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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Mar 14. 2022

카페 출근

 자신에게 신체적, 정신적, 또는 영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 윌리엄 글래서          

  


어르신에게     

  

긴 시간 길에 나서지 못하는 요즘입니다. 개인적으로 바쁜 일도 있었고, 코로나 이후 12살이 된 반려견과 24시간 같이 있는 날이 많아지다 보니 혼자 두고 나가지 못하는 것도 있습니다. 제가 연 이어 집을 비우면 혼자 있게 된 반려견이 배앓이를 하곤 해서 꼭 나가야 하는 일이 아니라면 집에 머물고 있지요. 날마다 가던 뒷산에도 한 달에 손을 꼽을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직접 가지 못하더라도 집에서 어르신 느티나무님과 대화 나누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어르신을 떠올리면 눈을 감으나 뜨나 제 머리와 가슴속에 선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디서든 대화가 가능하답니다. 그런데 오늘 낮에 지인들을 맞으러 역으로 나갈 때와 돌아올 때 어르신을 만날 수 있었어요. 일부러 버스를 타지 않고 어르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서 갔습니다.

  

입춘도 벌써 지나고 3월을 코앞에 두고 있는데도 추위가 여전한 요즘입니다. 특히 오늘은 바람까지 불어 체감온도가 영하로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런데도 어르신은 가지 끝만 조금 흔들릴 뿐 고요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갈 때보다는 돌아올 때가 여유로워서 어르신의 몸통을 더 자세히 보았습니다. 5미터가 넘는다는 몸통엔 크고 작은 옹이들이 있는데 그 사이에 들떠 있는 껍질들이 많았습니다. 뱀이 허물을 벗어 윤기 나는 피부를 얻듯 어르신도 껍질들을 떨어내고 매끈한 기둥을 만든다면 좋겠습니다.

  

그러한 속에서도 어르신도 무언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지 않을까 궁금했습니다. 지금의 모습도 많은 시간을 지나오는 동안 변화를 꾀한 것이겠지만 먼 옛날 어르신의 조상들이 누군가는 잎을 말아 침엽수가 되고, 다른 누군가는 잎을 넓히고 넓혀 활엽수의 길을 택한 것처럼 말입니다. 어르신도 우리가 눈치 채지 못하는 사이 변화를 시도하며 바뀌는 환경에 적응해가고 있겠지요?

  



대표

© mbrunacr, 출처 Unsplash



제가 노년을 잘 맞이하기 위해 요즘 그에 관한 책들을 읽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미국의 임상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윌리엄 글래서가 말한 ‘긍정적 중독’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이것에는 다음과 같은 조건이 있더군요.     



⓵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행위로서 하루에 한 시간을 전념할 수 있으면서 경쟁적이지 않는 행위

⓶ 쉽게 할 수 있으며 잘 하기 위해서 너무 많은 정신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되는 것

⓷ 혼자 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과 함께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것

⓸ 자신에게 신체적, 정신적, 또는 영적인 가치가 있다고 믿는 것

⓹ 지속적으로 하면 자신을 향상시킬 것이라고 믿는 것

⓺ 스스로를 비판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활동  


  

상록오색길을 걷는 것이야말로 위의 6가지 조건을 충족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다만 ‘하루에 한 시간’이라는 것만 빼면 말입니다. 중간에 조금 쉬면서 빨리 걸어도 5시간 정도 걸리는 일이니 말입니다. 제게는 일주일에 한 번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노년이 되어서도 긍정적 중독에 빠져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바람직함을 넘어 건강하고 행복한 생활을 위해 멋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저에게는 무엇이 있을까요?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자 그 중독적인 일들이 지금의 시점에 꼭 필요한 것인가라는 의문이 들더군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볼 때, 제 노년 생활은 지금의 연장선에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여전히 무언가를 해 나가고 있을 것 같아요. 세계 3대 판타지 문학의 거장인 어슐러 K. 르 귄이 하버드 졸업생을 대상으로 하는 설문지의 ‘여가’에 대한 질문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남는 시간의 반대말은 아마도 바쁜 시간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남는 시간이 뭔지 모르겠다. 내 시간은 전부 할 일로 바쁘기 때문이다. 항상 그래 왔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 시간은 삶에 점령되어 있다.”(『남겨둘 시간이 없습니다』, 19쪽)     

  

작가가 무려 여든이 넘었을 때 한 말입니다. 대단한 작가이지요. 프랑스 소설 《체리토마토 파이》에 나오는 잔 할머니 역시 90세인데도 심심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혼자 살지만 요리하고, 책도 읽고, 십자말풀이도 하며 카드점도 칩니다. 몰스킨 수첩에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에서 들은 인상 깊은 말 또는 책이나 신문에서 발췌한 문장을 적기도 하지요.

  

저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지금의 생활을 들여다보면 계획하고 있는 일들도 하지 못하고 보내는 하루하루가 쌓이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시작된 해에 어깨가 아파 다른 일들을 할 수 없을 때에도 날마다 뒷산을 올라갔다 내려오고, 강아지 산책도 시키고, 요리도 하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영화도 보고, TV 시청도 했지요.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때조차도 남는 시간이란 것이 있나 싶지요. 산책이나 TV 시청 등도 남아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러 시간을 내 보는 것이었으니까요. 요즘은 구상해 놓은 그림책 관련 프로그램도 짜야하고, 기획하고 있는 글도 써야 하는데 시작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올해 세운 얼마 안 되는 계획 가운데 하나가 ‘잎사귀 그림 그리기’입니다. 이 생각을 하니 벌써 봄이 기다려지네요. 마른 가지들에서 뾰족하게 나오는 새순을 볼 때면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리던지요. 싹들이 자라 잎이 되고 그 잎이 점점 커지는 것을 보면 기운이 절로 솟았지요. 그런 잎들을 그려보자 한 것입니다. 과연 생각대로 될지 모르겠지만 시도는 해 보려고요.

  

어르신, 글을 쓰다 보니 지금은 일부러 또 다른 것을 찾을 필요까지는 없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요즘은 일부러 멍 때리는 시간을 내려고 여행을 가기도 할 정도로 틈을 내려고 하니까요.

  



© Engin_Akyurt, 출처 Pixabay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오늘 딸이 쉬는 날이어서 오랜만에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카페에 갔습니다. 책을 가져가서 3시간 동안 몰입해서 읽었습니다. 다른 테이블에서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는 중년 여성들의 소리도 소음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비슷한 시간에 그들이 빠져나가자 저를 비롯해서 노트북으로 작업하는 카공족들만이 남았습니다. 그 조용해진 분위기를 타고 몰입도가 고조되었습니다. 모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인데 그들과의 연대감마저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 잔잔한 행복이 스며들었습니다.

  

어르신, 그 경험을 하고 나자 ‘긍정적 중독’의 하나로 날마다 카페로 출근하는 일이 하고 싶어졌습니다. 늘 할 일이 많으니 더 이상 필요치 않다고 한 것은 자만이었네요. 더 큰 행복을 주는 것이라면 지금의 무언가를 덜어내고라도 새 것을 들여야지요. 카페 출근이 그런 일이네요. 물론 당장은 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반려견을 혼자 두는 일이 쉽지가 않아요.    

  

그렇지만 기회가 된다면 카페로 가서 차를 음미하며 유유자적 즐기고 싶습니다. 여유로움을 즐기는 그 자체도 좋습니다. 책을 읽고 글을 써도 좋습니다. 전시장 다니며 사 온 두꺼운 화집을 한 권씩 가져가 꼼꼼히 읽으며 그림들을 감상하고도 싶습니다. 앨범에 정리만 해 놓고 다시 꺼내보지 못하는 그림엽서들도 한 장 한 장 감상하고 가끔은 나에게 편지를 써도 좋겠습니다. 화집이나 그림엽서는 노인이 돼 시력이 나빠져서 일반 책들을 보기가 힘들어지거나 상상력이 떨어지고 마음에 윤기가 사라졌을 때 보아야겠다고 사 둔 것입니다. 이런 생각만 해도 심장이 떨립니다.   

  

어르신도 오랜 시간 속에서 건강하고 멋진 자태를 가꾸어온 걸 보면 평소 긍정적인 중독에 빠져 있는 시간이 적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제가 늘 좋은 기운을 받아오는 것도 그 때문이 아닐까요?

  

아, 그러고 보니 제가 어르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긍정적 중독’인 것 같습니다. 카페에서 나오면 어르신 만나고 오는 것도 잊지 말아야겠네요.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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