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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건숙 Mar 12. 2022

숨구멍

     

너는 언제든 달려가 쉬고 싶은

너만의 장소를 갖고 있을까?

- 유모토 가즈미로 글, 하나 고시로 그림, 『다시 시작하는 너에게』, 북뱅크

     

  



잎을 떨구고 오로지 맨몸으로 서 있는 어르신 느티나무는 그 자태가 더욱 빛났다. 가까이에서 보면 몸통엔 울퉁불퉁한 옹이와 상처들이 많이 달려있지만 수형만큼은 400년이 아니라 이제 100년도 안 돼 보이는 탄탄하고 멋진 몸매를 가지고 있다. 기둥과 가지에서 솟아 나오는 듯한 기운은 말할 것도 없다. 어느 계절에 가도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움직이지 않고 늘 한 자리에 있기에 보고 싶으면 언제든 가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나로선 마냥 좋지만 느티나무 입장에선 어떨까 궁금하다. 나무로 태어나고 싶다는 사람을 보기는 했다. 하지만 나무를 아무리 좋아하는 나도 붙박이로 있는 것은 쉽지 않을 것 같다.

  

30년 동안 나무를 연구해온 신준환 전 국립수목원장은, “나무는 아무리 어려운 여건에서도 햇살 한 가닥만 있으면 새 잎을 내고 이슬 한 방울만 있어도 뿌리를 뻗는다. 그래서 수분과 햇살을 연결하여 에너지를 만들고 초록 잎을 피우며 희망을 노래한다.”라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고목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잎을 피우지 못할 때에도 자신의 무능을 한탄하지 않고 새도 맺고 구름도 피우며 멋을 부린다.”고도 한다. 

  

한 자리에서도 온갖 변화를 만들어내고 시름뿐만 아니라 화려함과 비움, 고독을 펼쳐내고 또 거둬들이는 존재. 그러면서 새도 구름도 바람도 비도 사람도 다 받아들이며 시간을 채우는 것이 나무들이다. 바로 우리 어르신 느티나무의 삶이기도 하다. 내가 갔을 때도 많은 비둘기와 참새들이 나무 품에 앉아 있다가 나무 울타리로 내려앉았다가 푸드득 날아가기도 했다. 비둘기들은 내가 어르신 나무와 이야기하느라 울타리를 돌 때 내 앞에서 걷기도 하고 울타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도 했다. 새들에게는 어르신 느티나무가 언제든 쉬고 싶은 자기들만의 장소일 것이다. 지금은 보호수로 지정되어 울타리를 둘러 우리가 나무 그늘 아래로 들 기회를 갖기 어렵게 되었지만 예전에는 단옷날이면 여인들이 그네도 뛰고, 동네 사람들이 나무 아래에서 휴식을 취했다고 한다.




  

이토록 멋지고 든든한 어르신 느티나무여, 당신은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바로 옆에서 내는 전철 오 가는 소리나 발목 아래 대로에서 경적소리와 함께 매연 뿜으며 달려대는 자동차 소리를 피해 어딘가로 가 쉬고 싶은 생각은 없으신가. 사람이나 새에게 어깨가 되어주고 지팡이가 되어주는 대신 당신도 기대고 싶은 존재가 있지 않는가? 그 존재를 찾아 어딘가로 가고 싶지는 않으신가 말이다.

  

내가 뒷산 숲길이나 상록오색길을 찾아 머릿속에 있는 것들을 털어내고 새 기운을 얻어 오듯, 분주한 일상들을 피해 오롯이 자신을 만나고 오면서 새로운 힘을 가져오듯이 나무에게도 그런 장소가 필요하겠지만 조상 나무가 한 자리에 서 있기로 한 삶을 선택했으니 느티나무여, 그대의 생각이 몹시도 궁금하다. 하지만 어르신은 지금 겨울잠을 자고 있다.

  

우리 인간들은 어딘가로 떠나기 위해 시간과 노동을 들여 돈을 번다. 고통이나 슬픔, 스트레스 등에 시달린 몸을 쉬어줄 장소를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까지 병이 들어 일상이 힘들어진다. 100년을 살기도 어려운 삶이 힘들다고 아우성친다. 

  





정원이 딸린 집에서 능력 있는 남편과 네 아이를 양육하며 사는 영국 중산층 가정의 수전 롤링스는 쌍둥이 막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자 새로운 장소가 필요했다.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는 쉰 살 언저리에서 다시 꽃 피울 모습을 꿈꿨지만 오히려 공허감에 휩싸이고 만 것이다. 임신을 하면서 직장을 그만둔 이래 아이들이 태어나고 양육하기까지 12년 동안 단 한순간도 혼자였던 적이 없었다. 수전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장소를 찾아냈다. 작고 더럽고 조용한 호텔이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간절했는지 소설 속 문장이 이러하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그녀는 혼자였다. 자신을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도리스 레싱, 『19호실로 가다』, 문예출판사)      

 

‘혼자였다’라는 문장이 세 번이나 반복될 정도이다. 수전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서 생긴 7시간을 호텔에 가서 썼다. 한 것이라고는 그저 안락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쉬다가 돌아오는 일이었다. 그러고 나면 다시 살아갈 힘이 생겼다. 파출부만 있었을 때는 일주일에 3일이었지만 입주 가정부를 구한 뒤에는 5일을 그렇게 보냈다. 그리하지 않으면 불안과 초조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19호실로 가다》라는 소설 속 이야기다. 제목만 보았을 때는 어느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날마다 호텔에 가는 줄로만 알았다. 아니면 자신만의 시간을 즐기기 위해 누군가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고급 호텔에서 짧은 휴식을 즐기는 것이라고 상상했다. 요즘 우리나라에 호캉스란 말이 유행할 정도이니 말이다. 그런데 작고 더러운 호텔로 가서 침대에도 눕지 않고 안락의자에 앉아 잠깐 눈을 붙이고 오는 것이라니. 


하지만 수전이 익명의 이름으로 오롯이 혼자 있는 그 시간과 장소는 자아를 찾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19호실의 방에 가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던 수전의 이야기가 과연 1960년대에만 국한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의 기술로 세상은 풍요로워지고 눈부시게 발전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의 마음속은 더 황량해지고 있다. 요즘 세컨드 하우스, 또는 자신만의 공간 만드는 일이 열풍이다. 모두가 숨구멍이다. ‘제주 한 달 살기’ 역시 같은 맥락이다. 수전이 자신을 얽매는 자녀와 남편으로부터 도망치듯 19호실로 달려간 것처럼 현대인들 역시 자신을 옥죄고 있는 일이나 일상으로부터 달아나 혼자만의 시간이나 자유의 시간 갖기를 갈구한다. 나 역시 그런 공간을 열망하고 있지만 실현이 안 되고 있는 지금은 뒷산으로, 상록오색길로, 카페로 걸음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데 어르신 느티나무여, 당신은 어떠한가요?’

  

신준환은 ‘자유는 도망가는 것의 반대’라고 한다. 우리는 자유를 찾아 밖으로 헤매다가 지쳐 돌아와 후회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정한 자유는 마음을 고요히 모으고 자신을 자유롭게 놔두면서 안으로 마음을 모으는 것이란다.      


나무가 자라듯이 환경에 얽매어 있으면서, 자유의 정기를 뿜어내는 것이야말로 자유로운 정신이다. 그래서 자유로운 정신은 자신의 몸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살면서 자신의 몸을 만드는 것이다. 아니 새롭고 자유로운 것이 몸이다.(신준환, 『다시, 나무를 보다』, 135쪽)


나무는 옮겨 다니지 못하므로 온갖 어려움을 겪고도 늠름한 기상을 지니고 있기에 자유정신의 상징에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한다. 어르신 느티나무가 400년도 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결국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한 것이 아니라 한 자리에서 자신에게 몰입하는 것에서 오히려 자유와 편안함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노을이 지고 있을 때 어르신 느티나무를 본 적이 있다. 그 늠름한 가지 사이로 노을이 앉자 나무가 보석처럼 빛났다. 넋이 나간 듯 한참을 쳐다보았다. 그때도 어르신이 말하는 것 같았다. 노을이 자신의 몸을 감싸 줄 때 더없이 황홀하고, 달빛이 고즈넉하게 내려앉으면 편안함을 느끼고, 이른 아침 동이 터올 때 생동하는 힘을 얻는다고 말이다. 따라서 어디론가 떠날 수 없는 대신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것이 참 인생 아니겠냐고, 그것이 숨구멍이라고. 

(2021, 12. 21/2022.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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