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미한 무언가

이 컵이 비었을 땐 네가 똥을 싸러 가야할 시간이다.

by Boradbury

갈색 컵의 이가 나간 걸 발견한 건 한 달 전이다. 아버지는 이 나간 그릇은 가차없이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렸지만, 그건 누군가로부터 받은 생일 선물이었기에 그대로 둔 것이다.

이 컵이 비었을 땐 네가 똥을 싸러 가야할 시간이다.

컵에 큼지막히 적힌 문구는 이제 내 얼굴에 미소를 묻히지 못했지만 이가 나간 부분과 맞물려 꽤 잘 어울렸다. 그 내부엔 허연 밥풀들이 여기저기 형식을 파괴한 무늬를 찍어놨다. 그건 확실히 난해했다.

허연 밥풀들은 식혜 안에 숨어있다가 단물이 쭉 빠지고 나자 형체를 드러냈다. 컵을 거꾸로 들고 입에 털어 넣으려던 내 노력이 무상하게 그것들은 꽤 많은 수가 그곳에 남기로 결정했다. 물론 손가락이나 숟가락을 집어넣어 그 강경한 집단을 강제로 끌어낼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노력하지 않기로 했다. 딱히 아직 단물을 머금고 있는 밥풀들까지 소환하기엔 이미 배가 불렀기에.

왜 컵에 이가 나갔더라? 검지 손가락으로 쓸데없이 이나간 부분을 긁어본다. 어제 급하게 칠한 매니큐어가 이나간 부분에 빨간 줄을 긋는다. 다시 지워보려 이번엔 손톱이 아닌 손가락으로 문질러 봤지만 뭉개진 빨간 색이 너 의뭉스럽게 번졌다. 설거지통에 푹 쳐박아 뒀다가 씻으면 지워지려나. 그러다가 안 지워지면 이번엔 정말 버려야 하나, 하다가도 내심 이 나간 부분에 빨간 색이 물든다면 더 매력있지 않을까 생각하며 멈춘다. 묘하게 딱 그 부분에 입술을 대어보고 싶기도 하다.

매니큐어는 화학성분이잖아. 왠지 먹으면 안 될 것 같기도 해서 입술을 대지 않기로 다시 마음을 바꾼다. 그 생각 끝에 얼른 손을 내린다. 손톱을 물어뜯는 습관을 잊고 있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입은 벌리고 이는 가지런히 닫은 채 어색한 웃음을 짓는다. 얼굴을 더 가까이 거울에 대고 치아에 빨간 매니큐어가 묻은 건 아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다행히 내 치아엔 빨간 줄이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긴 복식 호흡으로 천천히 온몸의 바람을 뺀다.

이 나간 컵에게 여전히 생일 선물로의 가치를 바라는 건가. 그런데 누군가는 왜 내게 이런 문구가 적힌 컵을 선물한 건지 갑자기 궁금해졌다. 받았을 땐, 그저 웃어 넘겼는데 그건 혹시 누군가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내가 그 컵으로 커피를 마실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카페인은 위와 장을 자극시켜 화장실로 달려가게 만들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적도 많다. 하지만 난 그 문제로 인해 커피를 끊은지 벌써 반 년이나 지났다. 그걸 몰랐다는 건 내게 반년 이상 관심이 없다는 뜻. 갑자기 저 갈색 컵을 버리고 싶어진다.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스스로 버릴 용기는 아직 없다. 그러니 다른 이의 손을 빌리기로 한다. 그리고 아버지는 이 일에 아주 적합하다. 이제는 이가 나가고, 그 이 나간 부분에 빨간 색 매니큐어가 뭉개져 있고, 내부엔 식혜에서 남겨진 허연 밥풀들이 묻어 있는 갈색 컵을 아버지 약통 근처에 가져다 둔다. 속히 발견해 주길 바라면서.

방에 들어와 랩톱을 켠다. 확인 안 한 이메일이 스물 네 개나 열맞춰 서 있다. 그 중 스물 한 개는 겉모습만 제대로 차려 입은 단체 메일이다. 연말을 맞아 각종 세일을 알리는 메일들, 내가 속한 단체에서 보내온 연말 카드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곳에서 보낸 메일들. 분명 주인은 나지만 명확히는 내가 주인인 아닌 메일들은 한꺼번에 삭제한다. 그러고나니 고작 두 통의 메일만 남아 커서를 기다린다.

첫번째 메일. 주문하신 물건이 내일 오전 11시에 도착합니다. 배송 추적은...

두번째 메일. 병원 예약이 취소됐습니다. 다시 예약하시려면...

내 행위에 따른 꼬리표들이 메일로 변신해 돌아온다. 다른 건 없는지 눈동자가 여기저기를 기웃거린다. 기대하지 않기로 하지 않았나. 자신에게 되묻는다. 상처받기 싫으면 입닫고 문닫고 있기로 하지 않았나. 내 안의 또다른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문자답한다. 다시 손톱을 물어뜯는다.

커피를 마시지도 않았는데 아랫배가 컵은 비었고, 이제 똥을 싸러 가야 할 시간이라고 말해준다. 바지를 내리고, 하얀 변기에 질펀한 엉덩이를 맞대고, 콧등에 아주 작은 땀방울들이 맺히는 이 시간은 사실 매우 솔직하다. 정직하다. 매일 피할 수도 없고, 내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유일하게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고작 갈색 덩어리일 뿐이라 할지라도.

화장실에서 나오니 아버지가 그 갈색 컵을 씻고 있다.

그거 왜 뭣하러 씻으세요? 어차피 버리실 거잖아요.

의미없이 던진 말에 아버지는 잘 씻은 갈색 컵 안에 무언가를 담으며 답한다.

어, 산책나갔다가 누가 버린 화초가 있길래. 화분이 깨져서 그렇지, 꽃은 괜찮더라고. 아, 근데 이걸 어디에 심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딱 적합한 게 눈에 보이질 뭐야. 이 나간 것도 이렇게 쓸 데가 있네. 아주 딱이야, 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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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무언가. 하지만 이젠 의미있는 무언가가 된 갈색 이 나간 컵에 심긴 아주 작은 꽃도 더는 이름없는 잡초 같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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