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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러 오지 않는 엄마

일곱 번째 유성 한 조각

by 엔키리 ENKIRIE

아버지에게 내 아르바이트 월급의 전액을 보내는 행동을 멈추게 된 건, 그보다 한참 후의 일이다.


나는 결국 몸져누워서 완전히 일을 못하게 되었다.


당시 나는 과도한 학원 아르바이트의 부작용 때문에 편두통이 생겨 버렸고, 두통이 발생하는 주기가 잦아지며 일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아르바이트를 완벽하게 그만두자마자 극심한 편두통으로 3일 내내 침대 신세를 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 겪어 본 편두통은 상상 이상이었다.


누워있는 상태로 고개를 옆으로 살짝 돌리는 것마저도 불가능할 정도로.

편두통의 통증은 격렬하게 나를 괴롭혔다.

그래서 침대에 누워있던 3일 동안 밥 한 끼도 온전히 먹지 못한 채 물 한 모금도 간신히 넘기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때에도 나의 어머니는 내게 어떠한 미안함도 반성도 없었다.

그저 자기 친구였던, 그리고 내가 아르바이트를 했던 학원의 원장이었던 그 사람 탓만 할 뿐이었다. 내가 아픈 건 모두 그 학원 원장 때문이라며…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책임에서 회피할 뿐이었다.


더하여, 자신의 딸이었던 나를 위한 병간호 또한 없었다.

남들이 들으면 그게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 있지만, 그런 사람이었다, 나의 어머니는.


3일 내내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딸을.

살뜰하게 간호하는 일이라고는 있을 수 없는 사람.

그냥 살아 있는지 확인하는 정도의 수준으로.

출근하기 전, 그리고 퇴근 후.

내가 누워있는 방에 들어와 ‘에휴’ 한숨을 한 번 쉬고, 또 자기 할 일만 하러 나가는 사람.

그러고는 내가 쉬어야 한다는 핑계로 내가 찾기 전까진 절대 내 방에 들어오지 않던…


내가 유치원생일 때부터 나를 혼자 병원에 가도록 500원 동전으로 꼬드겼던 사람.

초중고 내내, 나에게 ‘쓰러질 거면 학교에서 쓰러져라.’라고 말할 정도로, 내가 고열이 올라도 어떻게든 학교에 보냈던 사람.


그로 인해…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뇌수막염 때문에 열이 올랐을 때도, 학교에 갔다가 조퇴를 했어야 했고.

중학교 때, 홍역에 걸려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열꽃이 핀 상태에서도 내 스스로 택시를 타고 집에 와야 했었고.

고등학교 때, 교내에서 단체로 헌혈을 하던 중 나 혼자 쓰러져서 학교가 발칵 뒤집혔는데도 잠시 보건실에 누워서 쉬다가 혼자 택시를 타고 귀가했어야 했다.


때때로 나는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눈물짓는다.

앞서 언급한 사건 중, 고등학교 때 헌혈을 하다가 쓰러졌던 날.


그 순간. 헌혈 버스 안에서 입술까지 파래진 채로 실려 나오는 나를 보며, 이를 목격한 다른 학생들이 순식간에 문자로 각자 자신의 다른 친구들에게도 연락을 돌린 것이다.

무엇보다, 내 다음으로 헌혈의 순서를 기다리던 학생들이 태반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학교 전체에 삽시간에 나에 대한 목격담이 퍼지는 건, 마치 산에 붙은 불길이 번져나가는 속도와도 같았다.


그리고 나와 같은 반 혹은 다른 반 할 것 없이, 교내에서 나를 알고 있던 모든 친구와 선후배들이 쉬는 시간마다 양호실에 들락날락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특별히 친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친구들은 특히나 보건 선생님에게 ‘수아네 엄마는요? 언제 오신대요?’라는 것까지 물어볼 정도로 살뜰히 나를 챙겨줬다.

내 몸이 약해서 곧잘 아팠기 때문에 나랑 친한 친구들은 언제나 내 건강을 살펴줬다.


하지만 내 친구들은 보건 선생님으로부터 자신들이 원하는 답을 들을 수 없었고, 결국 아무 반응이 없는 나보다, 자기들이 더욱 크게 울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야, 정수아… 너네 엄마는 대체 왜 너를 한 번도 데리러 오지를 않아…?”


쓰러진 후 온몸에 힘 하나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던 나는 그저 아무 감정 없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딱 한 마디만 전할 수 있을 뿐이었다.


“… 원래 그래….”


그 말 하나만을 뱉은 채,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리기 전까지, 내 옆에서 엉엉 울던 친구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저 속으로 생각할 뿐이었다.


‘빨리 택시 타고 집에 가야지….’


조금이라도 내 상태가 더 호전되길 바라며, 나는 다만 학교라는 공간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을 뿐이었다. 도저히 학교 안에서 그 이상 버틸 힘도, 정신도 없었다.






하지만 내 친구들이 자기 일처럼 울면서 말하던 게 어떤 의미인지, 나는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다.


당시 나는 언니와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우리는 한 학년 차이 밖에 나지 않았다.

그리고 나의 언니의 학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나의 어머니 또한 학교에서 학부모회에 소속되어 일을 하고 있었다. 그건 이미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계속해 온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내 친구들은 모두 나의 어머니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나의 어머니가 나의 언니를 위해 학부모회 일을 해야 할 때마다 학교에 왔기 때문이다.


때로는 집에 가는 통학 버스를 놓친 언니를 데리러 학교까지 오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나의 어머니는 내가 학교에서 코피를 쏟았거나 쓰러졌다고 했을 때는 단 한 번도 학교에 온 적이 없지만, 나의 언니에 대해서는 종종 예외적인 태도를 보여주곤 했다.

그리고 내 친구들은 그때마다, 다 함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고, 또 두 귀로 정확하게 들었던 것이다.


정확한 시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여느 날처럼 나의 어머니는 직접 자신의 차를 운전해서 학교에 왔고, 그 옆자리 조수석에는 나의 언니가 세상 편안한 모습으로 의자를 젖힌 채 거의 뒤로 눕듯이 앉아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같이 차를 타고 학교를 벗어나던 중, 교내에 있던 나와 내 친구들을 발견한 후 먼저 다가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당연히 내 친구들은 예의 바르게 인사했고, 나 또한 말했다.


“어? 엄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어머니!”

“응, 그래. 네가 인영이고, 너는 주은이지. 다른 친구는 누군지 처음 보네.”

“안녕하세요! 저는 은서요, 유은서! 이번에 수아랑 처음으로 같은 반 됐어요. 처음 뵙겠습니다!”

“응, 그렇구나. 안녕.”

“근데 엄마 어디가? 언니는? 왜 벌써 집에 가?”

“야, 정수아. 나 집에 가는 거 아냐.”

“그럼, 언니 어디 가는데?”

“응. 언니가 아파서. 엄마가 병원에 좀 데려가려고.”

“헐… 어디가 아픈데?”

“야, 됐어. 아프니까 말 시키지 마. 엄마 빨리 가. 정수아 시끄러워.”

“응응. 수아야, 엄마 먼저 갈게. 언니 아프다니까 이따 집에서 보자. 그리고 친구들도. 아줌마 먼저 갈게. 너희도 공부 열심히 하고.”


언제나처럼 나의 언니는 내 질문을 무시했고, 그런 언니의 눈치를 보며, 엄마는 빠르게 사라지려고 했다.

문득 ‘나는 학교에 데리러 온 적 없는데…’라는 생각이 스쳤지만,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그때는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으응.”

“예! 안녕히 가세요!”


그렇게 나의 어머니는 언니를 데리고 금방 사라졌고.

잠시였지만, 내 친구들은 내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평소 나의 가족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를 미심쩍어하던 친구였던 주은이가 한마디 했다.

“야… 너네 엄마가 너네 언니는 데리러 오시는구나…?”


사실 주은이는 다른 친구들하고 생각하는 사고 자체가 달랐다.

주은이는 언제나 당당했고, 그로 인해 다른 친구들과 다른 의견으로 부딪히는 걸 주저하지 않는 친구였다.

그녀는 자신이 영미권 문화를 선호하며 ‘서구식 사고’를 한다고 주장하고는 했던 친구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주은이네는 아버지가 가부장적 태도에 남아선호사상이 강하시다 보니, 특히 그 문제에 대해 민감했던 걸로 기억한다. 주은이가 남동생과 차별을 당하는 게 컸기 때문에.

주은이는 그러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억울함을 여러 차례 친구들에게 호소했었다.


그래서 더욱 민감하게 알아차렸던 걸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가정 안에서 차별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쨌든 그렇게 말한 주은이는 그저,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조용히 교실로 인도했을 뿐이다.

다른 두 명의 친구들도 침묵한 채 우리의 뒤를 따랐다.

그날따라, 우리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은 채, 그렇게 교실에 다다라서야 장난을 치기 시작했었다.


때때로 나는 그 시절, 내 옆자리를 지켜주고, 나를 위해 울어주던 그 친구들이 그리워서…

울컥하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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