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너무 운동을 무리하게 해서 어깨에 통증이 세졌다. 아릿아릿한 느낌까지 더해져 기분도 안 좋았다. 그러므로 ‘오늘의 세 시’는 싱싱하지 못했다. 그래도 온몸이 처질 정도는 아니어서 영화를 보기로 했다.
넷플릭스에 나온 프로그램을 쭉쭉 넘기다가 딱 멈추게 한 영화가 있었다. ‘내 사랑 모드’였다. ‘감’이라는 것은 참 신기하다. 제목과 영화 정보만 살짝 보아도 내 취향을 잘 골라낸다. 옷에 관심이 많은 이가 인터넷에서건, 오프라인에서건 한번 쓱 보고도 족집게로 집어내 듯 옷을 단번에 골라내는 것과 비슷하다. 그렇게 고른 옷을 탈의실에서 입고 나오는 것을 보면 하나 같이 잘 어울렸다. 그 사람의 말로는, 많이 사보았기 때문에 입어보지 않아도 자신에게 어울리는 옷을 잘 안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더 볼 것도 없이 한 번 입어보고는 바로 산다.
이와 반대로 영화를 자주 안 보던시기에 한 영화를 세 번이나 본 적이 있다. '내 책상 위의 천사'라는 영화였다. 드문드문 보아 제목조차 잘 기억해내지 못해 그리 되었지만 어느 지점에서는 알아차렸다. 그래도 다시 볼 정도로 인상 깊었다. 책이나 작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인데 같은 영화를 세 번 선택해서 보았다는 점에서는 내 취향을 명확히 선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기억력에 있어서는 빵점이지만.
‘내 사랑 모드’는 이에서 변주된 취향의 선택이라고나 할까. 퍼즐 세 개가 완벽하게 맞는 느낌이었다. 꽤 오래 전에 한 화가에 대한 인터넷 기사를 보았다. 아주 작은 창고 같은 오두막에서 몸도 안 좋은 여성이 혼자서 그림을 그려서 화가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글을 쓰는 작가만큼이나 화가를 비롯한 예술가 이야기에도 관심이 많은 내게 그 내용은 남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화가 이름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다.
그리고 재작년, 가까이 지내는 그림책 출판사 대표와 그림책방을 운영하는 대표와 셋이 만나 점심을 먹은 뒤 다른 그림책방에 방문한 적이 있다. 방문 했으니 어떤 책이든 사기 위해 서가를 돌아보던 중 맘에 드는 책을 발견했다. <내 사랑 모드>였다. 그리고 이 책은 그 해를 넘기고 또 한 해를 넘긴 이때까지 읽지 못하였다.
오늘 오후 어깨 통증 때문에 온욕까지 마치고 났더니 몸이 노곤했다. 꼭 읽어야 할 책이 있었지만 요즘 내 마음은 몸을 이기지 못하고 있다. 결국 리모컨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영화 서비스 사이트를 기웃거리다 마음에 훅 치고 들어오는 영화를 만났는데 그것이 '내 사랑 모드'였다.
다시 말하지만 1년 반 전에 사 놓은 책 제목을 내가 기억하고 있을 리 없었다. 왜냐하면 사려고 마음먹은 책이 아니었고, ‘모드’라는 화가가 알고 있는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가 좀 시작되고 나서 왠지 느낌이 오길래 책을 꺼내 보았더니 같은 사람 이야기였다. 기사도 찾아보니 역시 같은 사람이었다. 가장 나중에 만난 영화를 통해 책으로, 기사로, 과거로의 시간 여행을 한 셈이다.
모드 루이스는 캐나다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화가이다. 하지만 키는 작고, 어깨는 굽었으며, 관절염이 있는 사람이었다. 비교적 부유한 부모 아래에서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자랐지만 부모님이 일찍 세상을 떠났다. 하나 있는 형제인 오빠하고도 헤어져 이모 집에 살다가 가난한 남자와 결혼했다.
침실로 쓰는 다락방과 단 한 칸이 있는 오두막에서 32년간이나 그림을 그린 모드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굽은 오른손을 왼손으로 받치며 그림을 그리며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이 천진난만했다. 행동이 굼뜨고 불안해보였지만 무엇에든 최선을 다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숙연해져서 명상 영상을 보는 듯 했다.
모드의 그림을 보는 순간 모지스 할머니가 바로 떠올랐다. 전원 풍경을 소재로 한 것이 다르면서도 비슷해 보였다. 그리고 두 사람 모두 독학을 해서인지 그림 풍이 소박하면서도 정겹게 느껴진다. 책에서도 모지스 할머니 그림과 닮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캐나다의 모지스라고 불리기도 한단다.
영화와 책의 내용에서 다른 부분들이 좀 있는데, 영화에서 모드가 남편과 다투고 나서 남편의 생선을 사는 고객이면서 모드의 그림 고객이 된 여성을 찾아간다. 그 여성은 반갑게 맞으면서 모드에게 그림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한다. 그러자 모드가 말한다.
그건 아무도 못 가르쳐요.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는 거죠. 외출을 많이 안 해서 기억에 있는 걸 그려요. 만들어 내는 거죠.
세계인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도, 앙리 루소, 앙들레 보상, 카미유 봉보아 등을 일컫는 소박파도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않았다. 모드 작품과 비슷한 느낌을 주는 모지스 할머니 역시 독학으로 그렸다. 반 고흐 그림엔 한 때 푹 빠졌었고, 전시장에서 본 소박파 화가들의 그림이나 모지스 할머니의 그림 역시 좋았다. 기교가 뛰어나지 않아도 그림에서 전해지는 정겹고 소박한 정서에 끌림이 있었다. 모드 그림 역시 마찬가지다.
잘 알고 지내는 화가 동생에게 그림 교실을 열어달라고 말해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림은 배우는 게 아니라고 했다. 모드가, “아무도 못 가르쳐요.”라고 한 말과 같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을 붓끝으로 표현할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왔다. 작은 드로잉북에 흉내를 내며 8점을 그려보고 자신감이 조금 생겼지만 거기까지다. 헷갈리는 일이다.
생각은 그림에서 글쓰기로 이어젔다. 글을 따로 배우지 않고도 잘 써내는 사람들이 많다. 소설가나 시도 작법을 배우지 많고 써내는 사람들이 있다. 1만 시간의 법칙 속에서 이뤄낸 것일까? 모드가 말한 것이나 아는 화가 동생이 말한 것도 열정을 불태워야 되는 것일까? 하지만 그림을 비롯한 예술은 타고나는 것 아닌가? 박자 감각이 뛰어나고 좋은 목청을 가진 자가 노래를 잘 하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 말대로 “당신, 해 보기나 했어?”라고 한다면 할 말은 없지만, 내 생각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닐 것 같다. 모든 사람에게는 예술적 재능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영역이 다르다고 한다면, 그건 납득이 된다. 모드 루이스에게는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섬세한 감수성과 그걸 표현해낼 수 있는 미술적 재능이 뛰어났다는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