녀석이 원하는 건 금고의 비밀번호였다. 하지만 그 말을 알아들었다는 기쁨도 잠시, 넌 다시 좌절했다. 네가 그 금고의 비밀번호를 알 리가 없지 않은가.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저녁 김 서방이 금고 문을 열 때 잘 봐 두는 건데. 뒤늦은 후회란 걸 알고 넌 그들에게 대화를 시도했다. 네가 아는 영어를 총동원해서.
“아이 돈 노우! 아이 돈 노우! 노 남바. 노 남바.”
그 짧은 영어를 그들도 알아들었는지 또다시 격한 영어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네 마나님은 눈을 꼭 감고 더 네 쪽으로 몸을 파고들었다.
“이 녀석들아, 그 비밀번호를 알았으면 내가 먼저 금고를 열고 총을 꺼냈겠지. 아휴, 답답해.”
넌 조용히 중얼거렸다. 녀석들도 답답하긴 매한가지인 것 같았다. 말이 통해야 뭘 해 먹든 할 텐데 이 동양인 노부부와 전혀 대화가 되지 않으니. 녀석들은 다시 역할 분담을 해 키 큰 녀석이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고, 다른 녀석은 계속해서 너와 네 마나님을 지켰다.
부엌에선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부엌에 귀한 물건을 숨겨두지 않는다. 물론 옛날 우리 어머니들은 부엌 찬장에 돈뭉치 같은 걸 몰래 숨겨 두기도 했었지만, 지금은 시대가 변해서 부엌 찬장이 아니더라도 더 안전하게 돈을 보관할 수 있다. 심지어 은행에 예금해 두면 그 누구도 마음대로 남의 돈을 빼앗아 갈 수도 없는 세상이다.
키 큰 녀석은 거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리클라이너 삼 인용 소파와 피아노, 커피 탁자만 있는 거실에서도 귀중한 물건이나 돈 될만한 것은 찾지 못했다. 물론 피아노 안을 뜯어 돈다발을 숨겨둔다는 사람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피아노를 뜯을 것 같진 않았기에 넌 그냥 가만히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녀석들은 짧게 몇 마디를 나누더니 키 큰 녀석이 신경질난 듯 쿵쾅거리며 위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물건들이 흐트러지고 엉망이 됐다.
넌 생각했다. 그들의 하는 행동으로 봐선 전문적인 강도 같진 않았다. 녀석들에게선 왠지 모를 어설픔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이도 어려 보였다. 그러니 초범이거나 몇 번 작은 물건들을 훔쳐본 좀도둑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묶인 손목을 넓힐수록 케이블 타이는 더 살을 파고들어 여전히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그때, 키 큰 녀석이 아래층으로 뭔가를 던지기 시작했다. 김 서방이 차고 다니던 시계와 딸의 몇 개 되지 않는 목걸이, 반지, 팔찌 등이 거실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아니, 김 서방은 이런 건 왜 금고 안에 안 넣어둔 거야? 그런 생각 끝에 넌 긴 한숨을 내쉬었다. 총보다 귀금속이 더 가치가 없단 말인가. 가격으로 따지면 귀금속이 더 나가는 것도 많을 텐데. 이쯤 되면 김 서방이 총을 얼마나 아끼는지, 딸은 왜 자기 남편이 총을 사 모으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녀석들은 그래도 돈 되는 것 몇 가지를 찾았다고 기분이 조금 좋아졌는지 깔깔대며 웃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 큰 녀석은 잠시 후, 딸이 아끼는 애플 사의 랩톱마저 들고 내려왔다. 김 서방이 큰 맘 먹고 사 줬다며 자랑하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쉬움도 잠시, 네 마나님이 많이 긴장했는지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여보... 나 화장실...”
비상 상황이었다. 물론 이런 상황에서 그냥 팬티에 싼다 한들 무슨 흉이 되겠냐마는 그래도 아내가 필요할 때 나서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게 남편의 역할이 아니던가. 넌 갑자기 없던 책임감도 다시 생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녀석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헤이, 마이 와이프, 쉬이... 쉬이... 응? 쉬 마렵다고. 화장실. 화장실. 응? 제발, 플리즈. 플리이이즈.”
넌 끝을 더 길게 늘여 간절하게 말했다. 눈빛은 그보다 더 간절했다. 녀석은 네 얼굴을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네 마나님 얼굴을 쳐다봤다. 그리고 그 표정에서 절박함을 읽었는지 위층에 있는 키 큰 녀석이 다 들을만한 목소리로 뭐라고 크게 소리쳤다. 아마도 이 노인들이 화장실 가고 싶은 것 같은데 어떻게 하지? 이런 뜻이리라. 그리고 욕설 비슷한 느낌의 영어가 위층에서 쏟아져 내렸다.
넌 더 간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헤이, 마이 와이프, 쉬이... 쉬이이... 플리즈. 플리이이즈. 여기서 싸면 냄새나. 고, 고. 화장실. 고,고. 응?”
그것이 통한 걸까. 녀석은 위층 눈치를 보는 것 같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그런데 넌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더니 혈액 순환이 안 되어 다리가 저려온 것이다. 눌려 있을 때는 좀 괜찮은 것 같았는데 일어서니까 그 통증이 갑자기 더 찌릿하게 퍼져나갔다. 너와 네 마나님은 자리에서 일어서려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그리고 녀석의 눈치를 살폈다.
“쏘리, 쏘리. 웨잇 어 미닛. 응? 알았지? 나도 일어서고 싶다고. 응?”
그 모습을 보고 녀석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후로 크게 뭐라 하지 않고 너와 네 마나님을 기다려 줬다. 둘은 다리를 쭉 뻗고 앉았다. 점점 다리의 감각이 돌아오고 있었다. 위층에선 여전히 뭔가가 부서지고, 망가지는 소리가 들렸다. 딸과 사위, 손주들이 돌아오기 전에 이 일이 마무리되어야 할 텐데. 넌 거실 벽에 걸린 시계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큰손주가 학교에서 돌아올 시간이 한 시간 정도 남았다. 그걸 확인하고 나니 네 마음은 더 초조해졌다.
“당신 일어설 수 있겠어?”
넌 네 마나님에게 물었다.
“해 봐야지. 여기서 앉아 싸지 않으려면.”
둘은 서로의 몸에 기대어 겨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녀석은 너와 네 마나님이 화장실로 이동하는 내내 총구를 겨누며 뒤쫓아 왔다. 그때, 네 머리를 스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네 휴대전화. 밥을 먹으며 내내 휴대전화를 어디에다 뒀더라 고민했던 너였다. 그런데 드디어 그것을 어디에 뒀는지 생각났다. 화장실에서 일 보려고 세면대 위에 올려둔 걸 다시 안 들고 나온 것이다. 그 생각의 끝에서 넌 네 마나님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화장실에 가면 세면대에 내 휴대전화가 있을 거야. 내가 당신이 여자라 예의상 문 좀 닫아주자 할 테니까 어떻게 해서든 지연이에게 문자를 보내.”
“손이 묶여 있는데 어떻게 문자를 보내요?”
“어떻게든 해 봐. 큰 애 학교에서 오기 한 시간 전이야. 그 전에 어떻게든 이 녀석들을 잡던가 아님 신고를 하던가 그것도 아님 내쫓아야 하지 않겠냐고.”
네 마나님은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지으며 널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더 좋은 수가 떠오르지 않는 한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몰랐다. 너와 네 마나님은 서로 눈길을 주고받으며 의지를 다졌다. 그리고 네가 화장실 문 앞에서 몸을 돌려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마이 와이프, 워먼. 도어 딸깍. 응? 문 좀 닫아 주자고. 도어. 이렇게 딸깍. 응? 플리즈, 플리이이즈.”
그런데 녀석이 갑자기 네 머리에 총구를 겨누며 험한 소리와 함께 노, 라고 말했다. 넌 두 눈을 꼭 감았다가 다시 떴다. 네 마나님은 그사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다. 넌 잽싸게 넘어지는 척하며 화장실 문을 밀어 닫았다. 그러자 녀석이 더 격하게 몸으로 밀어붙이며 노, 라고 소리쳤다. 넌 화장실 문 앞을 막아서며 다시 녀석에게 말을 붙였다.
“마이 핸드, 마이 와이프 핸드. 이렇게 묶여 있잖아. 응? 뭘 할 수 있겠어? 도망 못 가. 화장실 노 윈도우. 노 윈도우. 응? 도망갈 곳이 없어.”
넌 묶인 손을 들어 녀석의 눈앞에 보이며 간절히 호소했다. 녀석이 겨눈 총구가 머리통에 차갑고 딱딱하게 닿았다. 넌 지금 어떤 정신으로 버티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몸이 떨려왔다. 그 와중에도 네 마나님이 제발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기를 기도했다.
녀석과 내가 화장실 문밖에서 실랑이하고 있는 소리를 들었는지 위층에서 키 큰 녀석이 뭐라고 영어로 소리를 질렀다. 네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있던 녀석도 뭐라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화장실 안에서 물 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천천히 문이 열리며 네 마나님이 나왔다.
너와 네 마나님은 다시 안마 의자 옆에 와 앉았다. 이번엔 무릎을 꿇지 않았다. 다리가 저릴 것을 염려해 무릎을 세워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 사이에 요령이 생긴 것이다. 역시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적응하는가 보다,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아 넌 물었다.
“문자 보냈어?”
“응, 겨우.”
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딸이 그 문자를 바로 볼 수 있을까. 알 수 없었지만, 그 문자를 본다면 경찰에 신고할 것이고 조금만 기다리면 둘은 구조될 것이다. 조금만 참자. 넌 속으로 반복해서 되뇌었다.
그때였다. 키 큰 녀석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뭔가 둘이서 얘기를 나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돈 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는 말인 듯했다. 둘은 너와 네 마나님을 한참 쳐다보다가 자기들이 가진 총을 흔들어 보이며 뭐라고 떠들어 댔다. 그런 다음, 서로 마주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정말 재밌다, 웃긴다, 그런 얼굴로.
집 앞에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앞마당에 고사리가 핀 옆집 주인 부부도, 앞집에 사는 할아버지도. 그리고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동네 사람이 죄다 모였다. 빨강, 파랑으로 요란하게 번쩍이는 경찰차가 여섯 대나 집 앞 길을 가로막고 섰다. 경찰들은 녀석들의 손에 차가운 수갑을 채워 양팔을 잡아끌고 갔다. 그들의 얼굴과 팔, 다리엔 심한 상처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을 지역 뉴스 기자가 언제 어떻게 알고 왔는지, 카메라에 열심히 담고 취재했다. 그리고 그 앞에 너와 네 마누라가 의기양양하게 서 인터뷰했다.
한국에서 딸네 집에 방문한 70대 노부부, 2인조 강도를 때려잡다.
......이번 머킬티오 시 한 가정에서 일어난 2인조 강도 사건의 영웅인 이정근 씨는 태권도 유단자로서 군대에서도 특등 사수였고, 평소에도 꾸준히 운동해 온 덕에 20대 초반의 2인조 강도를 손쉽게 때려잡을 수 있었다. 한국은 분단국가로 모든 남자가 국방의 의무를 감당해야 하기에 거의 나라의 모든 남자가 군 훈련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 씨는 강도들이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팔목에 묶인 케이블 타이를 끊고 공격하여 순식간에 강도들을 제압했다.......
“그래, 정말이라니까. 너희 아빠가 헐크같이 케이블 타이를 탁 끊더니 갑자기 소리지르면서 강도들에게 달려들었어.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네 마나님은 마치 영웅을 바라보듯 널 바라봤다. 그 눈빛은 퓨젯사운드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산꼭대기의 눈처럼 눈부시게 반짝였다.
“아빠, 정말 대단해요. 난 아빠가 태권도 유단자네, 특등 사수였네, 하는 말들이 다 허세인 줄 알았는데.”
넌 딸의 말에 어깨가 한층 더 솟아올랐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대한민국 남자라면 다 하는 것을. 그러니까 이 아빠가 딱 어퍼컷을 날린 다음에 이단 옆차기를 하니까 한 녀석이 바로 그 자리에서 뻗어버린 거지. 그걸 보고 도망가는 다른 녀석을 내가 달려가서 날아차기를 딱! 하니까 그 녀석도 뻗어버렸지. 뭐 젊은 녀석들도 별거 아니더만. 허우대만 멀쩡해 갖고는.”
“아버님, 정말 대단하십니다. 총까지 든 강도, 그것도 두 명을 어떻게 총도 없이 잡으셨는지 놀라울 따름입니다.”
“뭘, 그런 걸 가지고. 흠흠.”
넌 미국에 와서 그토록 꿈꾸던 영웅이 됐다. 브루스 리가 살아 돌아왔다고 한인 언론사와 미국 언론사가 모두 앞다투어 칠십 먹은 한국 할아버지 소식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그들은 알았을까, 이 영웅 탄생의 비밀을.
키 큰 녀석이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뭔가 둘이서 얘기를 나눴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돈 될 만한 것들이 별로 없다는 말인 듯했다. 둘은 너와 네 마나님을 한참 쳐다보다가 자기들이 가진 총을 흔들어 보이며 뭐라고 말했다. 그런 다음, 서로 마주 보며 피식하고 웃었다. 정말 재밌다, 웃긴다, 그런 얼굴로.
넌 그때, 분명히 들었다. 그들이 자기들의 총을 흔들어 보이며 ‘페이크 건’이라고 말하는걸. 네 입가엔 미소가 돌았다.
영웅은 그렇게 탄생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