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으로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단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발걸음이 멈췄죠. 맞아요, 우린 전에 만난 적이 있어요. 당신은 날 기억할지 모르지만. 한 2년 전쯤이었을 거예요. 그땐, 여기가 아니었는데. 좀 더 입구 쪽이었던 것 같아요. 당신의 이름을 묻지 않았던 게 내내 마음에 남아 아쉬웠지요.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불빛 아래 당신은 아주 고혹적인 검은 색으로 벽에 기대어 있었어요. 지나가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눈꺼풀을 열지 않았기에 난 일부러 당신을 깨우지 않았고요. 그저 조용히 당신 곁에 잠시 서 있다가 지나쳐 갔죠. 멀리서는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당신은 미세하게 반짝이고 있었어요. 모래로 덮인 그 몸을 보고 깜짝 놀랐죠. 그 껄끄러운 걸 옷처럼 입고 있다니. 나도 모르게 조금 더 가까이 당신 쪽으로 몸을 붙였습니다. 알아요. 당신에게 손을 댈 수 없으니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랬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검은 모래 위로 드러난 글자들을 봤죠. 알 수 없는 알파벳의 나열.
당신은 무슨 얘길 하고 싶었던 걸까요. 세상의 어두운 것들을 낮은 목소리로 고발하고 싶었던 걸까요. 아니면 검지만 아름다운 것들을 찬양하고 싶었던 걸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당신의 속마음을 박아 넣은 걸까요. 난 내심 그 마지막 이유이길 더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당신을 만든 창조자의 다른 피조물과는 같지 않았어요. 아, 이번에도 그냥 지나치려다 당신을 우연히 발견했는데 그제야 당신의 창조자가 누군지 알게 되었거든요. 서운해하진 말아요.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당신은 내 눈길과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니까. 그것이 당신 앞에서 내 발걸음이 다시 멈춘 이유입니다.
당신의 창조자는 이름 붙이기를 싫어하나 봐요. 여전히 이번에도 당신 이름을 알아갈 수 없네요. 부를 순 없어도 난 당신이 좋아요. 세상엔 그런 것들이 있어요. 말로 표현할 순 없지만 순수하게 마음을 사로잡는, 그래서 발걸음을 멈추게 하는. 어떤 모습이어도 더 훌륭한 부류 속에 섞여 있어도 말이죠.
색으로 사람의 감정을 움직일 수 있단 건 정말 신기한 일이에요. 조금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지만 당신의 창조자, 그의 다른 피조물들을 볼 때도 난 묘한 감정에 휩싸여요. 그들에게 안기듯 가까이 다가서면 수많은 물음표가 내게 입혀지죠. 마치 사랑, 이별, 고독 같은 감정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처음 접하며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달까요. 난 사랑이 뭔지, 이별 혹은 고독이 뭔지 하나도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 그들을 대면합니다.
그렇네요. 첫 이별을 겪었을 때가 떠올랐어요. 가슴 한편에 모래를 한껏 뒤집어쓴 아이가 그 껄끄러움에 몸을 움츠리고 있어요. 입 벌려 말도 못 하고 온몸에 문신처럼 고통을 새겨 넣어요. 고통만이 아니죠. 슬픔은 더했답니다. 그보다 더한 검은색이 있을까요. 벤타블랙보다 더 검어서 눈꺼풀을 닫고 마음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그런 색이요.
당신의 창조주는 감정에 색을 입히는 작업을 반복했다지요. 어렵다고요? 아니요. 그의 피조물들을 만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빨강, 주황, 노랑, 오렌지, 하양, 검정, 녹색, 갈색. 그들을 섞지 않고 색면을 따로 나누어 배치한 건 온전한 색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다시 그들을 세우거나 쌓아 감정을 배치한 건 아닐는지요. 왜 그런 것 있잖아요. 사랑이란 감정 안에도 수많은, 미묘한 감정들이 섞여 있는 것처럼.
당신을 다시 만난 날, 내 앞엔 또 하나의 당신이 서 있었어요. 삐쩍 마른 그녀는 4개의 그림자를 사방에 달고 있었죠. 그리고 당신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어요. 아니, 당신은 늘 눈감고 있으니, 그녀를 가까이에서 느끼고 있었다고 해야 적당할 것 같군요. 당신이 그녀와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녀의 창조자 역시 세상이 말하는 온갖 군더더기를 싫어했죠. 그래서 앙상하게 말라버린 그녀는 귤 알갱이 같은 육중한 지방 덩어리를 몸에 붙이지 못한 채 서 있네요. 하지만 위태해 보이진 않아요. 뭔가 곧게 서서 한 곳을 집중하는 모습이 당당하게 보이기까지 해요.
우린 창조자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피조물들이라죠. 당신도 그녀도 그러하듯이. 사람들이 당신의 창조자 이름을 딴 예배당을 찾아 명상하거나 모든 작업을 묵상하듯 하던 그녀의 창조자를 기억하는 건 어쩌면 같은 이유에서일 거예요. 당신과 그녀가 닮은 이유죠.
당신의 감정은 검은색인가요. 당신의 창조주가 느낀 마지막 감정은 하얀 선이 그어진 빨강이었다죠. 검은 감정은 절망이었을까요, 슬픔이었을까요. 하얀 선이 그어진 빨강은 스스로 손목을 그은 아픔은 아니었을까요.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인간의 근본적 감정과 본질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묵상하고 전하려 했던 당신과 그녀의 창조자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검은 화폭으로 다시 만난 마크 로스코의 피조물인 당신과 묵상하듯 앙상한 몸으로 당신 앞에 서 있는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피조물, 그녀. 그리고 당신들을 마주하고 있는 나. 우리 셋의 만남을 추억하는 오늘 내 감정의 색은 ‘검은색 위에 빨강’입니다. 그게 도대체 어떤 감정이냐고요? 궁금하시다면 내게 좀 더 가까이 다가와 직접 느껴보세요. 나도 이 감정의 색이 참으로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