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려보고 나서야

따라 그리기의 실패

by 김건숙

진이 다 빠졌다. 여자 꼬마 하나를 그리는 것이 이렇게 힘든 줄 몰랐다. 그렸다 지우기를 수차례 했지만 원본과 많이 다르게 그렸다.

작년에 혼자서 그림책 베껴 쓰기를 하다가 함께 해 보면 어떨까 해서 블로그에서 회원을 모집했다. 혹여 신청자가 없을까봐 기간을 무려 20여일 두었으나 바로 인원을 초과하여 그 이튿날에 마감했다. 그리하여 올 2월부터 시작한 이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 베껴 쓴 그림책과 필사 노트를 밴드에 인증한다. 래서 인증할 그림책을 베껴 쓰는 중에 마음에 드는 페이지가 있어 그림까지 그려보기로 한 것이다.

그림을 좋아해 작년에는 그림책에세이도 내고, 그림책 강의도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림을 그리지 못한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 그림 그리기에 대한 책도 오래 전에 여러 권 사 놓았다. 그림책 베껴 쓰기를 하는 것도, 그림 작가는 못되더라도 글작가는 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그림책 가운데 마음을 유난히 흔드는 그림들이 있다. 이야기와 메시지를 우선으로 하고는 있지만 마음을 끄는 그림들을 보고 있으면 세상 행복이 거기에 다 들어있는 것 같다. 그러므로 그림 그리고 싶은 마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 런. 데, 그림을 잘 그릴 수 없다는 생각이 위에서부터 나를 짓누르고 있었기에 부러워만 했지 그려볼 생각은 못했다. 그러다가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시간이 많이 여유로워지자 2월 어느 날 ‘한 번 그려볼까?’라는 마음으로 그려보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잘 그려졌다. 그건 아예 못 그릴 것이라 단정 짓고 있었으니 기대치가 바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림책을 보고 따라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


그런데 그것이 정말일까? SNS에 올렸더니 ‘다음엔 책 속에 그림을 직접 그려서 책을 낼 것이 아니냐?’는 소리를 꽤 들었다. 물론 과장이겠지만 계속 그려볼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그렇게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그린 것이 7장이나 되었다. 몰입형인 나는 무엇이든 불붙었다 하면 무섭게 달려드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이번에 따라 그린 <뭉게뭉게 구름을 잡으면>의 한 장면


그러다가 한참 동안 손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집콕 생활 하면서도 아이디어나 할 일이 끊임없이 생기는 바람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그런데 오늘 <뭉게뭉게 구름을 잡으면>이란 그림책을 베껴 쓰면서 그리고 싶은 장면을 발견했다. 이 책에서 가장 단순하고 쉬워 보이는 장면이었다. 여자 아이가 방안에서 천장에 있는 구름을 쳐다보고 있는 장면이다. 벽에는 작은 창이 하나 있고 여자 옆에는 귀엽고 작은 돼지와 빈 상자, 장난감 자동차, 그리고 작고 간단한 나무가 두 그루 있다.

10분도 안 걸리겠다고 생각했다. 자를 대고 방을 먼저 그리고 꼬마 여자 아이를 그리기 시작했다. 색도 따로 칠해 있지 않고 선으로만 스케치했다. 옷과, 신발도 아무 무늬도 없이 형태만 그려져 있다. 누워서 떡 먹기는 아니어도 쓱 그리면 되겠다 싶은 그림이었다.

위의 그림을 따라 그린 그맇


그런데 웬일인고! 위를 쳐다보고 있는 옆모습을 그리는 것이 이토록 어렵단 말인가. 턱과 얼굴선의 경사가 조금만 달라도 귀여운 꼬마가 아니라 늙은 남자로 표현되었다. 이마, 인중, 턱의 미묘한 경사와 코의 방향이 조금만 들리거나 내려져도 역시 늙은 남자가 되어버렸다. 일자로 진하게 그린 눈도 위치를 얼마나 바꿨는지 모른다. 머리숱도 쓱쓱 그려 내린 것 같은데 직접 해보니 숱이 얼마 안 남은 늙은 남자가 다시 등장했다.

그 동안 그림책 따라 그리기에 고무적이었던 것은 동물 그림이었기 때문인 듯 하다. 꼬마 여자 그리기에 그리 많은 시간을 할애했는데, 바로 옆에 있는 돼지는 지우지 않고 단 한 번에 그렸다. 이유가 뭘까 생각하니 사람은 표정이 있고, 동물은 표정이 없기 때문인 것 같았다. 표정을 그리기 위해서는 선 하나도 섬세하게 처리해야 되니 말이다. 사진 찍기에서도 풍경이나 사물 사진을 찍는 것보다 인물 사진이 어렵다. 이것 역시 대상의 표정을 잘 살려내느냐 아니냐 때문일 것이다.

그림 작가들은 천재다. 점의 길이, 굵기, 위치, 방향, 경사 등으로 표정을 섬세하게 표현하는 마법의 손을 가졌다. 그려보지 않고는 모른다. 그림뿐만이 아닐 것이다. 직접 글을 써봐야, 작곡을 해봐야, 춤을 춰봐야, 꽃과 나무를 심어봐야, 집을 지어봐야, 비즈니스를 해봐야, 여행을 떠나봐야 자신의 실력과 전문가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다. 나는 한 시간 가까이 꼬마 여자 아이의 얼굴을 씨름해 보고나서 그림책 작가들을 더 우러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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