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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Jul 21. 2022

그는 나이고, 나는 그이다

모든 것은 때가 있다. 그리고 마음에 품고 있다면 언젠가 거기에 가 닿는다.

  

북스테이 공간 모티프원에서 하룻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떠날 동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언젠가는 갈 것이란 마음은 버리지 않았다. 정말로 그 기회가 왔고, 그것은 생각지도 않은 것에서 왔다. 일본 그림책 작가 다시마 세이조 선생님이 파주 출판단지에서 강연을 하신다는 거였다. 강연 장소가 모티프원과 멀지 않았다.

  

몇 해 전 한국에 나와 강의하실 때에도 어쩌면 다시 뵙기 어려울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없는 시간 내어 다녀왔다. 100세까지 사셔서 그림책을 계속 출간해주시기를 바라마지 않지만 현재 80대시니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저녁 강의이고 파주이기 때문에 하루 묵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것처럼 모티프원에 머물 명확한 동기가 또 있겠는가.

  

강의 신청 후 모티프원에 예약했더니 안내 문자가 와서 ‘전부터 가고 싶었던 모티프원을 드디어 가게 되어 많이 기대됩니다. 한 달 후에 뵙겠습니다.’라고 답장을 보냈다. 문자 소통도 고속도로 인양 바로 달려왔다. ‘녹음이 더 짙어진 계절에 설레는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모든 날들이 기쁨으로 충만하시길…. 샬롬’ 역시 이안수 선생님의 따스함은 남다르다 생각되었다. 그리고 예약일 전날에 문자가 또 날아들었다.  

   

‘내일은 선생님께서 계획하신 행복한 헤이리 여행 날입니다. 곧 설레는 마음으로 뵙겠습니다. 오시는 길, 자유로변 한강하류의 광활한 풍광을 가슴에 담는 것도 놓치지 마세요. 참 고맙습니다. 모티프원 드림’     

  

문자에서도 선생님의 문학성과 따스함, 너른 기상이 전해져왔다. 다른 숙소들의 밋밋한 확인 안내 문자와는 결이 달라도 한참 달랐다. 선생님 뵐 생각에 기대가 크다는 답장을 보냈는데 이안수 선생님은 여행 준비로 서울에 계시다는 문자가 왔다. 그때까지 나는 이안수 선생님이 아닌 선생님의 큰 딸과 소통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티프원은 예술작품처럼 아름답다. 몸에 좋은 재료로 만든 가구와 뛰어난 감각으로 꾸민 실내 분위기에 반해 전부터 만나보고 싶었다. 내가 내게 선물을 준다면 모티프원에서 황홀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곳을 머물고 간 많은 이들 가운데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에서 이안수 선생님과 차 한 잔 한 사람들은 하나 같이 큰 위안과 힘을 얻고 돌아갔다. 그리고 그들은 모티프원을 다시 찾았다. 그런데 그런 이들이 우리나라 사람들 뿐 아니라 외국인들도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세계적인 영화감독이나 건축가, 셰프, 화가, 음악가 그리고 기업의 CEO 들이었다. ‘서재에서 방까지 네 시간’이라고 할 정도로 손님으로 온 이들은 이안수 선생님과의 대화를 즐겼다. 나는 선생님과 이야기 나누는 것도 기대했지만 무엇이 그들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지 무척 궁금했다.

  

이안수 선생님은 손님과 함께 나눈 대화나 여행자가 남기고 간 글을 블로그에 기록한다. 디자인 잡지사에서 기자와 편집장을 지낸 분답게 필력이 뛰어남은 물론 행간에 따스함이 가득하다. 외모는 더욱 독특하다. 하얗고 긴 수염을 한 도인 같은 분위기에 강한 카리스마를 뿜어낸다. 그러면서도 인자함이 배어나오니 강하고도 부드러움을 함께 지닌 분이다.

  

이안수 선생님은 넉넉한 품을 가진 느티나무이며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이다. 타오르는 불꽃이면서 한 없이 품어주는 바다다. 티베트나 인도에서 만날 수 있는 영적 스승 같기도 하다. 여행자들이 남기고 간 편지들을 보면, 그들의 요동치는 속은 잠재워주고 구멍 난 속엔 의욕의 기운을 불어넣고 막힌 속은 시원하게 뚫어준다. 일 때문에 오랜 시간 서울에서 따로 지낸 사모님 역시 특별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요가와 오랜 명상을 통해 만들어진 담백하고 잔잔한 호수 같은 인상을 지니셨다. 두 분은 드물게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더 멋진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으시다.




  


그런 분을 뵐 수 없다니 아쉬웠지만 모티프원에서 묵고 간 여행자들과의 이야기를 담은 선생님의 책 《여행자의 하룻밤》을 챙겨 파주로 향했다. 블로그에서 본 글들일 테지만 책을 샀던 이유는 모티프원에서 묵게 되는 날 사인을 받기 위해서였다. 예상대로 책을 샀을 당시에 펼쳐 보았더니 내가 알고 있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읽지 않고 책장에 그냥 꽂아 두었다.

  

그런데 6년이란 시간 덕일까? 조금은 낯이 익은 내용들도 새로운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뿐만 아니라 점점 빠져들며 감동에 젖어들었다. 새벽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생기가 흘러 넘쳤다. 삶이 스며 있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리라. 손님과 하는 대화가 책을 한 권 더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감동적이고, 더 긴 여운으로 남는다는 선생님의 말이 사실이었다.

  

모티프원에, 아니 이안수 선생님에게 어떤 마법의 가루약이 있기에 그 많은 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깊은 감동과 여운을 안고 나오는 것일까? 결도 다르고, 하는 일도 다르며, 국적도, 성도, 나이도, 다른 여행자들의 말을 선생님은 어떻게 같은 자세로 경청할 수 있을까? 궁금했던 그 비결을 책에서 알 수 있었다.   

        


사람을 대할 때는 모두 같다는 단 하나의 원칙만 두고 상대를 바라봅니다. 사람을 바라볼 때 과거의 성취나 실패를 현재의 시선에 반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러면 처음 만나는 분이라도 마치 친구처럼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돈이 많고 명성과 직위가 높은 사람에게도 움츠러들 필요가 없으며 남들이 비루하게 여기는 사람도 존엄과 존경으로 대할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이고 나는 그입니다. (101)          


  

이것이었다. 이안수 선생님은 도인이 맞았다. 헤이리의 철학자이며 모두의 친구였다. 여행자의 행동 하나도 놓치지 않고 기록해 두며 더 낮추는 학생이었다. 자신을 돋보이려고 애 쓰는 자는 도리어 그것이 자신을 저 깊은 아래로 떨어뜨리며, 자신을 낮추는 자는 오히려 더 빛이 나는 법이다. 여행자를 모두 같은 사람으로 보고 더 나아가 자신이라 생각하는 자세야말로 상대를 귀하게 대하는 비법 중의 비법인 것이다. 어느 누가 자신을 막 대하고 싶겠는가.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처방은 경청입니다. 저는 그 분들의 이야기에 양쪽 귀를 쫑긋 세워 집중하고 마음으로 공감하며 맞장구를 칩니다. 다음 날 아침, 그분들은 곧 끊어져 버릴 것 같았던 자신의 팽팽했던 마음이 이완되었음을 고백하고 고마움을 표시합니다. 제가 한 일은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인 것밖에 없습니다. (242)    

       

  

선생님은 사람들에게 귀 기울이는 일이 자연을 눈여겨 살피는 일이고 책의 원전을 읽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여행자들과 대화를 나누는 선생님의 서재는 원래 자신의 집필실이었다. 그런데 너나없이 궁금히 여기자 모두의 서재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처음에 했던 책 분류가 뒤죽박죽이 되었으나 그걸 성가시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찾기 위해 서가의 책들을 따라 나서는 여행이라 여긴다. 이런 마음은 사람을 귀히 여기시는 성품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모티프원에 체크인을 하러 갔더니 밝고 아름다운 젊은이가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선생님의 큰딸이었다. 이미 들어가기 전부터 건물과 숲을 이루고 있는 뜰을 보고 감동을 받았는데 상냥한 응대에 기분이 들떴다. 하지만 그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선생님이 무수한 밤을 여행자와 이야기 나눈 서재와 객실로 올라가는 계단 그리고 방 등 감탄이 끊임없이 나올 정도로 예술적 기운이 넘쳤다. 2층 객실로 올라가는 복도의 벽은 아름다운 연두색으로 꾸며져 있고, 거기엔 가로로 길게 난 독특한 창이 있었다. 창으로 보이는 나무들은 액자 속에서 하늘거리는 그림 같았다. 창의 그림자는 반대편 벽 아래로 그대로 비쳐 운치를 더해 주었다. 갈색 나무 계단을 총총히 올라가는 내가 마치 동화 속 주인공 같았다.


절정은 방의 창가였다. 한껏 푸르러진 나무들이 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방이 아니라 숲 안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 환상적인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누구든 그 창가의 책상에 앉는 순간 모든 생각들이 일시에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곧 자신의 심장에서 고동치는 소리만 들릴 것이다. 2004년 모티프원을 설계할 때 공간 전체가 큰 식물 덩어리로 보일 수 있기를 바랐다고 하는데 선생님의 바람대로 되었다. 나무들이 얼마나 우거졌는지 건물이 잘 안 보일 정도이다. 그래서 막 도착했을 때 옆 건물이 모티프원인 줄 알고 사진을 찍기도 했다.

  

나무들 때문에 밖에 나가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가만히 앉아 나무를 바라보기만 해도 방을 찾은 목적은 이미 이루고도 남았다. 신이 있다면 내게 그 걸 보게 하려고 시기를 한참 늦췄는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 때 흔들거리는 잎사귀들과 가끔 와서 앉았다 가는 새들이 큰 즐거움을 주었다. 종일 창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행복할 풍경이었다.  

  

불이 켜진 줄 알고 스위치를 몇 번 찾았던 것은 하늘로 난 창 때문이었다. 밤에 별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창이었다. 잠자리에 누웠을 때 바로 하늘이 보였다. 어렸을 적 마당에 누워 별을 바라보며 꿈을 키웠던 추억을 불러와 주었다.

  

선생님의 명함엔 영문 이름 첫 자를 모두 소문자로 했다는데 그 이유가 혹시 상대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고함소리로 들릴까 경계하기 위해서란다. 선생님의 배려에 고개가 숙여진다. 많은 여행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힘을 실어준 선생님의 마지막 소망은 정원 옆에서 잠자고 있는 캠핑카 트레일러를 깨워 모티프원에 왔던 여행자들을 찾아 세계를 순례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여행 준비로 서울에 계신 가 했다. 그런데 선생님은 지금 사모님과 유라시아 평화원정대에 합류해 4개 월 간의 여행을 시작했다.

  

선생님을 만날 수는 없었지만 모티프원 곳곳에서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다. 선생님과 깊은 대화를 나눈 느낌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을 그대로 닮은 큰딸이 작은 이안수로 보였다. 신이 또 알맞은 때에 그곳으로 인도하기를 바란다.

  

커다란 창에서 푸른 손 흔들어대던 나무들이 지금도 내 가슴을 흔들고 있다. 그것은 진짜 나무이기도 하고 사람 나무이기도 하다. 느티나무 같이 품이 넓은 이안수 선생님이기도 하고 그의 뒤를 좇고 있는 큰딸이기도 하다. 내 심장에 푸른 바람이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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