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네 번째 유성 한 조각
삼촌은 그렇게 내게 건물의 이름을 덮어 씌운 이후에도 도저히 남이라고 해도 그렇게까지 안 할 것 같은 행동들을 반복했는데. 나는 지금도 그 서류가 잊혀지지 않는다.
‘최고장’
2010년 9월 10일부터 그 문제에 대한 내용이 나의 일기장에 종종 언급돼 있었고, 당시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 20년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단어였기에.
듣기로는, 삼촌이 그 건물에서 계속해서 사업을 하는 대신에 건물 융자금의 이자를 월세로 지불하기로 약속했었다고 한다. 건물주인 나는 모르는 삼촌과 어머니가 진행한 임대차 계약이 그러했다.
본래는 그 이자까지 내가 감당하도록 하며, 내게 아버지에게 돈을 이체하라고 어머니가 계속 종용했지만. 내가 결국 왜 내 건물도 아닌 걸로 아버지에게 돈까지 보내야 하느냐며 강하게 저항하자, 어머니가 그때부터 아버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건물의 융자금 이자를 삼촌이 내도록 하게 했고, 그로 인해 체결된 계약이 그것이었다.
한 마디로, 그전까지 삼촌은 그 건물에서 어떠한 월세도 내지 않은 채 계속해서 사업을 진행해 온 것이었다.
하지만 삼촌은 건물의 융자금을 대출받은 S은행 담당 직원에게 매번 ‘얘는 어차피 내 조카야. 그니까 건물에 이름만 있는 애니까, 은행 관련된 건 전부 나한테 얘기하면 돼.’라며 마치 나를 위해주는 척 말했었다.
그리고 그게 화근이 되었다.
삼촌과 그 S은행 직원은 서로 친밀한 관계였고, 그 때문에 종종 나를 따돌렸다.
명백한 불법적 행위를 저지른 것이다.
최고장 문제도 그중 하나였다.
삼촌이 융자금 이자를 내지 않고 있었다면, 은행 담당 직원이 내게 연락을 줬어야 했는데, 그 은행은 그러지 않았다. 그러니 내가 심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도 해당 은행에서는 어떠한 은행 업무도 진행하지 않게 됐다.
어쨌든 내가 그 서류를 받았을 때, 그제야 언니도 삼촌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나와 언니는 삼촌이 문제였다고, 삼촌이 사업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반응은 역시나였다.
“니들까지 삼촌을 무시하면 안 돼!”
상당히 화가 난 표정으로 나와 언니를 나무랐다.
그런 어머니의 반응에 나는 너무 황망해서 말도 채 나오지 않았지만, 언니는 무어라 한 마디 더했다.
그리고 그조차도 어머니의 엄한 반응으로 인해 차단당했다.
마치 숲에서나 살 것 같은 들짐승이 자기가 새끼를 낳았는데, 새끼의 상태가 온전치 못하니까.
나쁜 인간들의 손이 닿을까 봐 사납게 지키고 경계하는 모습처럼.
당시 어머니는 삼촌을 향해 다른 가족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마다, 그런 식으로 전면 차단하는 형태를 취했다.
알고 보니, 삼촌이 자신의 사업 때문에 큰 이모와 막내삼촌의 돈도 억 단위로 빌린 상태에서 제대로 갚지도 않고 있었지만. 어머니에게 있어 그런 다른 가족들의 실정은 전혀 중요치 않은 듯 보였다.
그저 삼촌이 자살하려고 다리에서 목을 맸었다는 얘기만 계속해서 중얼거릴 뿐.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의 가정 내에서 삼촌과 관련하여 어떠한 부정적인 감정도 표현할 수 없었고, 그렇게 찾게 된 게 친구들이었다.
나의 친구들은 언제나 내 말을 차분하게 경청해 주었고, 때때로 내 슬픔과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해 주는 반응도 보여주었다.
특히, 최고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 친구가 보여준 반응이 아직도 내게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최고장…? 그건 우리가 평생 몰라야 하는 단어 아니야…?”
나는 그때의 그 말과 친구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마치 내가 어딘가에서 잃어버리고 온 것 같은 절망감을 내 친구가 대신 느껴주는 것처럼.
그렇게 제대로 된 공감 덕분에 사람으로서 고장 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삼촌의 그러한 만행이 거기서 멈췄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처럼, 삼촌도 그러했다.
그 후에도 삼촌이 내게 저지르는 죄악들은 전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