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한 번째 유성 한 조각
비가 내리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몸살로 괴로워해야 했다.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머리부터 발 끝까지, 마치 물 먹은 솜처럼 무겁고 아릿한 통증 때문에 20년 넘는 인생을 그렇게 앓아야 했다.
명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비가 내리면 우울해지거나 몸이 쑤신다고 말하는 주변인들을 보고 자라다 보니, 나 또한 '계절성 우울증'처럼 날씨의 영향을 받는다고 여길 뿐.
그리고 그 이유를 너무 늦지 않게 깨닫게 되었다. 심리치료를 통해서.
어느 날부터 불현듯 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움튼 자살 사고 또한, 이 사건의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도.
다행히 알게 된 것이다.
*다소 폭력적인 장면이 묘사되어 있사오니, 읽는 분들의 주의를 요합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잘 몰랐지만,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 당시 내가 살던 마을에서는 아이들에 대한 '유괴' 사건이 발생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동네 분위기가 꽤 적막했다고 하는데, 아이였던 내가 뭘 알았을까.
여느 날처럼 아무렇지 않게 가족끼리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나는 깜빡했던 숙제가 생각나서 동네 친구에게 그에 대해 물어보기 위해 옷을 챙겨 입었다. 어느덧 해가 짧아서 밖은 벌써 어두워졌지만, 시간은 그리 늦지 않은 이제 막 저녁 7시가 넘은 시간.
평소처럼 식사 후 설거지 중인 어머니의 등에 대고, '엄마, 나 ~한테 잠깐 다녀올게!'하고 간편한 차림으로 집을 나섰다. 그리고 돌아왔을 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도 없는 집을 보고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렇게 혼자 의아해하면서도 딱히 이상한 기운은 감지하지 못해서였을까.
'띵동'
"어? 누구야? 엄마? 아빠?"
"......"
"아빠! 집에 문이 다 열려 있었어! 어디 갔다 왔..."
내가 집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들어서는 아버지를 마주한 채 나는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이제껏 본 적 없는 무서운 얼굴의 아버지가 흉흉한 기세를 띤 채 나의 얼굴을 뚫어버릴 것 같은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때 내가 친구네 집에 가자마자 가족들이 모두 혼비백산이 돼서 나를 찾아 나섰고, 평소 아버지가 욱하면 어떻게 돌변하는지 알고 있었던 어머니는 순간 아차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와 언니가 함께 찾다가, 급히 언니를 먼저 집으로 보냈지만, 결국 아버지가 먼저 도착하는 참사가 일어났던 것이라고.
그다음부터는 드문드문 슬로 모션처럼 선명한 기억들이 자리했다.
바짝 얼어붙은 내게 거침없이 다가온 아버지는 그 큰 손으로 나를 후려쳤고, 그 방향 그대로 나는 사정없이 거실 어딘가로 내동댕이쳐졌다. 하지만 아버지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금세 내게 다가와 나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 들어 올렸으며, 또다시 미친 사람처럼 내게 폭력을 휘두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어느새 언니도 집에 들어왔지만, 이미 피칠갑이 된 나를 목격한 언니는 나보다 더 겁에 질려서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런 언니를 발견하고는 잠시 나를 때리던 걸 멈춘 채 이렇게 외쳤다.
"주아 넌 들어가 있어!"
극도의 분노로 흥분한 아버지는 씨근대는 숨을 몰아쉬며 언니에게 외쳤고, 언니는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물을 줄줄 흘리며, 덜덜 대는 걸음을 옮겨 최대한 우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보면서도 오직 살기 위해 연신 손을 싹싹 빌며 이렇게 말했다.
"자, 잘, 잘, 잘못했어요! 살, 살, 살려주세요! 제발 살려주세요! 잘못했어요!"
"일어나!!"
자신의 힘으로 나를 무너뜨린 아버지는 다시 또 내게 자신의 분노를 쏟아내기 위해 강압적인 명령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 나는 맞아서 고꾸라졌던 몸 그대로 바닥에 납작 엎드려 빌다가도, 아버지의 목소리조차 무서워서 몸을 일으켜서 또 빌었다. 손이 닳도록 빈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그때 처음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지시를 따라도 무자비한 폭행은 도저히 멈출 줄을 몰랐다.
'철썩! 퍽, 퍽!!'
"아악...!"
내 입술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어느새 오로지 살고 싶다는 심정으로 계속해서 잘못했다고 살려달라고 빌던 행위조차도 멈춘 상태였다. 방으로 들어가 몸을 숨긴 줄 알았던 언니가 문 틈새로 내가 맞는 모습을 보며 계속 울고 있었던 것이다. 자꾸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은 채 말이다.
그러니까, 언니는 자신의 눈을 통해 그날의 그 장면을 모두 오롯이 담아내고 있었던 것이다.
‘신체적 학대’의 피해자와 ‘정서적 학대’의 피해자.
그게 그날, 마냥 보호받아야 마땅했을 어린 두 자매가 겪어야 했던 고통이었다.
'차라리 죽고 싶다.'
인간의 통각에도 역치가 있을까.
느껴지는 통증의 정도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선 순간부터, 나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잊은 채, 내가 왜 맞고 있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려워졌다.
내가 뭘 그리 잘못한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무조건 잘못했다고 빌어도 안 되는 거라면, 그저 그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싶었다.
오히려 너무 아프면 소리조차 나오지 않는구나 실감하며, 아버지의 폭력에 무력하게 나가떨어질 때마다, 주변 장면들이 점점 더 느릿하게 그리고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어느 이름 모를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처럼, 내가 겪는 그 폭력의 시간이 남의 얘기처럼 보인 것이다.
'긴장성 부동화(tonic immobility)'
주로 성폭력 피해자들의 상태를 설명하기 위해 알려진 개념이지만, 그 뜻은 극심한 긴장이나 공포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움직일 수 없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나의 경우에도 설명할 수 있는 개념이라고 생각된다. 특히, 해당 상태를 설명하기 위한 척도 질문 중에 다음의 문항을 보며, 나는 물론이고 내가 만났던 가정폭력 피해자들이 말했던 내용과 일치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소리를 내거나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공포감이 들거나 공황을 느꼈다'
'죽게 될까 봐 두렵거나, 곧 죽을 것 같다고 느꼈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나 자신으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그 일이 일어나는 동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로부터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결국 아버지로부터 몰아치던 끊이지 않을 것 같았던 폭력은 아버지의 기력이 어느 정도 소진되고 나서야 멈출 수 있었다.
그렇게 나의 동의 따윈 중요치 않았던 폭력은 아버지로부터 시작돼서 아버지에게서 끝이 났다.
"방에 들어가 있어!"
화가 난 아버지는 마지막까지 고함을 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끝까지,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외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때는 언니와 같은 방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덜덜 대며 울고 있는 언니가 있는 방으로 흡사 기어가듯 들어가야 했다.
얼굴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입안이 다 터져서 얼굴은 물론이고 옷까지 온통 피범벅이 된 나를 보며, 언니는 엉엉 울며 어쩔 줄 몰라했다.
"수, 수, 수아야아... 아, 아, 아프지이... 이, 이리 와..."
나는 그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프고 힘도 들어가지 않아서 언니가 급하게 펼친 이불 위에 모로 누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 방에는 피를 닦을 수 있는 것도 마땅치 않았다.
그래서 언니는 용기를 내서 문을 빼꼼 열어 보더니, 아버지가 안방으로 들어갔는 지부터 살폈다.
아버지가 없는 걸 확인하고는 후다닥 아버지 몰래 화장실에 가서 휴지에 잔뜩 물을 적셔 왔다.
"아, 아파... 아..."
너무 많은 양의 피는 제대로 닦이지 않았고, 서툰 언니의 손놀림에 나는 또 다른 아픔을 호소해야 했으며, 어떻게든 동생을 도와주려던 언니는 계속해서 우느라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게 두 어린 여자아이들은 아직 집안에 있는 괴물의 그림자에 공포를 느끼며, 숨 쉬는 것조차 눈치를 보다 보니, 철철 흐르는 피를 어쩌지 못할 수밖에.
그 와중에 아버지는 갑자기 또 문을 벌컥 열었다.
"수아 너 나와!"
"아, 아빠 제발...!"
나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었기에 이번에는 언니가 용기를 내서 빌었다.
부디 더 이상 자신의 동생을 때리지 말라며, 울며 빌었다.
그게 그 소녀에게도 최선의 용기였을 것이다.
"나와서 피 닦아!"
뜻밖의 말이 들렸고, 나는 일으켜지지 않는 몸을 최대한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을 보니, '나한테 이런 얼굴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로 피떡이 된 낯선 여자 아이가 보였다.
"박박 씻어! 깨끗이!"
상처 위에 닿는 물기가 몹시 쓰라렸지만, 아버지의 명을 어길 만한 배짱은 없었다.
폭력에 대한 굴복이라는 게 그랬다. 당장 내가 아픈 것보다 내 위에 군림한 자에게 복종하지 않았을 때 돌아올 보복이 더 두려웠다. 그래서 최대한 빨리 씻고 들어가기 위해 조금 과감한 손놀림으로 얼굴에 물도 묻히고, 닦아 내기 위해 힘을 주기도 해야 했다.
내가 화장실에서 씻고 나오는 동안, 언니에게 또 '수아 옷 어딨어!'하고 호통 쳤던 아버지의 손에는 자신의 행위를 어느 정도 말끔하게 지워줄 만한 옷가지가 손에 들려 있었다. 내 티셔츠와 바지였다.
주인을 닮아 아무런 힘도 없이 아버지의 손아귀 안에서 구겨져 있던 내 옷들은 그렇게 그의 손에서 던져지듯 나에게로 옮겨져 왔다.
피가 묻은 옷을 벗고, 깨끗한 옷을 갈아입는 동안에도 고개를 숙이거나 팔을 살짝 구부리는 것조차 너무 아팠다. 하지만 그런 일 하나하나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이미 안방 문은 닫혀 있었고, 나는 문 닫힌 내 방에서 옷을 갈아입었지만, 언제 또 저 문이 열릴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없던 힘을 그러모아, 온몸이 아프다 지르는 비명도 무시한 채 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그렇게 폭력이 주는 굴욕감까지 온전히 경험해야만 했다.
고작 10살도 안 됐을 때 말이다.
얼마 후 어머니가 집에 돌아왔고, 엉망진창이 된 거실과 아직 화가 덜 풀린 아버지, 간신히 숨만 헐떡이는 나와 눈물범벅이 된 언니를 보고는 한숨을 쉬었다.
그 후, 나는 한동안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거짓말만 해야 했다.
우리 아버지는 동네에서도 소문난 애처가에 자식들에게도 다정한 아버지였기에. 무엇보다 우윳빛처럼 하얀 피부에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의 이미지를 그렇게 유지해 주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부모가 시키는 대로 밖에서 아버지에게 맞았다 말하지 않았다.
"계단에서 굴렀어요."
당시 우리 집은 1층이었지만, 빌라였기 때문에 어느 층계의 계단에서 굴렀노라고. 그렇게 말하니 통했다.
그리고 한동안 아버지는 가족들이 다 같이 식사를 할 때 내게 직접 밥이랑 국을 떠먹여 주거나, 퇴근길에 내가 좋아하는 통닭을 사서 귀가하는 등 자신의 죄악감을 덜어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사정없이 찢어진 입술이 회복되는 데 특히 오래 걸렸기 때문에 그게 당신의 눈에도 자꾸 밟혀서 그러는 듯 보였다. 직접 밥과 국을 떠먹여 주는 일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왜 깜깜한데 말도 안 하고 나가."
내 탓을 하는 말도 잊지 않고 말이다.
나는 분명 어머니와 아버지에게 '엄마에게 말하고 나갔어.'라고 항변했지만, 어머니가 못 들었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은 것이 되었다.
이날 아버지의 폭력에 대한 기억은 우리 가족 모두에게 상당히 깊숙하게 남았다.
특히 내게는 잊을 수 없는 상흔처럼.
"그땐 네가 잘못한 거야. 엄마가 설거지할 때는 누가 말해도 잘 안 들린다는 거 알잖아."
어머니가 나를 탓하는 말과 함께.
"그때 동네에서 애들이 유괴되고 그러니까 얼마나 흉흉했는지... 그니까 네 아빠가 얼마나 놀랬겠어. 근데 넌 밖이 시커먼데 보이지도 않고. 네 아빠가 꼭지가 돌지, 안 돌아? 네 아빠가 너네라면 벌벌대는 거 알면서... 그니까 잘못했지, 네가."
언제나처럼 나의 죄악으로 자리 잡은 채 말이다.
성인이 된 후, 가정폭력에 대해 공부하고 피해자들을 만나며 알게 되었다.
가정폭력에서 자신의 아이에게 학대를 저지르는 부모들은 끊임없이 자신들의 폭력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한다는 사실을.
그로 인해, 피해자들이 자신을 학대한 부모도 부모라고, 그나마 먼저 부모와 화해를 하기 위해 시도해도 온전한 용서와 화해의 장이 만들어지기 어렵다는 현실을 말이다.
가정폭력 피해자들의 삶에 온전한 볕이 드는 날은 언제일까.
나는 아직도 그 틈새를 찾아 헤매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