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향기에서 한껏 충만해진 나는 다른 산골로 달렸다. 40여 분 거리에 있는 책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고속도로는 여주에서 양평으로, 양평에서 다시 여주로 이어졌다.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온 뒤 이어지는 그 길도 강원도 첩첩산중으로 가는 듯했다. 노루목향기도 그 길도 들어가면서 먼저 취했다.
멀리 언덕 위에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보였다. 인터넷에서 본 것처럼 주위엔 산과 들뿐이었다. 사실 그것 때문에 꼭 가고 싶은 곳으로 점 찍어두었었다. 바로 홍두깨책방이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뜰로 갔다. 마침 대표님도 거기에 계셨다. 처음 온 사람이라면 탁 트인 시야와 아름다운 주변 경치를 두고 바로 책방으로 들어갈 수는 없을 것이다.아래로 아래로 논이 펼쳐져 있었다. 그 중엔 송화가루로 뒤덮여 있는 논도 있었다. 물로 차 있는 모습도 더 없이 아름다웠지만 벼가 심겨지고 푸르러지면 어떤 풍경일까, 노랗게 벼가 익는 가을 풍경은 또 어떨까 상상하게 했다. 푸르른 빛으로 감싸고 있는 산들은 또 어떻고? 경치 좋은 곳에 책방이 들어 앉아 있으니 풍경만으로도 아름다운 날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을 뜰에 서서 사면 경치를 감상하고 책방으로 들어가니 소녀감성이 가득한 사모님이 환대해 주셨다. 지인이 <비로소 나를 만나다>의 표지 그림으로 만들어준 천 가방을 들고 갔는데 그걸 알아보고선 더욱 반기셨다. 인스타그램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숲은 책방 안에도 있었다. 바로 책으로 만들어진 숲이었다. 넓은 공간의 사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14,000여 권의 세계문학서들은 대표님이 50여 년간 모은 책이란다. 아시아, 영미, 유럽, 러시아 등으로 분류되어 서가에 꽂힌 책들은 아름다운 책숲을 이루고 있었다. 책들이 서로 어깨를 맞대고 흘러나오는 녹턴의 음률을 음미하는 듯 했다. 한 사람이 사랑한 책들이 이제는 여러 사람과 함께 호흡하며 모두의 책이 되었다.
책방 끝에는 음악 감상실이 있어 구경하러 들어갔다. 요즘 보기 드문 테이프부터 CD, 비디오테이프 그리고 LP판들이 가득했다. 클래식과 대중음악이 고루 있었는데 국악테이프들도 꽤 보였다. 내가 판소리에 관심을 보이자 책방에 있는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대표님은 레코드판을 하나 틀어주시겠다고 했다.
그런데 첫 번째 틀어주신 음반이 임방울의 ‘추억’이었다. 방금 전 빵과 커피를 먹으며 인스타에 홍두깨책방에 대해 글을 올렸는데 첫 문장을 ‘앞산도 첩첩허고 뒷산도 첩첩헌디’라는 그 문장을 인용해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명창 임방울이 부른 ‘추억’의 첫 대목이다. 인스타는 사모님이 하시고 대표님은 안 하시는 것 같았다. 사모님도 방문객들을 응대하느라 내가 올린 글을 보지 못하셨다. 그러니 이런 기막힌 우연이 다 있나 싶었다. 구슬픈 ‘추억’이 LP판에서 흘러나오자마자 눈가가 촉촉해졌다. 눈을 감고 오랜만에 소리를 감상했다. 온몸으로 전율이 흘러내렸다. '추억'이 끝나자 대포님은 레코드판을 뒤집어 '쑥대머리'를 틀어 주셨다. '쑥대머리' 하면 임방울이오, 나를 판소리 배움길로 이끈 것도 바로 쑥대머리였기에 이 우연의 일치에 소름이 돋는 듯 했다.
책방이 생각보다 깊은 산골에 있다는 것도, 동네책방으로서 의외의 많은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도, 예상치 못한 환대를 받은 것도 내겐 ‘아닌 밤중에 홍두깨’였다. 책방에서도 말하는 것처럼 엉뚱하고 느닷없는 산골책방이었다. 전날 세런디피티78에서의 아쉬움을 홍두깨책방에서 모두 보상 받는 느낌이었다.
이번 여행에서 만난 것들은 모두 뜻밖이었다. 시니어 공유 공간 노루목향기에서 세 어르신이 서로를 돌보며 사시는 모습도, 혼자만의 고즈넉한 시간을 보내겠다고 많은 기대를 품고 간 세런디피티78에 들어가지 못한 것도,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홍두깨책방이 말이다. 뜻밖의 가족 형태, 뜻밖의 책방, 그것이 세런디피티이며 홍두깨였다. 세 곳 모두 은퇴 후에 자신들이 원하는 삶을 꾸려나가고 있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가장 그들다운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었다.
세런디피티78과 노루목향기, 그리고 홍두깨책방이 내 머릿속에서 각각의 꼭지점을 가진 삼각형으로 그려지면서 모두 한 식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는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세상을 향한 문을 활짝 열고 더불어 살아가려는 삶의 방식은 같기 때문이다. 혹시나 하고 지도로 확인해 보니 위치상으로도 삼각형 형태를 띠고 있다. 신기하다.
그들이 내 가슴 속에 함께 있으니 그들은 모두 내 식구가 되었다. 단단하면서도 유연하고 아름다운 향기까지 품은 그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꽉 잡고서 좋은 기운을 계속 퍼트려 주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