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오해에 오해를 더하며 쓰여 가는 것을.
은은하게 퍼지는 달빛조차 구름 속에 가려져 있는 둥 마는 둥 했다. 사람 키만 한 길이의 휴지가 흐느적거리며 날아가다 통 굵은 상수리나무에 면상을 들이받았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지 않는 한, 아니 멈추지 않는 한 그대로 나무를 끌어안고 허연 팔다리를 퍼덕거릴 뿐이다.
그 아래에 초록이끼 털옷을 입은 나무의 몸통에 기대어 낡은 벤치가 하나 놓여 있다. 그리고 한 사내가 이 모든 것의 연출자인 양, 목에는 나비 타이를 맨 채 무게를 잡고 앉아있다. 이 정취를 깬 건 유리병 안에서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였다.
“그건 언제까지 들고 다닐 건가? 귓바퀴가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네.”
제일 굵은 나뭇가지에서부터 시작한 몸체가 쑥 내려와 거꾸로 매달린 모습으로 사내의 귓가에 유리병을 흔들어댔다.
“토마스, 인간이라면 으레 유리병 속 파리에게 나올 방법을 가르쳐 주어야 하지 않겠어요?”
“내 말이 그 말이네. 왜 아직 자네는 그 파리에게 유리병에서 빠져나올 방법을 가르치지 않느냐는 말이야. 나 같으면 애초에 저 유리병의 좁은 구멍을 넓히고, 파리가 좋아하는 음식 냄새로 유인했을 거네. 그게 훨씬 현실적인 답이 아닌가?”
거꾸로 매달린 몸체가 기우뚱하더니 순식간에 홱 하고 돌아 토마스 곁에 앉았다. 파리는 여전히 유리병 속에서 앵앵거렸다. 토마스는 어두컴컴한 들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자꾸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이번엔 또 다른 소리에 다시 한번 눈썹을 찌푸렸다. 나무 뒤에서 나타난 고양이는 아기 울음소리를 내며 토마스의 다리에 몸을 정성껏 비벼댔다.
“에르빈! 이 고양이는 아직도 살아있나? 아주 불쾌한 고양이야. 매번 내 다리에 몸을 비벼댄단 말이지. 언제 한 번 크게 걷어찰 줄 알아!”
토마스는 온몸의 털들이 사방에서 당기는 힘으로 잔뜩 솟구치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에 반해 나무를 한 바퀴 휘돌며 나타난 에르빈은 어쩔 수 없단 표정을 지으며 고양이를 끌어안았다.
“그것이... 이 고양이는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해서... 뭐라 할 말이 없소. 그게 이 아이의 운명이니.”
“할 말이 없으면 입을 다무는 게 낫습니다.”
루드비히의 대꾸에 토마스는 나비 타이를 끄르며 깊게 심호흡했다.
“어쨌든 다 왔으니 얼른 본론으로 들어가지. 나부터 말할까? 난 억울해 90 년 동안 가만히 땅속에 누워 있을 수가 없었네. 화딱지가 나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여기까지 날아왔지. 말로 차마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난 억울하네.”
그는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에 두 손을 얹고 깊은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그러자 내내 파리에게만 몰두하던 루드비히가 고개를 쳐들고 물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입을 다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아니, 그렇다면 자네들이 한번 들어보게. 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만들어진다. 이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이번엔 그가 에르빈 쪽으로 몸을 돌려서며 물었다.
“그거야... 노력을 열심히 하라는 뜻이...”
“아니야! 내가 이러니 억울한 거네. 난 아무리 노력을 열심히 해도 1%의 영감이 없으면 소용없단 얘길 한 거란 말이네.”
그는 더 견딜 수 없다는 듯 나비 타이를 뜯어 바닥에 내팽개쳤다. 에르빈은 자신 때문에 그런 건가 싶어 고양이를 안은 팔을 더 꽉 조였다.
“뭐 그런 걸 갖고 그렇게 억울해합니까? 제 얘기에 비하면 이 파리만큼이나 사소한 일인걸요.”
“뭐? 그럼 자네는 뭐가 그렇게 억울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상수리나무 밑으로 왔는가?”
루드비히는 유리병을 토마스가 앉았던 자리에 내려놓으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그럼 이 말은 어떻게 들립니까?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 조금 전에 제가 한 말이지요.”
“그거야... 실재하는 것만이 설명될 수 있고, 그것이 아닌 것은 무의미하단....”
이번에도 에르빈이 끼어들다가 루드비히의 표정을 보고 목소리가 졸아들었다. 고양이는 꽉 안은 그의 팔 안이 답답했는지 바닥으로 뛰어내려 나무 뒤로 사라졌다. 그 뒤로 에르빈이 급히 뛰어갔다.
“하아... 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하지만, 그것에 관해 설명할 수 없다면 논리 없이 떠들지 말고 차라리 입을 다물라는 뜻이었습니다. 저야말로 억울해 무덤에 들어가 다시 눕기가 싫어지네요.”
루드비히는 양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나무를 한 바퀴 돌아 고양이를 들고 온 에르빈은 축 처진 고양이를 가슴에 품어 안으며 슬픈 표정을 지었다.
“다들 이 고양이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온단 말이오?”
“그새 죽은 건가? 아까까지만 해도 살아있지 않았나?”
“그게 이 녀석의 운명이라 하지 않았소.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한...”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죽었음 죽은 거고, 살았음 산 거지. 그런데 어쩌다 그랬다 그랬지? 전에 들은 것같은데 세월이 지나니 기억이 가물가물하구먼.”
토마스는 민망한지 바닥에서 다시 나비 타이를 주워 제자리에 달았다.
“그거 보시오. 여기 있는 두 사람도 이해하지 못하는데... 나도 너무 어처구니없어서 상자 안에 넣은 고양이를 예를 들어 이것이 말이 되는가, 말이 안 되지 않는가, 하고 반박한 거였는데... 오히려 그들의 말을 증명하는 꼴이 되어 버렸으니...”
에르빈이 그 말을 마치자마자 고양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살아서 나무 뒤로 사라졌다.
“자네도 참 땅을 박차고 일어날 만했군.”
말을 마치고 셋은 벤치에 나란히 앉아 유리병 속에서 앵앵거리는 파리 소리를 듣다가 살아있는 에르빈의 고양이를, 아니 죽어있는 에르빈의 고양이를, 아니 살아있는... 어쨌든 그 고양이를 바라봤다.
그때, 루드비히가 우연히 상수리나무를 올려보다가 소름 끼치게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유령! 유령이 있어요. 저, 저기!!!!”
루드비히는 얼마나 놀랐던지 손에 든 유리병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자 파리는 드디어 유리병 안에서 나갈 방법을 찾아 공중으로 날아가 버렸다. 그리고 에르빈의 고양이는 그 파리를 쫓아 나무 뒤로 사라졌다.
“이보시오, 유령은 우리가 유령이오. 잘 보시오. 저건 그저 상수리나무에 걸려 날리고 있는 휴지일 뿐이오.”
에르빈의 말에 토마스가 큰소리로 웃었다.
“맞군, 맞아. 유령은 우리들이 유령이지. 억울하다고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모여 있으면 뭘 하겠는가. 시간은 흐르고 역사는 오해에 오해를 더하며 쓰여 가는 것을. 인제 그만 가세. 땅속에 누워 편안하게 잠이나 자는 게 낫겠네.”
희미한 그들의 형체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춤추듯 통 굵은 상수리나무를 돌아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 그리고 바람이 멈추자 또 하나의 억울한 ‘오해’의 피해자는 퍼덕거리는 걸 멈추고 하늘하늘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