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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May 23. 2022

달이 먼저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산골에 내가 있었네(3)

이틀 째 날에도 습관처럼 자다가 몇 번 깼다. 그때마다 침대 옆 커튼을 들춰 밖을 보았다. 전날처럼 달이 전나무 끝에 매달린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여전히 나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전날이나 이날도 흐린 줄 알았지만 아침이면 해는 영락없이 나왔다. 달이 먼저 그 길을 걸었을 것이다.

  

집에서처럼 9시가 다 되어 눈을 뜬 뒤 옆에 둔 책을 읽다가 일어나 앉았다. 그러다가 살랑거리는 나무들을 바라보면 위안을 받았다. 나를 자극하는 것들이 없고 자연이 곁에 있으니 시선은 밖으로 향하고 그때마다 마음길이 열렸다. 창문을 열면 새소리가 들려왔다. 두 번째 아침이 열렸다.

  

이날도 주인장이 만들어준 간단한 아침을 먹고 짐을 쌌다. 간단하게나마 메모를 썼다. 공유 공간 벽에는 손님들이 남기고 간 편지로 가득하다. 특별한 시간을 경험하고 가는 이들의 감사함으로 채워진 편지들이다.    

 


‘내 후반 인생에게 주는 여행’의 첫 장소가 되어 준 이 숲에서 이틀 동안 편히 머물다 갑니다. 나를 끊임없이 자극하던 도시의 사물들과 소음을 떠나 숲과 나무와 개울물 소리, 새소리, 별 그리고 고요와 평온함을 얻어 갑니다. 고맙습니다.'     

   


전날 저녁에 다녀온 동네책방에서 사 온 책 한 권을 두고 오기로 하고 책 안쪽에 편지를 써서 책상 위에 두었다. 북스테이 공간인 그곳엔 공유공간에도 많은 책이 있고, 개인 방의 책상 위에도 책들이 있다. 그런데 가져온 책을 두고 간 이들이 많았다.


내가 머문 방에도 그런 책들이 있었다. 여행 다닐 때마다 들고 다닌다는 시집을 두고 간다는 메모를 볼 땐 감동이 밀려왔다. 어떤 책에는 “책이라는 것이 인간의 삶에서 어디까지 가닿을 수 있을지 참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었습니다.”라고 씌어 있었고, “모험하러 온 〇〇 드림!”이라고 쓴 것도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받는 것 같았다. 내가 놓고 온 책은 《그림 그리는 할머니 김두엽니다》이다. 책 안 쪽에 아래와 같은 메모를 남겼다.     



  

어제 이 숲 가까이에 있는 동네책방 실레에 갔다가 사온 책입니다. 그림을 보는 순간 모지스 할머니가 떠올랐는데 이미 ‘한국의 모지스 할머니’로 불리고 계시네요. 일본의 국민 시인이 된(100세에 시집을 낸) 도요 할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김두엽 할머니의 삶과 그림을 감상하시라고 놓고 갑니다. 전 집에 가서 다시 살게요. ‘썸원스페이지 숲’에서 좋은 시간 보내세요.  


정확히 퇴실 시간인 11시에 방을 나왔다. 한 일이라고는 갈 때 마음먹었던 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냥 풍경들을 많이 바라보았다. 그래서인지 얼마나 마음이 가벼워졌는지 모른다. 공유 공간에는 꼭 나를 두고 하는 말이라도 되는 듯한 문장을 새긴 도장이 있었다.     


계획 없이 왔으니

틀어질 일도 없다.     

  

잠시 머문 춘천의 썸원스페이지 숲은 내 후반 인생에게 주는 첫 여행 선물의 페이지를 꾸며주었다. 간결해서 더 여운이 남는 문장들의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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