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에는 묘미가 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재미와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를 만나기도 하니 말이다. 인제에서 묵었던 2박 3일 동안, 환상적인 자작나무숲 풍경에 흠뻑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가 보고 나서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는 12선녀탕을 보러 갔다가 통제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기도 하고, 백담사까지 물 한 모금 못 마시고 1시간 30분을 걸어 들어갔다가 막차 나올 시간이어서 바로 되돌아 나오기도 하고, 양구에 있는 박수근미술관에 가 그의 유명한 작품들을 감상하고, 양구펀치볼에 갔다가 난생 처음 땅굴구경하려 했지만 쉬는 날이라 그냥 와야 했던 일 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가 묵은 내린천 주변의 산들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연둣빛을 가득 품고 있는 산들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원시림 같았다. 울창한 나무들 때문에 내가 살고 있는 둘레의 산들이나 일반 산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가을이면 마을 사람들이 송이 따러 들어간다던데 사람이 범접하기 어려운 산으로 보였다. 그렇다고 쌀쌀맞거나 위엄 부리는 산은 아니었다. 그냥 바라만 보아도 편안하고 행복했다.
그런 산세 닮은 부부를 만났다. 바로 우리가 묵은 쌀라네집 주인 부부이다. 도착했다는 내 전화를 받고 안에서 나온 아내 분을 보자마자 바로 안심했다. 아무리 사진과 후기들을 많이 보았다고 해도 직접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을 보면 안다. 아무 치장도 하지 않은 얼굴에서 고상함이 배어 나왔다. 말수도 많아 보이지 않고 신중해 보였으며 단정한 외모를 하고 있었다. 안내되어 들어 간 방 분위기 역시 차분하고 깔끔했다. 테이블, 씽크대, 침대 등은 목재였으며 흰색 분위기로 꾸며져 있었다. 군더더기 없는 건 사람이나 방이나 같았다.
이틀을 묵고 나올 때도 그러했고,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도 인제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사장님 부부였다. 그분들의 살림집은 숙소 아래에 따로 있었으며 그 옆에 조그마한 카페가 있었다. 예전에는 영업했는데 지금은 손님들만 이용하는 공간이란다. 아침에 가면 커피를 주신다고 해서 이틀 동안 내려가 그분들과 함께 마셨다. 커피는 남편 분이 핸드드립으로 내려주셨다. 커피도 맛이 있었지만 그분들과 함께 나누는 이야기가 더 맛있었다. 말수가 적은 남편보다는 아내 분과 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랜 시간 명상 수련을 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첫 인상이 남달랐다는 것에 이해가 갔다. 그분에게 추천 받아 간 곳들도 다 만족스러웠다. 남편의 은퇴를 앞두고 부부는 1년 정도 터를 알아보러 다녔다고 한다. 그런데 명상 수련을 같이 하신 분이 먼저 귀촌한 지금의 마을을 소개 받아 정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날 밤에 돌아와 동네를 산책했는데 집들이 하나 같이 새 집이고 디자인도 세련되었다.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집들은 사생활이 잘 보호되게 앉아 있었고, 주변 풍경과 잘 어우러져 편안한 느낌이었다. 조금 올라가면 집이 또 나오고, 끝났나 하면 또 나왔다. 그 마을엔 현지인은 없고 귀촌인들 뿐이어서 텃세도 없다고 한다. 쌀라네집 옆에도 갓 지은 집이 있었는데 규모나 디자인이 너무 아름다워 시골살이가 로망인 내게 큰 부러움을 주었다.
주인 부부는 귀촌한 지 15년이 되었다고 한다. 오랜 시간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앞산 때문이라 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차를 타고 내린천을 오 갈 때 나 역시 굽이굽이 이어지는 그 산들에 깊이 빠져들곤 했다. 문을 열고 나오면 산은 그 자리에 서서 늘 다른 모습으로 사장님 부부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 가을에 다시 오고 싶다고 했더니 겨울에 눈이 왔을 때는 더 멋있다고 했다. 첫 날 이야기를 나눌 때 날 보고 “다시 볼 것 같은데요?”라고 했는데 퇴실하고 나올 때는 그 동안 펜션을 운영하면서 만난 사람 가운데 우리도 손으로 꼽히는 손님 가운데 하나라고 하셨다. 딱히 이유는 안 여쭤봤지만 둘이 여행 다니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하신 말이 생각났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관심사도 공유하게 된다. 소로의 《월든》이나 니어링 부부가 쓴 책 제목들이 오갔다. 나와 마음결이 닮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좋아하는 책들이다. 가장 좋아하는 책방이 인제 시내에 있는 ‘나무야‘인데 거기에서 독서모임도 하신다고 했다. 그래서 차 트렁크에 있는 《책 사랑꾼 이색 서점에서 무얼 보았나?》를 선물해드렸다. 그랬더니 안으로 들어가 책 한 권을 가져와 주셨다. 《오래된 질문》이었다. 밑줄도 긋고, 남편은 3번이나 읽었으며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책이라고 했다. 제목만으로도 울림이 적지 않아 보이는 책이었다.
독특한 펜션 이름 ‘쌀라’가 무슨 뜻인지 물었더니 명상 용어로 ‘움튼다’는 뜻이란다. ‘쌀라네집’이 있는 그 마을이 편안하게 느껴지고, 다시 가고 싶고, 할 수만 있다면 터라도 잡아 살고 싶었던 것은 아무래도 사장님 부부에게서 좋은 기운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앞산을 사랑하고 앞산을 의지 삼아 살다보니 그 분들도 산을 닮아가고 있으신 것 같았다. 그 마음으로 방뿐만 아니라 정원도 아름답게 손질해서 나 같이 시골살이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단 며칠이라도 빌려 쓸 수 있게 해 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한 때는 우리도 귀촌하자고 했지만 유목적 삶을 살기로 했으니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조금이라도 맛보고 있다.
언제 또 갈지 모르지만 집에 와서도 쌀라네집으로 가는 대중교통 노선을 검색하고 있는 나를 본다. 아름다운 경치를 여행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을 닮을 사람을 여행하는 것은 더 즐겁다. 지금까지 다닌 숙소 가운데 가장 좋았다고 말하고 오길 잘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