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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Jun 06. 2022

내 여행이 세런디피티

10년 후 나는(1)

여주로 떠나는 여행엔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선택지가 따로 없었다. 춘천 산골은 시외버스를 타고 간 뒤 택시를 타고 들어가면 되었지만 여주 산골은 그럴 만한 곳이 아니었다. 내가 가고자 하는 곳들은 고즈넉한 곳이어서 대부분 도시와 많이 떨어져 있다. 걷는 것을 좋아하고 느긋하게 다니고 싶어서 되도록 뚜벅이 여행을 하고 싶지만 그러한 곳일수록 자동차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가기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한 작가의 에세이에는 ‘기대어 산다.’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한다. 깊은 산속에 혼자 살아가는 ‘자연인’이 아닌 이상 우린 누군가에게 기대어 살 수밖에 없다. 내 이번 여행도 누군가의 마음에 기대어 가게 되었다. 고맙게도 내 책들을 좋아해 주고 도움을 받았다는 이가 농촌민박 숙박권을 선물로 주었다. 펀딩에 참여하여 답례품으로 받은 것이었다. 요즘 내가 계획하고 있는 여행의 콘셉트와 아주 잘 맞는 곳이었기에 덥석 받았다.

  

가는 길에 한 곳을 먼저 들르기로 했다. 사서로 지낸 이가 은퇴 후 만들었다는 북카페 ‘세런디피티78’이었다. 집에서는 1시간 10분 거리, 거기에서 목적지인 노루목향기까지는 35분이었다. 보통 입실이 오후 서너 시이므로 그곳을 들렀다 가면 얼추 시간도 맞을 것 같았다. ‘뜻밖의 발견’이라는 ‘세런디피티’라는 이름과 산속에 있다는 것이 강하게 끌어당겼다.

  

고즈넉한 곳, 또는 내가 원하던 공간을 찾아다니기 시작한 이번 여행은 내 삶에 있어 그야말로 ‘뜻밖의 발견’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숙박권을 받고 났을 때 머릿속에 여행지도가 하나 둘 그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숙소의 사정에 맞추느라 예약일이 늦어져 춘천 산골을 다녀온 에 가게 되었지만 여주 산골 행은 첫발을 떼게 해 준 고마운 여행이다.

 

이 여행은 내 후반 인생에 주는 선물이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젠 좋아하는 것 하면서 살 자격도 되고, 결과적으로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란 예감도 왔다.  여러 공간과 다채로운 사람을 만나다 보면 노년의 밑그림도 그려질 것이다. 모퉁이가 될지, 중심이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아름다운 빛깔로 삶의 부분 부분을 칠해줄 것이라 기대한다. 달든 쓰든 새롭게 경험한 것들은 어떤 식으로든 내게 영향을 미칠 것이기에 난 ‘이름답다’라고 단정 짓는다. 어떤 재료가 주어지면 내 입맛에 맞게 요리할 만한 요령을 체득한 나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렇게나 멋진 여행은 그야말로 ‘뜻밖의 발견’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여 막 여행을 시작한 나를 고즈넉한 세런디피티78로 데려가 축하해 주고 싶었다. 지난 여행에서 한 것처럼, 커피를 시켜놓고 창으로 보이는 숲을 멍하니 바라보며 조용한 시간을 보낼 계획이었다. 게다가 그곳의 커피 이름이 빨강머리앤, 데미안, 조화로운 삶, 어린왕자, 나무를 심은 사람이란다. 지금까지 본 메뉴 가운데 가장 매력적인 커피 이름이다.


그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난 행복한 고민 속에 있었다. 가기도 전에 어떤 것을 주문할 것인지 고민한 적은 처음이었다. 누가 올린 후기를 보니  메뉴에 따른 커피 맛엔 구별이 잘 안 간다고 했지만 작은 것에도 의미부여하기 좋아하는 나로선 이름이 중요할 수밖에 없었는데 한꺼번에 다 시킬 수는 없는 노릇.


강한 긍정의 힘으로 씩씩하게 헤쳐 나가는 ‘빨강머리앤’, 청소년 시절 강한 마력으로 홀렸던 데미안, 자연주의 삶을 산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반복해 읽어도 늘 새로움을 주는 어린왕자, 존경과 경외심을 일으키는 나무를 심은 사람.


아무래도 지금의 나를 생각하면 ‘조화로운 삶’이지 싶었다.

  

한참을 달려 고속도로를 벗어나 산속으로 이어진 길로 들어갔더니 빨간 건물이 나타났다. 너른 주차장엔 차 두 대가 세워져 있었다. 주차하고 문을 여는데 갑자기 나타난 남성이 “여주 경찰서 강력계 아무개입니다.”라고 해서 화들짝 놀랐다. 건장한 남성 옆엔 또 다른 건장한 남성이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라고 물으니 아니라면서 내가 책방 주인인가 했단다. 그러니까 온갖 상상과 기대를 하며 달려간 곳이 닫혀 있었던 것이다. 나중에 알았는데 북카페 주변 농작물 도난 사건이 있어서 CCTV를 확인하러 왔던 거였다.



  

북카페 건물 가까이 가니 고양이가 다가와 반긴다. 미호였다. 유리창에 대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건조대에 빨래들이 널려 있고 불도 꺼져 있었다. 문을 열어보았지만 역시 닫혀 있었다. 책방은 산과 들로 둘러싸인 고요한 곳이었다. 눈앞에 두고 그냥 돌아서야 한다니 아쉬움이 한 가득이었다. 미호와 인사를 주고받고 이야기도 나누다가 북토크 안내 현수막에 주인장 연락처가 씌어 있는 것을 보았다.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출발하기 전에도 인스타를 보며 확인해 보았는데 문 닫는다는 말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노루목향기로 향하는데 문자가 왔다. 급한 일이 있어 부산에 내려가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리하여 뜻밖에 시작하게 된 내 여행에 대한 자축은 일시에 달아나 버렸다. 되돌아 나오는 길에 징그러운 뱀까지 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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