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번째 유성 한 조각
예상했던 대로.
나는 편두통과 척추분리증으로 아팠음에도 오래 쉬지는 못했다.
나의 어머니가 주장하길. 내가 삼촌 건물에 엮인 아버지의 돈을 갚아야 하기 때문에 쉴 틈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금 내게 일자리를 구해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삼촌이 구해온 일자리였고, 불법적인 상황과 연루된 일자리였다.
나의 둘째 삼촌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생활을 무척 즐겼고, 좋아했다.
삼촌이 본래 사교성이 높은 편이다 보니, 사업을 할 때 거래처 사장 또는 사업 승인 담당자들과 술자리를 가질 때가 많았다. 그건 국가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나의 삼촌이 나를 위한다며 갖고 온 일자리라는 건, 모 국가기관의 ‘육아휴직 대체 근로자’ 자리였으며, 삼촌이 누군가의 선거를 도운 후에 그 사람이 당선되면, 나를 그 기관의 공무직으로 전환해 준다는 제안이었다.
삼촌은 그 사람이 당선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나의 어머니는 일평생을 둘째가 첫째보다 부족한 아이라며, 내가 못난 아이라고 낙인을 찍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삼촌이 구해다 준 그 부정한 일자리를 통해서 내가 공무직으로라도 들어가길 진심으로 바랐다.
그런 식의 부정 청탁이 아니면, 내가 변변찮은 직장에 취업하지 못하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내게 어떠한 종류의 문제가 없었음에도 나의 어머니의 그러한 신념은 상당히 확고했다.
“형제끼리 수준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안 돼.”
성인이 되고 난 후, 나의 어머니가 내게 지속적으로 세뇌하듯 했던 말이다.
나의 언니는 소위 말하는 인 서울 명문대 법학과에 진학했지만, 나는 지방대에 진학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했었다. 그것도 내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가 아닌 부모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그리고 역시나 부모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한 나는 결국 자퇴를 하고 말았다.
더 정확한 사유를 말하자면, ‘교수의 성추행’ 때문에 결국 자퇴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나의 어머니에게 내가 그러한 사유로 자퇴를 했다는 사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당시, 대학 교수의 여러 차례 이어진 성추행 행위에 지친 나는 자퇴를 하고 싶다 말했으나, 어머니는 안 된다 말했고, 결국 나는 어머니와 언니 앞에서 ‘교수한테 성추행 당했다고!’라고 울며 외친 후에야 자퇴 승인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나는 한동안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의 어머니는 ‘우리 집에 고졸은 있을 수 없다.’라고 주장하며, 나를 소위 말하는 평생 교육대학 시설에 강제 입학시켰다.
그 후, 이전에 말했던 학원 아르바이트까지 연결을 해준 것이다.
“너는 부모가 원하는 대학교에 가지 못했으니까, 지금부터 네 용돈은 네 스스로 벌어서 생활해야 한다.”
언제나처럼 고압적인 명령의 말.
하지만 나의 부모는 둘 다 거의 목소리 톤을 높이는 일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고함을 치는 경우도 극히 드물었다. 오히려 남들이 들으면 상당히 다정하거나 마치 친구 같은 장난스러운 어투를 사용하는 사람들이었다.
내 친구들도 '교양 있다.'라고 일컬을 정도로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알 수 없었다.
그들의 그러한 ‘말투’ 때문에 내가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루밍과 가스라이팅을 당해왔다는 사실을.
그래서...
"네가 그때 그 대학교만 그만두지 않았어도!"
내가 당시 대학 교수로부터 성추행을 당해서 자퇴를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나의 어머니는 내게 이 말을 5년 동안 했다. 그리고 그때마다 나는 내 자신이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은 심정으로 어머니에게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절에는 그게 마치 죄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부모가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자녀. 그들에게는 대체로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사회적으로도 말이다.
그렇게 과거에는 학력 하나 때문에 부모로부터의 무차별적인 언어폭력을 감내해야만 했던 씁쓸한 시절을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 어느, 시기를 특정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았던 숱한 자녀들이 말이다.
어쨌든 이게 내가 앞서 언급했던 학원의 아르바이트를 시작하게 된 계기였다.
정확히는, '내가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모습'을 보기 싫어했던 어머니가 연결해 준 아르바이트이다.
물론 그렇게 말했던 어머니는 내가 이래저래 모은 아르바이트 비를 결국 삼촌의 사업 문제가 터지자마자 내 모든 갈취해 갔지만 말이다.
또한, 나를 위한다며 삼촌이 갖고 온 육아휴직 대체 근로자 아르바이트를 할 때도, 그들의 착취 행위는 멈추지 않았다. 그 국가기관에서 일하는 내내 거의 마지막 달, 가장 적은 금액의 급여가 들어온 날을 제외하고는 계속, 쉬지 않고, 아버지에게 나의 월급 전체를 이체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나는 어머니가 낙인찍어 놓은 만큼 어리석거나 완벽한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순간,
‘어차피 서류상으로 내가 진짜 건물주가 아니라고 했는데, 왜 내가 아버지 돈을 갚아야 하지? 아버지랑 막내 이모가 진짜 건물의 주인이라고 자기들끼리 법적 공증도 받아놨다고 하지 않았나.’
이 생각이 번뜩 들었고, 여느 때처럼 전화로 ‘아빠한테 돈 이체 했어?’라며 나의 급여를 아버지에게 전액 보냈는지 확인 전화를 하는 어머니에게 분명한 거절의 의사를 표현했다.
저 생각과 함께 상당히 논리적인 주장을 펼치며 말이다.
분명 내 소유의 돈이고, 나에게 권리가 있는 돈이었음에도.
왜 그렇게까지 처절하게 나를 변호하는 말을 하면서까지, '나는 ~래서 돈을 이체할 수 없다.'라고 했어야 했는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저 헛웃음이 나오는 상황일 뿐이다.
그리고 그제야 나의 어머니는 작게 한숨을 내쉰 후, 내게서 돈을 갈취해 가는 행위를 멈췄다.
정확히는, 돈을 갈취하는 행위‘만’ 그만두게 된 것이었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