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번째 유성 한 조각
말하자면, 나의 아버지는 삼촌의 건물에 얽힌 나의 문제에 있어 전혀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하는 존재였다는 것이다.
내가 삼촌의 건물에 이름이 묶인 이후, 어머니를 통해서 계속해서 자기에게 돈을 갚으라고 종용한 것만 봐도, 그들이 확실한 공범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자신도 어머니에 의한 피해자이며,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주장했는데.
‘난 진짜 아무것도 몰랐어. 그냥 회사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네 엄마가 전화가 온 거야. 그러더니 막 수아가 큰일 났다고 막 난리를 피우니까.’
그로 인해 자신도 급하게 회사의 직장 내 대출을 최대한 받아서 어머니에게 돈을 이체했다고.
아버지 자신은 언니의 명문대 법대 등록금과 사법고시 비용을 대야 하느라 힘겨웠는데, 그거 때문에 더 죽을 뻔했다고. 그 말만 기계처럼 반복하고는 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는 사실은, 그렇게 삼촌이 사업을 하는 건물에 내 이름을 묶어두고.
나만 모르게 한 채, 어머니, 아버지, 언니, 둘째 삼촌, 막내 이모 모두가 내가 실제 건물 주인이 아니라는 법적 공증 서류를 만드는 데 동참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실제 당사자가 아닌 큰 이모와 막내 삼촌까지도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외갓집 식구들, 즉 어른이라는 항렬의 모두가 나를 바보로 만드는 일에 힘을 하나로 모았다는 것이다.
홧김에 내게 막말을 했던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당사자인 나로서는 도저히 몰랐을 진실.
그들은 거기에 침묵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아버지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자기도 피해자라는 주장은 그렇게 신빙성을 잃었다.
특히 다음의 일화를 통해 그러한 아버지의 주장이 완전히 틀렸다는 걸 입증할 수 있다.
2009년 7월 16일.
내 일기장에 남아 있는 기록이다.
그날 나는 이런 이야기를 적어두었다.
결국 삼촌 건물의 융자금 이자는 나의 어머니가 내게 내도록 지시했다는 것.
그리고 바로 전날인 7월 15일에는 삼촌의 사업에 문제가 생기자, 돌아가신 큰삼촌의 아들 중 한 명인 큰오빠가 삼촌의 사업을 돕기로 했는데, 그 과정에서 가족들 간에 다툼이 있었다는 것.
상황은 이랬다.
어머니와 막내 이모가 큰오빠에게 삼촌네 회사 자료를 보내주기 위해 삼촌에게 사무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물어본 뒤, 저녁 늦은 시간에 그 회사에 찾아갔다.
하지만 그새 삼촌의 입장이 달라진 것이다.
왜 자신의 사무실을 자기가 없을 때 뒤지느냐며, 나를 그렇게 못 믿느냐며 난리를 피운 것이다.
그 후 삼촌은 곧바로 당시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던 나의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고, 아버지는 또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뭐 하는 거야! 당장 철수해! 어서!”
라며 화를 내고 연신 성질을 냈다는 것이다.
이때 아버지가 사용한 '철수'라는 단어는 그저 웃음이 나올 따름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아버지는 내 앞에선 자기도 피해자라고 주장했지만, 삼촌하고 술 한 잔을 하고 올 때마다 전적으로 삼촌의 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바로 그 전 주에 삼촌과 함께 술을 마셨고, 그 과정에서 삼촌이 자신의 힘든 심정을 토로하며, '누나들이 나를 계속 불러댄다', '일도 못하게 한다' 등의 소리를 했고. 이를 들은 아버지는 삼촌을 가엽게 여기며, '그런 일이 또 생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못하게 막아 줄게.'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아버지의 그러한 연민은 딸인 나에게는 단 한 톨도 향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둘의 그러한 대화의 장면을 여러 차례 목격해야만 했으니까.
특히, 아버지는 삼촌에게 이 말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네 건물 아무도 못 건드리게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 넌 마음 놓고 사업만 해! 사업하는 사람이 마음이 편해야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볼 때마다, 가슴 깊이 가라앉는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게는 어머니도 없었지만, 사실 아버지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기간 동안 처절하게 깨달아 나갔다.
인생에 더 없을 가르침의 시기였다고, 나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