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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radbury Feb 20. 2024

윌리엄으로부터

한 시대의 열기가 사라지고, 다음 시대가 오려면 비가 와야 한다.

    시애틀의 래그타임이 시작됐다. 시간의 규칙이 이때만큼은 발을 끌었다 잡기를 반복한다. 좀 더 똑바로 걸을 순 없냐고 타박해도 소용없다. 또박또박 걷기보단 찌그러지고 울퉁불퉁한 쪽을 택하는 것이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른 아침, 겨우 일으킨 몸이 낮은 기압 탓에 발을 끈다. 날카로운 빗방울이 천장에 밤새도록 따발총을 박아 넣었기 때문에 세상은 이미 부옇게 일그러져 있다. 밤은 래그(rag)보단 버그(bug)에 가깝다. 오후 4시만 되면 벌써 방안으로 어둠이 기어들어 온다. 인공지능 비서는 이 풍경 속에 홀로 분초사회를 실현한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모두 발이 흐릿한, 우아한 유령이 된다. 윌리엄 볼컴의 음악에 맞춰 다들 여기 들을 만한 사연이 있어요, 라며 손짓한다. 그 사연들을 다 들어줄 수 있다면 참 좋으련만. 마침 씁쓸한 커피향이 그들의 목구멍을 묵직하게 막아선다. 또한, 서북부 해안은 건너편 섬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해무가 짙게 깔려 불필요한 목소리를 두껍게 덮는다. 

    누군가는 시애틀의 이 계절을 으슬으슬한 공기와 도무지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는 우울감으로 설명하려 하겠지만, 그건 아직 비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 윌리엄 볼컴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에 두근거렸던 건 그들이 태어나고 자란 시애틀과 런던이란 도시가 비를 말하기에 능숙한 곳이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유사한 영감은 그 둘의 표현 방식에서 드러난다. 블레이크는 시와 그림의 경계를 찌그러뜨려 래그타임을 걸었다. 그래서 그건 입체감을 얻어 걷기 쉽지 않은 길이 됐다. 반드시 발을 끌며 변주해야 한다. 볼컴은 블레이크의 시를 음악으로 만들어 보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작업을 위해 자기만의 창작된 걸음걸이가 필요했다. 그래서 클래식과 대중음악의 경계를 찌그러뜨려 또 다른 래그타임을 걸었다. 이제 그 둘은 함께 두 손을 잡고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고 있다. 

    창작은 늘 협업에 능했다. 살롱에 비처럼 쏟아지던 생각들은 온 데 뒤섞여 문학과 미술 음악 과학 철학 정치를 창작했다. 비의 속성이 그렇다. 예측할 수 없고, 막을 수도 없다. 우리의 시야를 가리지만 대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 가기 쉬운 길은 아니어도 남들이 가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낸다. 거기에 절벽 같은 경계를 완벽하게 뭉개버리는 재주까지 있다. 

    문학상에 잇단 AI침투... 챗GPT 협업으로 수상. 뉴스 제목이 거실로 끌던 내 발을 멈춰 서게 했다. 다시 채워진 커피잔에 건조한 입술을 갖다 댄다. 에티오피아 커피 특유의 산미가 입안에선 침이 고이게 하지만, 뱃속에 들어가선 울퉁불퉁한 위벽을 박박 긁는다. 속이 쓰리다. 

    사람과 사람의 협업엔 관대하던 마음이 입을 열어 쉼표와 물음표들을 쏟아낸다. 사람과 인공지능과의 협업이라니. 밥그릇 뺏긴 우리집 강아지처럼 온몸의 털이 곤두선다. 올 것이 왔다는 생각과 그것이 내민 손을 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뒤섞여 머릿속은 금세 엉망이 된다. 

    혁명의 시대를 살았던 블레이크가 그곳에서 순수의 영역인 예술을 도구 삼았다는 건 바로 이런 것일까. 합쳐지지 못할 것 같은 문학과 인공지능이라니. 우린 과연 이 변화의 폭우 속에서 역설적인 아름다움을 끌어낼 수 있을는지. 그래서 그것을 하나의 장르로 창조할 수 있을는지. 

    어쩌면 난 발을 끄는 까닭에 이미 다른 사람보다 늦은 건지도 모른다. 이 계절이 원하는 인재상은 사이보그로 변한 윌리엄일 수도 있겠다. 볼컴과 블레이크보다 더 진보한 형태의 사이보그 말이다. 그럼 우린 그를 어떤 윌리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무리 협업에 능한 윌리엄이라 할지라도 이런 시대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변명 삼기엔 내 발을 끄는 습관은 이 계절에 지나치게 굳어져 있다. 

    이곳 사람들은 맑은 날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처음엔 잠시 좋았다가도 더운 공기가 온몸을 둘러싸면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한다. 비는 또 언제 오려나?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는 그만큼 비를 사랑한다. 시애틀의 공기는 청량하다. 그냥 맑은 공기가 물 같다면, 시애틀의 공기는 탄산수 같다. 비에 씻겨 티끌 하나 머금고 있지 않은 상쾌한 공기. 그래서 비 온 다음 날은 서로 이렇게 인사를 건넨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죠? 

    한 시대의 열기가 사라지고, 다음 시대가 오려면 비가 와야 한다. 정체된 열기는 숨쉬기 답답하니까. 시대의 폭우가 쏟아진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이런 빗속을 또박또박 걷긴 쉽지 않다. 그래서 볼콤은 래그타임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시간을 찌그러뜨려 리듬을 만든다. 빗줄기는 세상 모든 경계를 지운다. 상상력과 편견까지도 싹 다. 

    비가 그치고, 래그타임도 끝났다. 젖은 땅 냄새는 새로운 윌리엄의 잉태를 알리며 코끝을 알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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