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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Sep 06. 2023

너를 닮을 때, 너를 닫을 때

한때, 너를 닮았을 때가 있었다.

    카드의 앞면보단 뒷면을 보고 고른다. 가격이 써 있어서다. 고작 몇 줄 적지 않을 종이 따위에 단 돈 얼마를 더 쓰고 싶진 않다. 화려한 반짝이나 입체 무늬가 있는 것도 피한다. 전하려는 내용보다 거추장스러운 장식 또한 별로다. 

    이것저것을 들었다 내려놓기를 반복하다 고른 이 작은 카드는 심지어 앞뒤 구분도 없다. 글자인 듯, 무늬인 듯한 무언가가 같은 패턴으로 듬성듬성 인쇄되어 있다. 있다, 없다의 구분이 의미있을까? 잡념이다. 너와 우리 관계에 대한 불필요한 군더더기. 

    나도 한때, 너를 닮았을 때가 있었다. 전동 칫솔이 아닌 친환경 나무 칫솔로 바꾼 것도, 스프를 먹을 때 후추를 넣지 않는 것도, 밤에 잠들기 전 꼭 뱅쇼를 한 잔 데워 먹는 것도 모두 너를 닮은 나였다. 너 역시 나를 닮았을 때가 있었다. 잘 때는 옷을 벗고 자는 것도, 전화를 끊을 땐 스페인식 작별인사를 하는 것도, 비오는 날엔 우산이 아닌 우비 입는 걸 좋아하는 것도 모두 나를 닮은 너였다. 

    4,350km. 너와 나의 거리를 체감하는 건 어려운 게 아니었다. 우리는 3시간의 시차, 벌어진 거리만큼 한 발이 먼저 가면 나머지 발이 질질 끌리듯 따라갔다. 바닥에 신발 끌린 자국이 점점 더 선명해질 무렵, 난 그 선이 너와 나 사이에 있단 걸 깨달았다. 선의 온도가 차다. 

    누군가를 닮는다는 건 그 차가운 선을 뭉개는 일이다. 그래서 점점 흐려지고 흐려지다가 선이 면이 되는 일이다. 내가 너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너도 나의 공간으로 들어와 면을 이루는 걸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 면은 점차 부피와 밀도를 키우며 3차원의 입체 도형이 된다. 그러고나면 그 안에 무언가를 담을 수 있게 된다. 시간도 담고, 감정도 담고, 손도 담고, 입술도 담고, 가슴도 담는다. 

    티 텀블러에 라벤더와 카모밀이 블렌딩된 티를 작은 숟가락으로 조심히 퍼담고 그 위에 뜨거운 물을 천천히 내렸다. 작은 꽃들 사이로 연기를 머금은 물이 꿀렁꿀렁 내려간다. 투명한 유리 텀블러에 옅은 황금색 티가 켜켜이 쌓여간다. 난 늘 그렇게 말한다. 티가 담긴 텀블러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처음 물을 내릴 때만큼은 미묘한 색의 선이 보인다. 조금 더 진한 색부터 점점 옅은 색으로 번져가는 티의 색을 볼 때마다 내 가슴도 꿀렁꿀렁 내려간다. 

    담는 것도 벅찰 때쯤, 아직 연기가 곡선을 그리며 공기 중으로 손을 뻗는 것을 욱여 넣고 뚜껑을 닫는다. 간신히 빠져나간 하얀 곡선들이 카모밀과 라벤더 향을 방 곳곳에 뿌리며 사라진다. 나머지는 텀블러 안에서 뿌옇게 입김을 토해낸다. 

    잠자기 전에 뱅쇼 대신, 티를 마시기 시작한 게 언제부터였더라. 지난 여름이었던가. 그래, 네가 갑자기 일이 생겨 이번엔 올 수 없다고 했을 때였던 것 같다. 무려 3개월만에 만나는 거였는데도 네 목소리에선 전에 머금었던 설렘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알코올이 다 날아가버린 뱅쇼가 싫어진 것도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뜨겁게 끓던 너와 나도 이젠 뱅쇼처럼 와인도 뭐도 아닌 것이 됐다는 걸 체감하는 순간이었다. 후에 건너 건너서 알게 된, 네게 온 큰 기회에 대한 이야기는 더는 내 손을 잡을 이유가 없어진 널 상상하게 했다. 

    무려 6년이었는데. 선을 지우고, 면을 만들고, 다시 3차원의 입체 도형을 만든 뒤, 그 안에 넣었던 너와 나의 시간과 감정, 손, 입술, 가슴이 보기 싫게 꾸역꾸역 담겨 있었다. 뚜껑을 닫자. 

    텀블러 안에서 티가 식어갔다. 뚜껑을 막 닫았을 땐, 죽을 것같이 입김을 불어대던 뜨거운 물이 이젠 미지근해졌다. 터질 듯해 보였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 안에서 서서히 식어 사라진 압력. 물에 번진 황금색 티의 색만이 이것이 티라는 걸 증명했다. 너와 내가 전에 어떤 시간을 함께 했다는 증거들이 꽃잎 가루처럼 물에 둥둥 떠다녔다. 

    너를 닫는다. 고무패킹이 있는 뚜껑으로 꼭 닫는다. 다시는 열리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 어떤 마음의 압력에도 터져 나오지 않길 바라며 너를 닫는다. 

    한때, 너를 닮았을 때가 있었다. 전동 칫솔이 아닌... 스프를 먹을 때 후추를... 밤에 잠들기 전에 뱅쇼를... 

너 역시 나를 닮았을 때가 있었다. 잘 때는 옷을 벗고... 전화를 끊을 땐 스페인식 작별인사를... 비오는 날엔 우산이 아닌... 우산이 아닌... 우산이 아닌...

    고장난 듯 웃던 네 얼굴이 생각나서 내 눈을 닫았다. 그런데 뚜껑의 고무 패킹이 고장난 건지 아무리 아무리 꼭 닫아도 물이 계속 흘러나온다. 너와 나의 시간과 감정, 손, 입술, 가슴이 보기 싫게 흘러나온다. 네게 보내는 마지막 카드엔 도대체 뭐라고 써야 할지 흐릿해진 마음이 자꾸 선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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